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152화 (152/230)

제152화. 타르타로스 (4)

상원은 군주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가자고."

미소를 띠고 말한 군주가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의 등판이 새삼스레 넓어 보였다.

'그토록 깊은 허무를 보고서도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거지?'

"뭐 하나? 안 오고."

"아, 네."

상원은 군주를 따라 걸었다.

별빛 흐름을 밟아 찰박거리는 소리가 갱도를 따라 퍼졌다.

얼마간 그를 따라 걷다 보니 아까 보았던 폭포가 나왔다.

별빛 물결이 깊은 구멍을 향해 떨어지며 굉음을 냈다.

상원의 얼굴에 차가운 물보라가 튀었다.

그렇게 떨어지는 물결을 바라보다, 문득 상원은 궁금해졌다.

"그런데... 이 물은 어째서 계속 흐르는 겁니까?"

황금시대의 군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물결은 아버지의 통제 밖에 있기 때문이야."

"네?"

"내가 하는 건 우리의 아버지를 속이는 것이지. 그런데 이 물결은 아버지의 통제 밖에 있기 때문에, 내가 멈출 수 없어."

아, 시험 밖에 있는 거라 멈출 수 없다는 얘긴가?

그러자 문득 '기계장치의 신'을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그때 상원은 물었었다.

'황금시대의 모래시계'를 통해 하늘방을 탈출했던 그 날로 돌아갈 수 있는지.

기계장치의 신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황금시대의 모래시계는 시험 안의 물건이기 때문에,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시험의 범위에서만 가능하다고.

상원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여하튼. 따라와. 겁먹지 말고."

씩 웃으며 말한 황금시대의 군주가 폭포를 향해 몸을 던졌다.

"이런 미친...!"

달려간 상원이 구멍을 내려다보았다.

구멍 저 아래, 폭포가 부서지는 곳 바로 위로 황금빛 원이 빛나고 있었다.

그 위에 선 황금시대의 군주가 어서 오라고 상원에게 손짓했다.

군주를 따라 호수 위를 걸었던 일은 이미 겪었던 터다.

그래도 그렇지, 뛰어들었다간 그대로 물귀신이 돼버릴 것 같은 저 폭포로 뛰어내리라고?

'뛰어내려야겠지.'

침을 꿀꺽 삼킨 상원이 폭포를 향해 몸을 던졌다.

황금시대의 군주가 디디고 선 금빛 원이 상원의 눈을 덮쳐 왔다.

상원은 자기도 모르게 두 팔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덜컥하고 낙하가 멈추었다.

눈을 떴을 때, 상원은 금빛 원 위에 무릎을 꿇은 채로 두 손바닥을 대고 있었다.

황금시대의 군주가 상원을 바라보며 껄껄 웃었다.

"별거 아닌데 너무 겁먹는 거 아닌가? 이거보다 더한 일도 수없이 겪었을 거면서."

"그렇긴 합니다."

일어선 상원이 한숨을 푹 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이 있는 곳은 수직으로 떨어지는 널따란 관로의 한가운데였다.

머리 위에서는 별빛 폭포가 쏟아졌다.

그리고 그들의 옆에는 그 관로와 직각으로 이어진 또 다른 관로가 있었다.

거대한 괴물처럼 입을 벌린 새까만 관로에서 별빛 폭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거센 기세로 오수가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상원은 자기도 모르게 코를 막았다.

황금시대의 군주가 끌끌 웃으며 말했다.

"어때, 역겹지?"

군주가 관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따라와."

'저기로 들어간다고? 진짜로?'

상원이 다급하게 외쳤다.

"정말 거기로 들어가야 합니까?"

"그럼."

황금시대의 군주가 상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새하늘의 실체를 보려면, 반드시 이걸 봐야 해."

장막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처럼, 황금시대의 군주가 오수 줄기 속으로 사라졌다.

'이런 젠장...!'

선택지가 없었다.

상원도 군주를 따라 오수 속으로 몸을 던졌다.

곧 샛노란 오수가 상원의 몸을 덮었다.

다행히도 역한 오수가 상원의 코와 입속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구역질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상원은 한 발 한 발을 내디뎠다.

오수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황금시대의 군주가 남긴 금빛 흔적은 그 속에서도 눈에 띄게 빛났다.

그렇게 군주를 따라 한 발 한 발 내디딘 끝에, 상원은 오수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러자 관로가 이어졌다.

새하늘로 이어지던 관로와는 달리 여기저기 녹이 슬고 때가 잔뜩 끼어 있었다.

상원은 그 불결함에 몸서리를 쳤다.

이번에도 황금시대의 군주는 관로를 따라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끈적거리는 오수를 밟으며 상원도 군주의 뒤를 따랐다.

무언가 지분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길하고 혐오스러운 소리였다.

악취가 점점 진해졌다.

'어쩐지 후각이 마비되지도 않는군.'

상원은 미간을 찡그리며 코를 막았다.

다리가 점점 무거워지고 정신이 점점 아득해졌다.

그렇게 황금시대의 군주가 너무 멀리 가버린 것 같다고 느껴질 무렵, 군주가 멈춰 섰다.

그가 멈춰선 곳은 관로의 끝이었다.

"여기야."

상원은 군주의 옆에 서서 관로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에 보았던 풍경도 아까와 비슷했다.

새까만 밤하늘이 있었고, 그 안에서 별들이 고동치고 있었다.

새하늘이었다.

'뭐가 다르다는 거지?'

곰곰이 새하늘을 바라보던 상원은 차이점을 깨달았다.

"여기선 새하늘이 더 멀리 보이는군요."

"맞아."

상원이 군주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다인가요?"

"당연히 아니지. 고작 그게 다였다면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지."

황금시대의 군주가 먼 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상원은 군주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마치 온 땅에 불이 붙은 것 같은 모양의 우주가 새하늘 바깥에 있었다.

잠시 그곳을 바라보다, 상원은 거기가 어디인지 깨달았다.

상원도 가 본 적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지옥...!"

"그래 똑똑하군."

새하늘을 바치는 다섯 마신들 중 하나인 '세상 끝의 불꽃'의 영토이자 모든 악마들의 고향, 그 땅이 거기에 있었다.

지옥이 다가 아니었다.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쪼개진 우주도 있었다.

그곳은 '태초의 대족장'의 영토 '부서진 광야'였다.

눅눅한 안개가 자욱하게 낀 정글은 '오랜 땅의 이무기'의 영토 '오래된 늪지'였다.

마신의 영토들 이외에도, 생명나무의 제전을 치렀던 '중원'이며 오디나스와 싸웠던 '아나르' 같은 차원들도 보였다.

그렇게 수많은 차원들이 새하늘을 중심으로 마치 포도송이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거대한 비누 거품 같기도 했다.

"이건...."

"시험의 우주다.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니지."

황금시대의 군주가 싯누런 오수를 한 움큼 쥐어 들었다.

"이게 어디서 오는지를 봐야 할 것 아니겠어?"

군주의 손에서 누른 오수가 뚝뚝 떨어졌다.

조금도 더 쳐다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그 근원을 반드시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빛 물결은 새하늘 속에서 꿈꾸는 별들로부터 흘러나왔었다.

그렇다면 이 오수는 다른 차원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말인가?

상원은 시험의 우주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차원들 사이 사이로 누런 물이 흐르긴 했지만 그건 차원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지는 않았다.

오수는 분명 다른 곳에서 흘러오고 있었다.

상원은 그 흐름을 따라갔다.

그렇게 우주의 모습을 보다가, 상원은 이윽고 깨달았다.

차원 사이 사이를 흐르는 오수가 어디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는지.

그건 차원과 차원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그림자였다.

뭐라 형용하기조차 어려운 외형에, 그 껍데기엔 수천 개는 될 듯한 시뻘건 눈이 줄줄이 박혀 있는 거대한 괴물.

수많은 차원들 사이로 수천수만 가닥 촉수를 내뻗고 있는 그림자가의 껍데기에서 누런 오수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걸 보고 상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하나뿐이었다.

"괴물...."

상원의 말에 군주의 얼굴이 굳었다.

"그래 맞아. 괴물이야 이건. 새하늘에서 꿈꾸는 자들의 꿈을 먹고 사는 괴물이다."

상원은 언제 느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아득한 감정을 느꼈다.

그건 공포였다.

미칠 듯한 공포가 상원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일반인은 존재를 인식한 것만으로도 미쳐버린다는 마신들을 처음 만났을 때 느낀 감정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황금시대의 군주가 물었다.

"우리가 저 괴물을 뭐라고 부르는 줄 아나?"

저런 괴물이 있다는 것도 충격적인데, 그걸 부르는 이름이 있다고?

"그 말... 우리가 평소에 저걸 '부른다'는 말이군요?"

황금시대의 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원의 사이 사이에서 차원의 부산물을 탐식하고 있는 저 괴물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 있다는 말인가?

평소에 입에 올렸던 이름들 중, 저걸 수식할 만한 게 있었던가?

'아아, 설마!'

상원의 눈이 커졌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으며, 덜덜 떨리는 이를 깨물며, 상원은 그 이름을 불렀다.

"새하늘 아버지."

"빙고."

황금시대의 군주가 껄껄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슬펐다.

상원은 알 것 같았다.

한때는 절대자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새하늘을 속이고 시간의 틈새를 돌아다니는 권능을 가진 이 강대한 존재가 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하늘의 찌꺼기들이 흐르는 이 하수구에서 영락하게 되었는지.

"저걸 보고 나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군요."

"그렇지."

군주의 눈빛이 아득했다.

"나는 말이야, 새하늘이 한바탕 꿈일 뿐이라는 걸 알고 나니까 다시 거기 돌아갈 수가 없었어. 그래서 저 하수구를 돌아다니다가 여기에 오게 됐지. 그랬더니."

군주가 한숨을 쉬었다.

"뵙게 된 거지. 존경하는 우리의 아버지를."

군주가 상원을 향해 처연하게 웃었다.

"옥좌의 뒤에서 모든 것을 움직이시는 그분. 아버지의 존안을 직접 뵈었는데... 달리 뭘 할 수 있었겠어? 저... 괴물을 상대로 도대체 뭘 어떻게 하느냐고."

상원은 침을 삼켰다.

이걸로 알게 됐다.

새하늘이 약속한 구원은 구원의 흉내를 낸 꿈이며, 실제로는 그 새하늘의 바깥에 꿈을 빨아먹고 사는 괴물이 있음을.

그 괴물이 바로, 새하늘 교도들이 그토록 받들었던 구원의 아버지임을.

거대한 감정의 파도가 상원을 집어삼켰다.

그건 절망이었다.

그와 함께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 또 하나 올라왔다.

그건 분노였다.

"이걸... 나에게 보여준 이유가 뭡니까?"

상원이 도끼눈을 뜨고 물었다.

"기왕 삽질할 거 알고 삽질하라고요? 그게 그냥 꿈인 걸 알아도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그냥 가서 나머지 별이나 따라고요?"

"아니야."

군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너를 여기에 데려온 건, 니가 불신자이기 때문이야. 스킬을 믿고, 새하늘을 믿은 우리들은 그 믿음이 부정당했을 때 아무것도 못 하고 붕괴 당해버렸어. 아니면 두 손 두 발 다 들도 백기투항하거나. 그 다람쥐 영감님처럼."

군주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자네는 아니야. 자네는 아무것도 믿지 않잖아."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나는 구원을 믿었습니다!"

"아니... 자네는 구원을 믿은 게 아니야. 새하늘을 믿지 않는데 어떻게 구원을 믿나."

군주의 황금빛 눈동자가 상원을 꿰뚫었다.

"새하늘이 약속한 구원으로 도망친 거지."

덜컥, 마음속에서 무언가 무너졌다.

그와 함께 상원은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군주가 쪼그려 앉아 상원과 눈을 맞추었다.

"알아, 절망스러운 거. 도대체 뭘 할 수 있겠나 싶겠지. 그런데 말이야, 이 말은 믿으면 좋겠어. 이 상황까지 와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건, 새하늘을 통틀어 오로지 자네 한 명뿐이야."

상원은 군주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힘없이 웃는 그의 눈동자가 유독 반짝였다.

그때였다.

"오오오오오!"

어디선가 거대한 포효가 들려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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