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타르타로스 (3)
상원은 '신화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이 몸이, 황금시대의 군주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고?'
그 재료를 생각하니 초월적인 성능이 납득이 갔다.
황금시대의 군주가 껄껄 웃었다.
"내가 절대자일 때는 고작 성좌급에서 빌빌대던 양반이 어느새 절대자에 오르더니, 그다음엔 왕좌를 내주고는 여기까지 와서 갈비뼈를 뽑아 가더군."
기계장치의 신을 얘기하는 것이다.
‘잠깐, 여기까지 왔었다고?’
"'기계장치의 신'이 여기를 왔었습니까?"
"그럼. 왔었지."
황금시대의 군주가 상원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영감님이 정말로 권좌에 다시 오르고 싶었나 봐. 그 몸속에 내 것만 들어있는 게 아닌 걸 보니까 말이야. 지금 권좌에 있는 친구 것도 있는 것 같고."
‘지금 권좌에 있는 자면, '외눈 현자'의 권능도 들어있다고?’
아, 아마 '스킬 메모리'가 그의 것일 거다.
외눈 현자는 말 그대로 ‘스킬 마스터’니까.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군주의 말마따나 스킬 메모리며 레벨업 시스템 같은 기능들은 하나하나가 주신급의 성현에 필적하는 것들이었다.
그런 것들을 이곳에 욱여넣어 놓다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야 그렇게까지 해서 자기의 장기 말을 이렇게 강하게 만들 필요가 없었겠죠."
황금시대의 군주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만은 아니야. 내가 그 생각을 한 건, 영감님이 여기에 왔었기 때문이지. 여기에 왔는데도 다시 돌아갔다고."
"무슨 말이죠?"
황금시대의 군주가 통로 반대편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여기 왔다는 건 저걸 봤다는 거거든. 그걸 보고도 게임을 계속할 생각을 하다니, 대단한 집착이야."
황금시대의 군주가 상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뭐 여하튼, 가자고. 저 끝에 있는 걸 봐야 할 거 아냐."
황금시대의 군주가 호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 발걸음이 거침이 없어서, 상원은 황금시대의 군주가 그대로 호수 속으로 들어가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무색하게도, 황금시대의 군주는 땅을 디디듯 물 위를 걷기 시작했다.
"뭐 이런...."
황금시대의 군주가 상원을 돌아보고 말했다.
"빨리 오게 불신자 선생. 당신도 지금은 시간의 틈새에 있는 존재니까, 나처럼 할 수 있어."
호숫가에 다가간 상원이 반신반의하여 호수에 발을 디뎌 보았다.
"어?"
수면을 밟자 정말로 단단한 지면을 디딘 것 같았다.
그렇게 상원은 황금시대의 군주를 따라 거대한 별빛 호수를 건넜다.
호수 건너편에는 다시 널따란 통로가 이어졌다.
상원은 군주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걸을수록 상원의 발목을 감싸고 흐르는 물결의 별빛이 강해졌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이윽고 상원은 통로의 끝에 도달했다.
거대한 구멍 건너편으로 찬란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잘 봐. 이게 바로 새하늘의 모습이야."
군주의 옆에 선 상원이 통로의 바깥을 보았다.
거기에 우주가 있었다.
새까만 어둠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고, 어둠의 사이 사이로 찬란한 성단과 성운들이 눈 부신 빛을 내뿜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단순한 우주의 모습과는 달랐다.
별빛 하나하나에서 묘한 생동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 모습은 어딘가, 거대한 괴물의 산란못 같기도 했다.
"이건...?"
이 모습, 어딘가 낯이 익었다.
그 밤하늘을 한참 바라보다가 상원은 기억해냈다.
이 풍경을 어디서 보았는지.
"어때? 50번 시험, 자네가 거기서 봤던 게 이거 아닌가?"
"아아!"
상원의 입에서 짧은소리가 나왔다.
맞다, 50번 시험에서 이것을 보았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원의 머릿속에 아직도 생생했다.
모든 시험을 마쳤을 때 하늘이 갈라지며 이 산란못 같은 우주가 밤하늘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었다.
다른 수험자들은 새하늘의 수호신들이 내려주는 빛을 따라 승천했지만, 상원은 승천하지 못했다.
수호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탈락하고 나서 기계장치의 신의 연구실에서 깨어났다.
그때 보았던, 하늘이 열리며 그 너머로 드러났던 새로운 하늘.
별들이 꿈틀대는 저 거대한 우주가 바로 약속된 구원의 땅, 새하늘이었다.
황금시대의 군주가 새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잘 보라고 불신자 선생. 저 별들 하나하나를 말이야."
상원은 눈을 크게 뜨고 새하늘을 살펴보았다.
꿈틀대는 별들 사이로 혜성 하나가 지나갔다.
용암질의 본드래곤, 다름 아닌 ‘화산정의 혐오체’의 몸이었다.
그리고 새하늘의 가장자리에 꽃봉오리처럼 막 빛나기 시작하는 별 하나가 보였다.
그 새파란 빛깔이 ‘인식의 경계’의 비늘 색과 같아서, 그곳이 그녀가 오를 자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옆으로 빛나는 별들 하나하나를 살펴보던 상원의 입이 벌어졌다.
별들 하나하나 안에 몸이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별들 하나하나가 승천자의 육신입니까?”
황금시대의 군주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맞아.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니야. 저길 봐.”
상원은 황금시대의 군주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다른 별들에 비해 유독 거대한 별 하나가 부정형의 아메바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조금 더 자세히 보니, 별이 꿈틀거리는 것이 아니었다.
별빛에 휩싸인 근육질의 남자가 심한 악몽을 꾸는 듯 뒤척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별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쩐지 그의 모습이 낯설지가 않았다.
‘누구지?’
고민하던 상원에게 황금시대의 군주가 말했다.
“발할라의 수장. 천둥을 두른 대전사."
상원이 방금 전 제전에서 철저히 짓밟고 왔던, 천둥망치 군나르의 수호신이었다.
“화신이 죽었다 그래도 저토록 처절하게 발광하진 않을 텐데, 아무래도 상상도 하기 힘든 굴욕을 겪었나 보군."
경기장에 버려두고 왔던 군나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 콧대 높은 세브로 랭킹 1위를 벌레처럼 꺾어버리고 왔으니 당분간은 재기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그 정도면 수호신이 저토록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것도 이해해 갔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었던 건 그렇게 몸부림치는 '천둥을 두른 대전사'의 모습이 마치 악몽에 시달리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지독한 악몽을 꾸는 것 같군요."
"맞아."
황금시대의 군주가 다른 곳을 가리켰다.
"저 친구는 행복한 꿈을 꾸고 있네."
군주가 가리킨 곳에는 새까만 수염을 기른 남자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쌔근쌔근 숨을 쉴 때마다 두 쌍의 황금빛 날개가 조용히 고동쳤다.
"저자는...."
"바빌론의 수장, 천정의 재판관."
"아아!"
바빌론의 길드장 '스칼렛 이베르손'의 수호신.
상원도 익히 아는 자였다.
다른 별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그들을 살펴보던 상원은 공통점을 발견했다.
'천둥을 두른 대전사'와 '천정의 재판관' 뿐만이 아니었다.
표정과 자세는 제각각이었지만, 새하늘에 오른 승천자들 모두가 꿈을 꾸고 있었다.
불길한 느낌이 상원을 엄습했다.
목소리가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설마... 이렇게 새하늘에 오른 이들은... 꿈을 꾸는 겁니까?"
황금시대의 군주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맞아."
황금시대의 군주가 다른 곳을 가리켰다.
"나는 저기 있었지."
그가 가리킨 곳에, 다른 별들과는 비교 자체를 불허할 만큼 크고 찬란한 별이 있었다.
그 중심엔 새하얗게 빛나는 의자와, 거기에 앉아 세상의 모든 근심을 짊어진 표정으로 졸고 있는 노인이 있었다.
두 쌍의 날개를 가진 까마귀가 위성처럼 별의 근처를 떠돌았다.
새하늘의 카르마를 감당하고 있는 저자가, 절대자 '외눈 현자'였다.
그리고 그가 앉아 있는 저곳이 바로 옥좌였다.
그 옥좌에 앉아 기계장치의 신이, 모든 것을 걸고 돌아가고자 하는 그곳.
오랜 세월을 되짚어보듯, 군주의 목소리가 아득해졌다.
"절대자가 되고 나서도 시험은 끝이 없었어. 새하늘은 새로운 세계를 집어삼켰고, 시험은 끝도 없이 반복됐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졌지. 이 영원한 시험의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지."
군주의 눈에서 황금빛 안광이 바스러졌다.
"그래서 내 모래시계로, 시험의 시간 사이에 틈새를 만들어서 바깥으로 나왔어. 그리고 알게 된 거야. 새하늘이라는 게 사실은, 세상을 초월했다고 믿는 자들이 꿈을 꾸는 곳에 불과하다는 걸."
상원의 눈이 흔들렸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억지로 참으며, 상원은 절망적인 눈으로 새하늘을 내려다보았다.
새하늘에 오르면 누나와 아버지에게 속죄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속죄라는 게 고작 꿈꾸는 것이었다고?
군주의 목소리가 아득했다.
"허무하지 않은가?"
상원은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내 뼈로 만든 자네의 몸, 그리고 내 시계로 만든 자네의 심장. 그걸로, 나는 자네의 여정을 따라 왔어. 그래서 아주 잘 알지. 자네가 죽음을 무릅쓰고, 저 지독한 시험을 다시 겪어가면서까지 새하늘에 오르려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군주의 목소리에 메마른 연민이 묻어 있었다.
"그래서 자네는 반드시 알아야만 했어. 자네가 구원이라고 믿은 그것의 실체를 말이야."
황금시대의 군주가 상원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황금빛으로 변한 그의 눈동자에 수 없는 동심원들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이제 선택할 차례야. 그 누구도 깨우지 않는 저 긴 단잠이 구원임을 믿을 건지. 그게 구원이라고 믿은 자도 있지."
상원은 자기도 모르게 군주의 말을 반복했다.
"구원이라고 믿은 자?"
아아, 그래서 그 말을 했던 거군.
이 하수구까지 와서 황금시대의 군주의 갈비뼈를 빼가고도, 다시 시험을 치르기 위해 돌아간 자가 있다고.
상원은 스스로 던진 물음에 답했다.
"기계장치의 신."
황금시대의 군주가 웃었다.
"역시, 머리가 좋군."
군주가 주저앉은 상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래서 어찌할 텐가? 순순히 다시 시험으로 돌아가서, 저 별들 중 하나가 될 텐가?"
상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토록 철석같이 믿었던 구원이라는 게 단지 단꿈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는데, 어떻게 거기로 순순히 돌아갈 수가 있겠는가?
"그런 게지. 나도 그랬어."
황금시대의 군주가 뒤를 돌아보았다.
"보이는 출구라곤 여기밖에 없더라고. 저 새하늘에서 잠자는 이들의 찌꺼기가 모여 흐르는 이 하수구. 그런데 여기에 왔을 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지. 뭘 것 같아?"
황금시대의 군주가 시원하게 웃으며 상원을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뭐가 또 있다는 건가?
상원은 그저 벙찐 얼굴로 군주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내가 그랬었지? 시험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주겠다고. 지금 자네가 본 건, 새하늘 뿐이야. 새하늘의 바깥이 아니지."
황금시대의 군주가 하수구의 물결을 한 움큼 쥐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별빛들이 어째서 저 아래까지 내려가면 구정물이 되는 걸까?"
'그렇네, 어째서지?'
마침 상원도 궁금했던 차였다.
그때 '지하의 수호자'가 했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자기는 모든 것의 아래에 있기 때문에 어디에도 갈 수 있다고.
"저 하수구, 여기로만 통하는 게 아니군요?"
"맞아, 그거야."
황금시대의 군주가 껄껄 웃으며 상원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 그다음을 봐야지. 그렇다면 정말로 이 새하늘의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굳은 얼굴로, 상원은 황금시대의 군주의 손을 잡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