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예언 (3)
이지를 잃어가는 해원향이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관중석으로 뛰어들었다.
"크르르릉!"
질기기 그지없는 '결투장'의 장벽은 종잇장처럼 쉽게 찢겨져 나갔다.
"젠장!"
상원은 해원향을 따라 경기장의 담벼락을 넘어섰다.
객석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이제는 완연한 괴물이 되어버린 해원향이 객석의 수험자들을 유린하고 있었다.
그녀가 사지와 꼬리를 휘두를 때마다 시퍼런 안개가 뿜어져 나와 수험자들을 덮쳤다.
세브로 랭커 '드높은 발키리'마저 한순간 얼음덩어리로 만들어버린 공격이었다.
다른 수험자들이라고 무사할 리 없었다.
안개에 맞은 수험자들이 얼어붙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살려줘!"
"비켜요! 비켜요!"
제아무리 여기 모인 수험자들이 강자들이라 해도 해원향이라는 재해 앞에서는 그저 무력할 인간일 뿐이었다.
그때 아나운서가 외쳤다.
"제전에 모인 수험자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긴급 공지하겠습니다. 수험자 여러분들께 긴급 퀘스트를 부여합니다. 괴물이 되어버린 해원향을 해치우십시오. 레이드에 참여하신 분들에게는 기여도에 따라 어마어마한 보상이 부여됩니다. 자세한 사항은 시스템 메시지를 통해 확인해주시기 보랍니다."
상원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긴급 퀘스트라고? 갑자기?’
이어서 상원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긴급 퀘스트 <이무기 사냥>을 시작합니다.]
[이무기가 된 해원향을 물리치십시오.]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차등 지급됩니다.]
[보상 기준액: 30만 코인]
‘사… 삼십만?’
시험의 끝까지 가보았던 상원조차도 놀랄 만한 액수였다.
그러니 다른 수험자들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혼비백산 도망치던 수험자들이 뒤를 돌아 전열을 가다듬었다.
“후우, 후우. 언제는 이런 거 안 겪어봤나?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야.”
“젠장… 그래, 해 보자.”
삼십만 코인은 도망치던 수험자들을 붙잡아 세우기에 충분한 액수였다.
거기다 보상 기준액이 30만 코인이라는 건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다시없을 일확천금의 기회라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상원은 말을 돌려보내고 담벼락 위에 서서 객석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괴수가 된 해원향을 향해 불덩이며 벼락을 비롯한 수십 가지 스킬이 쏟아지고 있었다.
‘시공간의 세습자’의 검은 번개와 ‘태양매’의 시뻘건 불덩이도 보였다.
하지만 중 어떤 스킬도 해원향에게 타격을 입히지 못할 거란 사실을 상원은 알았다.
어느새 진아와 문혁이 상원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진아가 질린 얼굴로 말했다.
“미쳤군… 다들 미쳤어요. 다들 저 괴물의 상대가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상 기준액 30만 코인이면 사람의 눈을 멀게 하기 충분한 액수죠. 특히 시험 안에서는요.”
상원의 말에 진아가 고개를 떨궜다.
자기 역시도 상원을 만나지 못했다면 저 틈바구니 사이에 끼어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전생의 윤진아였다면 망설임 없이 해원향에게 덤볐겠지.
문혁이 말했다.
“저 상황에 퀘스트를 건 것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수험자들이 모조리 죽어 나갈 게 뻔한데 이런걸….”
“그렇게 해서라도 이 상황이 기관의 통제하에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것 아니겠습니까?”
해원향이 여기에서 이무기가 되는 건 기관이 상정한 시나리오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퀘스트를 부여하면서라도 이 돌발 상황을 시험의 일부로 만든 것이다.
문혁에게 대답한 상원이 다시 객석을 보았다.
“으오오오오!”
하늘을 보며 울부짖는 해원향의 괴성은 말 그대로 괴수의 그것이었다.
"물러서지 마!"
"조금 더! 조금 더!"
수험자들은 물러서지 않고 스킬을 쏘았다.
'저들 중 과연 몇 명이나, 이 지옥에서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
해원향이 괴성을 지르며 발을 굴렀다.
그러자 쾅 하고 지면이 연약한 과자처럼 부서지며 균열을 따라 새파란 안개가 솟아올랐다.
안개에 맞은 수험자들은 그대로 얼음덩어리가 되어버렸다.
해원향이 발을 한 번 더 굴리자 얼어붙은 수험자들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이어서 상원은 예상 밖의 모습을 보았다.
해원향의 꼬리 끝에서부터 새파란 기운이 등마루를 따라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상원은 그 스킬이 무엇인지 직감했다.
벽무공을 한 지점에 모아 쏘는 해무 광선(海霧 光線).
스킬 자체에 면역인 상원을 제외하면 저걸 맞고 무사할 수 있는 수험자는 아무도 없었다.
스킬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오싹한 오한이 전신을 휘감았다.
상원은 해원향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걸 보았다.
“피해요.”
한 마디를 남긴 상원이 해원향을 향해 해골마를 몰아가기 시작했다.
문혁과 진아가 피할 수 있도록 광선을 자신에게 고정시키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해원향의 정수리에 돋은 뿔까지 새파랗게 빛나면서 그녀의 입 주위로 시퍼런 안개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이제 온다.'
오오오오!
굉음과 함께 해원향의 입으로부터 시퍼런 광선이 상원을 향해 뻗어왔다.
광선이 어찌나 강력한지 그 섬광에 공간마저 갈라져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광선의 한기가 지나간 자리로 새하얀 눈꽃이 흩날렸다.
해원향과 상원 사이에 있던 애꿎은 수험자들은 그대로 얼어붙은 먼지가 되어 부서져 버렸다.
상원은 달랐다.
말을 달리는 기세 그대로, 상원은 바위에 박힌 검에 마력을 실어 정면으로 뻗어오는 광선을 내리쳤다.
순간 두 팔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이건 정말로 예상 밖의 위력이었다.
"큭!"
'무슨 광선에 물리력이 실려 있는 거야?'
잠시 후 해무 광선이 끝났다.
해원향이 으르렁거리며 상원을 쏘아보았다.
"크르르릉...!"
해골마의 걸음이 비루먹은 망아지마냥 현저하게 느려졌다.
해무 광선으로 인한 냉기가 상원과 해골마를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라면 해원향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해골마가 부서져 버릴 판이었다.
해골마를 돌려보낸 상원이 바위에 박힌 검을 땅에 박은 채로 지면을 디디고 섰다.
얼음덩어리가 달라붙은 옷자락이 무거웠다.
"흐으으으."
해원향이 새파란 숨결을 내뿜으며 상원을 향해 서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 압도적인 질량에 땅이 푹푹 꺼졌다.
해무 광선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본 수험자들은 더는 공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찾아온 고요한 공간 속에서, 상원은 거대한 태풍 구름처럼 다가오는 해원향의 모습을 조용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괴수의 그림자가 상원을 뒤덮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군.'
박피 단검이 있으면 지상에 남은 해원향의 껍데기를 깨끗이 지워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해원향은 상원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강했다.
그렇다면 다음을 위해 준비했던 패를 지금 꺼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걸 벌써 꺼내게 될 줄이야.'
네 번째 별을 얻을 때나 부르려고 했던 그 이름을, 상원은 눈을 감고 나직이 불러 보았다.
"원탁의 왕이시여."
순간 새하얀 가지로부터 불어 닥친 때아닌 돌풍에 상원의 몸을 덮고 있던 얼음 덩어리들이 날아갔다.
눈을 떴을 때, 상원의 눈앞에는 땅에 거꾸로 박힌 곧디곧은 양손 검이 있었다.
하늘이라도 떠받칠 수 있을 것처럼 단단해 보이는 검신을 따라 유려한 은빛이 흘렀다.
바위에 박힌 검을 보관하고 있던 '인큐버스의 아들'이 보여준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것은 환상에 불과했고 이것은 누가 뭐래도 엄연한 실체였다.
상원이 그 주인의 이름을 부른 순간, 새하얀 가지에 불과했던 보구가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상원은 손잡이를 잡았다.
시험의 후반부를 함께 해쳐왔던 그 익숙한 감각이 반가웠다.
손잡이를 당기자 검이 쑥 뽑혀 올라왔다.
그렇게 땅속에 묻혀있던 검신의 찬란한 광채가 세상에 드러났다.
"이 바위에 박힌 검을 뽑아 올린 이가, 그대의 이름을 부르나이다."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두르자 익숙한 파공음이 났다.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렸다.
그때 누군가 상원의 뒤에서 말했다.
"왕이 될 자격이 있는 이여, 그대의 부름에 답한다."
순간 시공이 얼어붙었다.
상원을 향해 태풍처럼 다가오던 해원향의 걸음도 멈추었다.
상원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비늘 갑옷에 거대한 왕관을 걸친 거한의 은빛 영체가 서 있었다.
그가 바로 이 검의 원래 주인, 타락신 '원탁의 왕'이었다.
순간 반가운 마음에 가벼운 인사를 건넬 뻔했다가, 상원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상원에겐 시험 후반부를 함께 해쳐온 동료였지만, 원탁의 왕에게 상원은 초면일 테니까.
상원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예를 갖춥니다 왕이시여."
왕이 상원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대답했다.
"일어서라 기사여."
일어선 상원이 익숙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얼굴을 뒤덮은 수염 아래 주름 한 자락 한 자락을 따라 세월이 빚은 노련함이 읽혔다.
왕이 검을 보며 물었다.
"'인큐버스의 아들'을 만났는가?"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 잘 있다고 전해 달라 했습니다."
"그렇군. 우리가 그 아이에게 몹쓸 짓을 했지."
그건 기사단이 통째로 봉인된 보구 '바위에 박힌 검'을, 왕의 자질을 가진 이가 나타날 때까지 맡아 달라 부탁한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 나를 부른 이유가 있는가?"
"그건...."
그때였다.
해원향의 포효가 상원의 말을 끊었다.
"오오오오!"
왕이 해원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아, 이무기로군."
왕이 미간을 찡그렸다.
"부름에 응해 나온 자리에서 말하기 애석한 말이네만, 저건 원탁의 기사들이 모조리 달려들어도 힘들 것 같네."
상원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기사들의 힘이 필요해서 폐하를 알현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상원은 왕을 향해 박피 단검을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이무기를 잡을 칼입니다."
박피 단검에 손을 얹은 왕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 검을 어떻게 쓰는지 알고 싶은 건가?"
"그렇습니다."
"좋네. 그대의 몸을 맡기게."
고개를 끄덕인 상원이 전신의 힘을 뺐다.
그러자 누군가 상원의 몸을 받쳐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원탁의 왕이 상원의 몸속에 들어와 움직임을 보조해주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 어떤 수호신도 없는, 그 어떤 스킬도 쓰지 못하는 상원이 시험의 최후반부를 버틸 수 있었던 방법이었다.
머릿속에 왕의 음성이 들렸다.
- 이렇게 한번 해 보지.
상원은 박피 단검을 쥔 손을 허공에 휘둘러보았다.
검의 궤적이 명백하게 달랐다.
상원이 휘두르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간결하고 효율적이었다.
- 좋아.
상원이 원탁의 왕을 부른 이유가 이것이었다.
원탁의 왕은 시험 전체를 통틀어 둘째가라면 서러운 검객이었다.
박피 단검을 다루는 실력도 상원과는 하늘과 땅 차이일 수밖에 없었다.
"가볼까."
상원의 입에서 왕의 것이 뒤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단검에 힘을 불어넣자 상원이 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곧고 정한 검기가 뻗어 나왔다.
한 걸음 한 걸음, 상원은 날뛰는 해원향을 향해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마룡을 향해 달려드는 전설 속의 영웅왕이 함께하는 감각을 상원은 느낄 수 있었다.
"크아아아악!"
해원향의 포효가 하늘을 갈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