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화. 예언 (2)
박피 단검의 손잡이를 쥐자 살아있는 뱀을 잡은 듯 꿈틀거리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단검에 담긴 마력이 요동치는 것이었다.
단검이 먹이를 노리는 뱀과 같은 소리를 냈다.
스으으으윽-
박피 단검, 이름 그대로 껍질을 벗기는 단검이다.
그렇다면 무엇의 껍질을 벗기는가?
바로 해원향이 뒤집어쓰고 있는 인간의 껍질이다.
그러니까 이 박피 단검은 전적으로 해원향을 겨냥한 아이템이었다.
흑천의 뜻을 받들어, 진작 했어야 할 등선을 겨우겨우 참고 있는 해원향을 강제로 등선시키는 물건.
이것을 얻은 순간 상원은 세 번째 별을 반드시 얻을 것임을 확신했다.
네 발 달린 밤을 만난 것도, 구두망을 죽였던 것도 모두 이 아이템을 얻기 위해서였다.
상원이 황제를 바라보고 말했다.
"잘 해주었소 황제."
상원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이 꺼져가고 있었다.
해원향을 공략하기 위해서, 상원은 우선 단검을 황제에게 주었다.
그래야만 해원향을 공략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박피 단검이 해원향의 약점을 정면으로 공략하는 물건이라 해도, 그걸 들고 해원향을 이길 보장은 없었으니까.
그만큼, 해원향은 정말로 차원이 다른 강자였다.
그래서 하상효를 이 판에 끌어들인 것이다.
박피 단검을 들고 해원향의 껍질을 어느 정도 벗겨내는 그 역할을, 해원향 다음 가는 강자인 하상효가 해주어야 했기 때문에.
“당신이라면 잘해줄 걸 믿고 있었어.”
상원의 눈앞에 전생의 광경이 스쳐 갔다,
25번 시험의 정상적인 진행은 제전에서 이기고 보물을 얻는 것이었다.
25번 시험에서 이기고 나면, 그다음은 황제 하상효 레이드로 이어진다.
황제는 해원향을 죽일 힘을 쌓기 위해 제전에서 이긴 수험자들을 잡아먹으려고 들고, 수험자들은 그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전생의 상원도 그 자리에 있었기에, 황제 하상효가 어떤 수준의 괴물인지를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결과는 완벽했다.
아니, 오히려 상원이 상상했던 그 이상이었다.
해원향은 이제 인간의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하상효가 저 정도로 껍질을 벗겨낼 줄이야.‘
해원향이 상원을 노려보며 혀를 날름거렸다.
"쉬이이익.“
상원이 박피 단검에 마력을 싣자, 단검이 공중에 두둥실 떠오르며 그와 비슷한 뱀 소리를 냈다.
쉬이이익-
"이제는 인간의 말도 할 수 없게 되었구나."
- 불신자!
"슬프지 않은가 해원향. 이대로 그 어떤 즐거움도 누리지 못하고, 그대로 저 하늘에 오르는 것이 말이다."
- 나는, 흑천의 뜻에 따를 뿐이다.
상원이 피식 웃었다.
"그래, 흑천의 뜻."
상원이 박피 단검에 마력을 더 불어넣자 박피 단검으로부터 새빨간 검기가 솟구쳤다.
"해원향, 알고 있나. 당신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게 흑천의 뜻 때문이라는 걸."
- 뭐?
상원은 노트에서 보았던 그 구절을 읊었다.
"그는 묵과 같은 옷에 눈과 같은 머리칼을 하였으니, 생명나무의 제전에서 껍질이 벗겨져 죽음을 맞으리라."
상원의 말에 해원향이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녀의 눈동자가 미친 듯 흔들리고 있었다.
- 너... 니가, 어떻게 그걸?
"거기까진 알 것 없고."
상원이 새하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래서 너는 그 묵과 같은 옷에 눈과 같은 머리칼을 한 이의 껍질을 벗기러 온 것 아니냐."
상원의 새까만 코트 자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껍질이 벗겨지는 건 내가 아니라 해원향 당신일 것 같은데."
그제야 해원향은 하얗게 새어버린 자기 머리칼과 새까만 도포를 바라보았다.
잠깐 침묵했던 해원향이 하늘을 향해 미친 듯 웃었다.
"끄하하하하하, 끄하하하하하!"
그 소리가 마치 우는 것처럼 들렸다.
- 이것이었습니까? 흑천이시여, 이것이었습니까?
그러다가 해원향이 두 팔을 툭 늘어뜨렸다.
그녀의 눈가를 따라 은은한 은빛을 띤 눈물이 툭 흘러내렸다.
- 이 고통을... 제게서... 거두어주소서.
흑천을 향한 그 기도에 상원이 답했다.
"인간의 껍질을 벗어라. 그러면 고통도 끝날 것이다."
상원은 해원향을 향해 박피 단검을 쏘았다.
새빨간 유성처럼 해원향을 향해 똑바로 날아가는 박피 단검의 뒤로, 상원은 말을 달리며 '바위에 박힌 검'을 뽑아냈다.
새하얀 나뭇가지에서 긴 검기가 솟아올랐다.
- 아버지의 뜻대로이지, 네 뜻대로는 아니다.
해원향의 전음이 차가웠다.
상원은 직감했다.
이 싸움은 몹시 어려우리라는 걸.
해원향이 발을 구르자 그녀의 주변으로 새파란 안개가 솟아났다.
'드디어 저걸 꺼내는군.'
해원향의 성명절기, 벽무공(碧霧功).
공력을 안개처럼 뿜어내는 기술로, 해원향의 어마어마한 공력량과의 시너지로 무시무시한 위력을 뽐냈다.
해원향을 향해 날아가던 박피 단검의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졌다.
벽무공 때문이었다.
해원향이 팔을 휘둘러 박피 단검을 쳐내고는, 말을 모는 상원을 향해 정면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상원은 해골마 소환을 해제하고 옆으로 몸을 날렸다.
"흡!"
간발의 차로 새파란 안개가 상원의 몸을 스쳤다.
벽무공이 묻은 코트 자락은 성에가 끼어 무거워져 있었다.
상원은 코트를 집어 던지고 해원향이 날아간 방향을 보았다.
그녀가 향한 곳에서 굉음이 들렸다.
그녀가 날아간 곳은, 공교롭게도 발할라의 길드원들이 있던 곳이었다.
무지개 다리를 타고 바텀에서부터 탑까지 한 번에 날아온 발할라 길드원들은 해원향의 공격을 버틸 재간이 없었다.
세브로 랭킹 12위, 현시점 최강의 탱커 중 하나라는 '무지개 다리의 파수꾼'은 해원향의 육탄돌격을 맞고 그대로 피떡이 되어버렸다.
세브로 랭킹 19위 '드높은 발키리'는 벽무공을 뒤집어쓰고 얼음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해원향이 발을 구르자 드높은 발키리가 얼어붙은 상태 그대로 산산이 부서졌다.
세브로 랭커 두 명이 빗나간 공격에 그대로 산화한 것이었다.
수험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 충분한 광경이었다.
해원향이 뒤를 돌아보았다.
- 불신자.
그녀의 주위를 맴돌던 새파란 안개가 물줄기 모양으로 합쳐지더니 그녀의 손으로 가서 거대한 갈퀴 모양의 무기가 되었다.
상원이 중얼거렸다.
"안개 발톱."
해원향이 말했다.
- 이것을 꺼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구나. 내가 안개 발톱을 뽑게 하다니, 칭찬하마 불신자.
해원향이 상원을 향해 걸어올 때마다 땅이 쿵쿵대고 울렸다.
그녀의 샛노란 눈이 높은 곳에서 상원을 내려다보았다.
- 내 너는 특별히 먹기 좋게 요리하려 했거늘, 안 되겠다. 네가 이 땅에 있었다는 흔적까지 모조리 지워주마.
해원향이 안개 발톱을 휘두르자 발톱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새파란 벽무공이 남았다.
"큿!"
상원이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뒤로 날렸다.
그러자 안개 발톱이 상원이 있던 자리에 박히고, 발톱이 뽑아낸 새파란 물줄기가 그 위로 쏟아졌다.
해원향의 말대로 저걸 맞으면 이 세상에 있었다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것이었다.
뒤이어 상원이 있던 자리로 해원향의 꼬리가 떨어졌다.
상원이 몸을 날리자 꼬리가 지면을 때리며 폭탄이라도 터지는 것 같은 굉음이 났다.
상원은 숨을 가다듬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싸울 수는 없었다.
'멀리 떨어져서 싸우자니 저 빌어먹을 놈의 꼬리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군.'
해원향의 품속으로 파고들어야 했다.
상원은 꿀꺽 침을 삼키고 해원향을 올려다보았다.
전신이 거의 푸른 비늘로 뒤덮인 채 꼬리를 휘두르는 거구의 괴물, 상원은 그 품을 향해 뛰어들어야 했다.
수십 번 머릿속으로 그려 본 광경이었지만 막상 보니 오금이 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방법은 그것뿐이니까.
"후우."
한숨을 내뱉은 상원이 바위에 박힌 검을 두 손에 움켜쥐고 자세를 잡았다.
희미하게 흔들리던 검기의 모양이 다시 제대로 잡혔다.
상원은 스킬을 펼쳤다.
[스킬 '결투장'을 사용합니다.]
[상대: 흑천교주 해원향.]
화면을 지켜보는 모든 이의 시선 덕에 다리는 나는 듯 가뿐해졌고 팔은 산이라도 된 것처럼 단단해졌다.
"하아아아앗!"
기합을 지르며 상원은 그대로 해원향을 향해 달려들었다.
- 와라!
꼬리와 안개 발톱 때문에, 해원향은 덩치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빈틈이 없었다.
하지만 상원의 눈에는 빈틈이 보였다.
그게 일흔다섯 개의 시험을 버텨낸 검사의 눈이었다.
발톱과 꼬리를 피해 해원향의 다리 사이로 뛰어든 상원이 그녀의 다리를 베었다.
그러자 쨍하는 쇳소리와 함께 비늘과 검기가 부딪힌 곳에서 새빨간 불똥이 튀었다.
웬만한 마물도 일격에 보낼 법한 공격이었지만, 그녀의 비늘엔 고작 작은 생채기가 나 있을 뿐이었다.
- 간지럽지도 않구나!
살짝 굴러 해원향의 꼬리를 피한 상원이 연속으로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연속되는 쇳소리와 함께 불똥이 튀었다.
해원향의 비웃음이 들렸다.
- 호기롭게 말하더니만, 이게 고작이냐 불신자!
해원향의 발길질을 피해 물러난 상원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거 아나 해원향? 너는 안개 발톱을 뽑았으면 안 됐어."
- 뭐?
그제야 해원향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 같았다.
해원향이 몸을 감싼 벽무공을 해제하고 안개 발톱을 뽑도록 유도한 것도 상원의 작전이었다.
그래야 박피 단검을 그녀의 몸에 꽂아 넣을 수 있으니까.
"발밑에 신경을 쓰느라 꼬리에 박힌 그건 신경 쓰지 못했구나. 역시 교주님이라 그런지 전투 센스는 영 꽝이군."
해원향이 고개를 돌려 꼬리를 보았다.
인간의 것이 아닌 신체 부위가 시작되는 곳, 엉덩이와 꼬리가 이어진 그곳에 박피 단검이 우뚝 박혀 있었다.
해원향의 목소리가 떨렸다.
- 이... 이건.
그때였다.
박피 단검으로부터 새빨간 혈관이 해원향의 몸을 따라 덩굴처럼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녀의 덩치가 커지면서 새빨간 등마루가 솟아올랐다.
해원향은 점점 인간의 모습으로부터 멀어져 영화에나 나올 법한 괴수의 모습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해원향이 비명을 질렀다.
- 아... 안 돼!
상원이 해원향을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받아들여라 해원향. 인간 해원향은 여기서 끝이다."
- 아... 아니야, 아니야. 아직은....
그녀는 바닥에 웅크려 변이에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녀의 볼을 따라 눈물이 흘렀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침이 씁쓸했다.
흑천교주 해원향, 그녀라고 해서 마선이 되는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였겠는가.
그것도 인간의 껍질을 벗고 괴물이 되는 운명을.
그것이 아무리 흑천의 뜻이라고 해도 슬픈 건 슬픈 것이다.
"크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그녀가 등에 박힌 박피 단검을 뽑아냈다.
박피 단검이 박힌 시뻘건 살점이 상원의 코앞에 툭 떨어졌다.
상원은 무심한 손으로 그 살점을 헤집어 박피 단검을 뽑아냈다.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박피 단검이 뽑혀 나왔다.
상원이 단검에 묻은 살점을 털어내며 말했다.
“받아들여라 해원향.”
- 안돼!
그때 상원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웅크려 있던 해원향이 몸을 펴고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경기장의 바깥이었다.
"이런."
상원도 해골마를 불러내 그녀를 뒤쫓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