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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144화 (144/230)

제144화. 생명나무 제전 (6)

군나르는 믿을 수가 없었다.

창에 꿰뚫린 어깨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구치는 현실이 그저 꿈만 같았다.

'도대체, 도대체 왜?'

혼신의 일격을 날린 지 몇 초 지나지도 않았는데,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이 그놈이 아닌 자신이란 말인가.

놈이 말했다.

"너가 아픈 것의 곱절에 수배로, 샤믹은 고통스러웠을 거야. 네 망치에 팔이 부서지고, 갈비뼈가 바스라지고, 내장이 쥐어짜였지."

군나르는 눈을 크게 뜨고서, 다가오는 놈을 바라보며 자세를 다잡으려고 애썼다.

'뭐라도 해야 한다. 이러다가는, 정말, 죽는다.'

그러나 고통이 모든 것을 앗아가는 것만 같았다.

시야가 희미했다.

주먹을 쥐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가 않았다.

망치, 망치, 망치가 어디 있더라.

무릎이 꺾였다.

군나르가 하염없이 망치를 찾는 와중에도 놈은 점점 다가왔다.

말발굽 소리 사이로 계속해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기가 서려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네 얼굴에 대고 웃었어. 그런데 지금 넌 뭔가. 고작, 어깨를 찔린 것만으로...."

다각, 다각하던 말발굽 소리가 멈췄다.

놈의 말이 무릎을 꿇은 군나르 앞에 멈추어 섰다.

피식, 하는 조상원의 비웃음이 군나르의 귀에 꽂혔다.

"이토록, 벌레 같구나."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군나르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샤믹이라는 전사와 겨루어 본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적어도 그녀는 너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이니까."

이제, 죽을 것이다.

군나르는 확신했다.

'놈이 나를 죽일 것이다.'

아까의 그 일격처럼, 허무하고도 우아하게 검을 휘두를 테다.

군나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군나르는 실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군나르는 비틀거리며 뒤를 돌았다.

놈은 그를 지나쳐 이미 저 멀리 황제를 향하여 말을 달리고 있었다.

발갛게 해가 지고 있는 하늘 아래 조상원과 황제가 서로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를 밟아버리겠다고 생각했건만, 사실 조상원에게 저는 죽일 가치도 없는 잔챙이였다는 사실을 군나르는 뒤늦게 이해했다.

처음부터 그가 싸우고자 했던 것은 황제뿐이며, 군나르 자신은 그저 제 복속을 성장시키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었다.

시야가 온통 빨간 것이 석양 때문인지 아니면 핏방울이 홍채를 덮어서인지, 그마저도 아니면 수치와 부끄러움 탓인지 알 수 없었다.

* * *

해원향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방 가운데 커다란 연못에 조상원의 모습이 비쳤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생명나무 꼭대기의 어두운 방 안에는 그녀의 품에 가득 찰 만큼 커다란 유리 구슬들이 천장부터 이어진 실에 매달려 있었다.

구슬 안에는 금색 반딧불 같은 빛 덩어리들이 떠다녔다.

그게 바로 흑천의 말씀을 담아둔 예언 구슬들이었다.

해원향은 구슬들을 해치고 나아갔다.

그 구슬들 가운데 유독 커다란 구슬이 있었다.

흑천께서 유독 힘주어 말씀하셨던 예언이었다.

해원향은 구슬의 표면에 손을 대보았다.

빛 덩어리들이 사람의 손길에 놀란 벌레떼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며 글자를 만들었다.

그녀는 글자를 읽었다.

"그는 묵과 같은 옷에 눈과 같은 머리칼을 하였으니, 생명나무의 제전에서 껍질이 벗겨져 죽음을 맞으리라."

해원향이 뒤로 돌아 손짓하자 앞에 있던 구슬들이 홍해처럼 갈라졌다.

그 사이로 걸어 나온 해원향이 호수의 표면을 내려다보았다.

묵과 같은 옷을 입고 눈과 같은 머리칼을 한 자, 불신자가 말을 달리고 있었다.

이 예언은 필시, 여기서 저놈이 죽는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누가 저놈을 죽일 수 있는가?

저 벌레 같은 수험자?

저 겁쟁이 황제?

아니다.

천지에 오로지 하나, 해원향 뿐이었다.

해원향이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천둥벌거숭이 같으니. 네놈이 천지 분간 없이 날뛰는 것도 이제 끝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뛰어들어 놈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바로 겁쟁이 황제가 쳐놓은 결계가 그녀가 경기장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는 것이었다.

해원향이 호수에 손을 대자 새까만 불꽃이 그녀의 손을 튕겨냈다.

"흥, 돼지 같은 놈이 겁만 많아서는."

억지로 결계를 뚫을 생각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결계를 뚫는답시고 기를 잘못 움직였다가는, 등선이 코앞에 다다른 그녀가 허락되지 않은 때에 등선을 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아직 등선을 할 때가 아니었으니까.

흑천께서 등선을 미루라고 말씀하셨으니까.

해원향은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흑천께서, 생명나무 제전에서 불신자를 죽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필시 방법은 있을 것이다.

흑천께서는 항상 앞일을 예비하시니까.

해원향은 겨울잠에 든 뱀처럼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것이 그녀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 * *

상원은 말을 달렸다.

군나르를 죽일까도 생각했지만, 이미 전투 불능이 된 데다 어딘가 쓸 일이 있을지도 몰랐다.

지금 중요한 것은 황제였다.

똑바로 이어진 길 끝에 하상효가 빙긋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까만 곤룡포가 그의 거대한 육체를 덮고 바닥에 흘러넘쳤다.

"오셨구만."

끌끌, 하고 그가 웃을 때마다 두툼한 턱살이 흔들렸다.

상원이 외쳤다.

"대장전을 잘할 준비는 됐습니까 폐하?"

"물론이다!"

황제의 외침이 쩌렁쩌렁한 메아리를 만들었다.

그의 손에서 새까만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황제 하상효의 전매특허, 마공 옥염(獄炎)이었다.

시꺼먼 불길의 열기가 상원이 있는 곳까지 전해져왔다.

"박피 단검을 내놓아라!"

하상효가 팔을 휘두르자 손에 맺혀있던 새까만 불꽃이 화염구가 되어 상원을 향해 쇄도했다.

전생에서 수험자 수십을 그대로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던 무시무시한 무공이었다.

하지만 상원은 기세를 줄이지 않았다.

어차피 저 무공도 '불신자'를 개성으로 가진 상원에게는 통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새까만 불덩이가 상원에게 작렬했고 거대한 폭발이 후끈한 열기와 함께 상원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 뭣? 뭐냐?"

"나를 상대했던 놈들, 모두들 그런 표정을 짓더이다. 어떻게 이 스킬을 맞고도 멀쩡할 수가 있는지."

상원이 뽑아 든 '바위에 박힌 검'에 새하얀 검기가 맺혔다.

"나는 불신자요. 당신의 무공도 믿지 않소."

"뭐라는 거냐?"

분노한 황제가 팔을 휘두르자 불덩이 두 개가 연달아 날아왔다.

이번에도 역시나, 상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불덩이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리고 이번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몸은 스킬을 쓸 수 있지."

상원에게는 일대일 상황에 특화된 스킬이 있었다.

바로 스킬 '결투장'이었다.

[스킬 '결투장'을 사용합니다.]

[결투 상대: 황제 하상효]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초록색 반투명한 장막이 상원을 중심으로 뻗어 나가 황제를 집어삼켰다.

[수많은 구경꾼들이 결투를 지켜본다는 사실이 당신에게 힘을 줍니다.]

'결투장'은 구경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시전자가 버프를 받는 스킬이었다.

생명나무 제전을 지켜보는 그 수많은 수험자 모두가 결투의 구경꾼이었다.

그 덕에 상원은 놀라울 정도의 버프를 받고 있었다.

해골마가 달리는 속도가 빨라지며, 순식간에 하상효의 커다란 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신화의 몸이 가진 폭발적인 힘이 검을 뽑아 든 오른손에 실렸다.

달리던 기세를 그대로 몰아, 상원은 황제를 향해 새하얀 마검을 그었다.

쨍!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황제가 옥염이 담긴 손바닥으로 마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상원은 해골마 소환을 해제하고 황제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급소를 향해 마검을 휘둘렀다.

황제는 육중한 몸으로 상원의 검격을 버텨냈다.

황제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말했다.

"네놈,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화경에 다다랐다고 자랑하던 놈들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황제가 합장을 했다가 손바닥을 떼자, 손바닥 사이에서 새까만 불길이 칼의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황제의 비기이자 보검인 옥염도(獄炎刀)였다.

"짐도 최선을 다하겠다."

저걸 뽑아 들었다는 건 황제가 주변이 어떻게 되던 말던 관계없이 진심으로 상원을 죽여버릴 마음을 먹었다는 얘기였다.

"죽어라."

곰과 같은 황제의 거구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상원을 향해 쇄도해왔다.

상원이 마검을 들어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옥염도를 막아냈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두 팔이 저릿했다.

'정말 강하기는 더럽게 강하군.'

"흐흐. 이대로 가루가 돼라."

하상효가 옥염도를 내리눌렀다.

스킬이 문제가 아니었다.

신화의 몸으로도 버티기 어려울 정도의 압도적인 물리력이었다.

무시무시한 압력에 상원의 두 발이 지면에 박혔다.

그때 상원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석양에 물든 새빨간 하늘 가운데 금이 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 바로 이게 상원이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상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이게 다요, 황제? 고작 이 정도로 흑천 교주를 어떻게 해볼 마음을 먹은 건가?"

"고얀!"

하상효가 노호성을 지르며 옥염도에 힘을 주었다.

그래, 그럴수록 황제가 경기장에 쳐놓은 결계는 약해지는 것이다.

해원향을 피하려고 쳐둔 그 결계가.

상원이 옥염도를 튕겨내며 외쳤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군!"

"닥쳐라! 이놈이 무엄하게!"

하상효가 기관차처럼 콧김을 내뿜으며 옥염도를 미친 듯 휘둘렀다.

맞으면 바로 고깃덩어리가 돼버릴 검격을 상원은 간발의 차로 요리조리 피했다.

그렇게 하상효가 힘을 쏟으면 쏟을수록 결계가 약해지고 있었다.

하늘에 간 금이 더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순간, 우저적 하는 굉음이 경기장에 가득 울렸다.

하상효가 하늘을 보며 넋 나간 소리를 냈다.

"어... 어?"

새빨간 하늘이, 대량의 물과 함께 마치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쏟아졌다.

잠깐 하늘에 무지개가 떴다.

그렇게 하늘이 깨진 자리로 낯선 풍경이 보였다.

굵은 나뭇가지들이 구불구불 엉켜 동굴과 같은 천장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샛노란 빛을 담은 커다란 구슬들이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빛을 받은 나뭇가지들이 창백한 노란색으로 보였다.

그건 경기장 바로 위로 펼쳐진 커다란 방, 해원향이 호수를 통해 경기장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 방이었다.

그 방으로부터, 이 땅을 향해 천천히 내려오는 이가 있었다.

새까만 뱀 비늘 도포를 걸친 여인, 해원향이었다.

별과 같은 구슬들을 배경으로 내려오는 모습이 어찌가 장엄한지, 마치 세상의 종말을 고하러 강림하는 천사처럼 보였다.

황제가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해... 해원향...."

수많은 무림의 초절정 고수들을 너무도 손쉽게 도살해버렸던 저 괴물을, 황제라고 하여 두려워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해원향이 하상효를 향해 살짝 웃어 보였다.

"제 꼴이 그리도 보기 싫으셨습니까 폐하. 제가 보기 싫어 결계까지 쳐두시고 그 안에 숨으시다니, 소녀 섭섭하옵니다."

그 차가운 말에 공기마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아니, 황제 당신은 그러고 있으면 안 되지.

"하상효, 내가 말했었지. 칼을 들고 해원향의 앞에 설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고."

상원이 박피 단검을 꺼내 하상효를 향해 던졌다.

"간단해. 그건 해원향이 칼을 든 당신을 찾아오게 하면 되는 거야."

쉬이익 하는 뱀 소리를 내며 날아간 단검이 하상효의 미간 앞에서 멈췄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황제는 잠깐 박피 단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끄, 하하! 하하하하!"

하상효가 우렁우렁한 웃음소리와 함께 박피 단검을 쥐자, 칼날로부터 용이 불을 내뿜듯 새까만 불길이 치솟았다.

"그래, 그래. 좋아."

황제가 단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저 뱀 년을 이제 죽일 때가 됐군.”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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