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생명나무 제전 (1)
웅크려 꿈틀거리는 샤믹의 입가로 침이 주륵 흘렀다.
수백 마리 뱀들이 몸속을 마구 돌아다니며 몸을 찢어발기는 것 같았다.
현실이 아득히 멀어져갔다.
그때 수호신 ’가라앉은 거인’의 천둥같은 음성이 들렸다.
- 정신 차려! 이대로 있다간 죽어!
고통에 몸부림치는 와중에도, 그 목소리를 듣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 안위 같은 것엔 도대체도 관심이 없을 것 같더니, 그래도 정은 있나 보구나.'
코에서 끈적한 피가 흘러내렸다.
샤믹은 정신을 집중하고, 몸속에서 제멋대로 끓어오르는 낯선 마력에 저항했다.
그러자 점점 사지에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몸이 조금 가벼워진 그 찰나를 틈타 샤믹은 뻣뻣해진 사지를 겨우 움직여 가부좌를 틀었다.
이제는 이 낯선 마력에 맞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샤믹이 전신의 근육에 마력을 불어 넣자 연한 살이 단단한 바윗돌로 변하기 시작했다.
으드득 이를 갈자 돌이 마찰되는 소리가 났고, 숨결에서는 뿌연 흙먼지가 뿜어져 나왔다.
해원향이 놀라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호오.”
샤믹은 시퍼런 뱀들이 샤믹의 몸속을 돌아다니며 그녀의 몸을 갉아 먹는 환상을 보았다.
그런데 샤믹이 몸을 석화시키자, 뱀들은 나아갈 곳을 찾지 못하고 주춤주춤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래, 이대로면 이겨낼 수 있다.’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듯, 샤믹은 단전에서부터 마력을 뽑아 올리기 시작했다.
‘가라앉은 거인’의 마력이 밀물처럼 그녀에게 밀려 들어왔다.
대량의 마력이 몸을 순환할 때마다 그녀의 몸은 더욱 단단해졌다.
‘이제 곧, 이 뱀들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어!’
그때 으저적하고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뱃속에 들어간 새까만 돌이 깨지면 돌로부터 뱀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통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샤믹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아… 아아!”
아무리 저항해도 소용없었다.
부서져도 끝없이 몰려오는 파도처럼, 시퍼런 뱀들이 그녀의 몸을 조금씩 부수고 있었다.
고통이 엄습한 탓에 몸이 저절로 오그라들며, 샤믹은 다시 웅크린 자세로 돌아갔다.
의식이 점점 멀어져갔다.
‘이렇게 탈락하는 것인가?’
눈앞에 대장의 모습이 보였다.
‘꼭 끝까지 함께 가고 싶었는데.’
그때였다.
누군가 그녀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지독한 고통을 잊어버릴 만큼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이었다.
온화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야, 맞서지 마라.”
따스한 손길이 샤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흐르는 힘에 몸을 맡겨라.”
‘이 독사 떼에 몸을 맡기라고? 그래도 되는 건가?’
보나 마나 독사 떼에 찢어 발겨져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리겠지.
하지만 어쩐지, 시키는 대로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아, 모르겠다.’
웅크려 엎드린 채로, 샤믹은 전신의 긴장을 풀었다.
시퍼런 독사들이 거칠 것이 없이 샤믹의 몸을 헤집기 시작했다.
‘이대로 독사 밥이 돼버리겠구나.’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샤믹은 알 수 있었다.
샤믹의 몸속을 돌아다니는 건 독사가 아니었다.
새파란 마력은 사나운 독사가 아니라 부드러운 물결처럼 그녀의 몸속을 흐르고 있었다.
단단한 바윗돌의 틈새 사이로 새파란 마력이 차올랐다.
몸속에 상쾌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눈을 뜬 샤믹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타이즈가 감청색 비늘에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단단한 비늘 위로 미끈한 광택이 흘렀다.
아니, 타이즈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새까만 두 손등 위에도 시퍼런 비늘이 돋아나고 있었다.
“이게… 무슨…?”
해원향의 커다란 손이 샤믹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곱다. 아주 고와. 이런 고운 빛깔은 아주 오랜만이구나.”
아이를 안아 올리는 엄마처럼, 해원향이 샤믹의 겨드랑이를 받쳐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해원향의 눈매는 살날의 끝을 바라보는 노인 같기도, 새로운 설렘을 기다리는 소녀 같기도 했다.
해원향이 샤믹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이제 가라 아이야. 너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구나.”
‘아차, 정오에 황실 정문.’
잊고 있던 약속이 퍼뜩 생각이 나 샤믹은 뒤로 돌아왔던 길을 되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샤믹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이 아주 오랜 옛날 일처럼 느껴져서였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방금 전까지 그녀가 엎드려 있던 자리엔 따사로운 햇살만이 내리쬐고 있을 뿐이었다.
타이즈는 여전히 회색이었고, 손바닥도 검은색 그대로였다.
‘꿈을 꾼 건가?’
갸우뚱 고개를 흔든 샤믹은 바삐 걸음을 재촉했다.
해는 벌써 중천에 떠 있었다.
* * *
황성의 정문으로 수많은 수험자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여기 모인 수험자들은 각 길드와 성역에서 차출된 내로라는 정예들이었다.
상원은 인파 속에서 다른 수험자들의 모습을 관찰했다.
황성에 모인 수험자의 대부분이, 전생에도 제전에 참여했던 이들이었다.
수험자들 중 눈에 띄는 자들이 있었다.
'천둥 망치'와 '외팔 검객'을 비롯한 '발할라'의 길드원들.
동물 모양 투구를 쓴 '금자탑'의 길드원들.
'바빌론'의 스칼렛, 카렌과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문혁과 진아를 만난 건 그즈음이었다.
다른 수험자들을 훑어보던 상원을 그들이 먼저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어, 어서 오세요 상원 씨."
"일은 잘 보셨습니까?"
"네."
문혁의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하면서 상원은 두 수험자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둘 사이의 거리가 미묘하게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상원은 직감했다.
'이 둘과 나머지 셋이 따로 움직였군. 그 부부 작품이구나.'
혜경과 창훈을 생각하며 상원은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은 태도도 달라져 있었다.
진아는 평소보다 좀 더 나긋나긋했고, 문혁은 문혁대로 친절했다.
그때, 주변의 수험자들이 술렁였다.
"올림포스다. 봐, 올림포스야."
"'시공간의 세습자'다. 완전 멋있어...!"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일군의 무리가 수험자들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바로 발할라의 라이벌인 길드 '올림포스'였다.
그 중심에 있는 하얀 양복 차림의 남자가 바로 올림포스의 길드장, '시공간의 세습자'였다.
상원은 조용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공간의 세습자는 끝없는 힘과 지력, 그리고 천둥망치와 비교되는 기품과 수려한 외모 덕에 수많은 팬들을 몰고 다녔다.
'전생에도 그러더니, 지금도 마찬가지군.'
그때 누군가 우렁우렁한 소리를 질렀다.
"어이, 오랜만이오 병아리 양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수험자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 중 그 누가 시공간의 세습자를 '병아리'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럴 만한 사람은 단둘 뿐이었다.
한 명은 상원.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발할라의 길드장 천둥망치였다.
'시공간의 계승자'가 날카로운 눈으로 천둥망치를 쏘아보며 말했다.
"말 한마디도 못 하는 유인원처럼 생겨서는 혓바닥이 길어."
천둥망치와 시공간의 계승자, 랭킹 1위와 2위의 눈빛이 부딪치자 불꽃이 튀는 듯했다.
먼저 물러난 쪽은 시공간의 세습자였다.
"가자."
시공간의 세습자가 고개를 돌리고 씹어뱉듯 말하자, 올림포스의 수험자들이 그를 따라 우루루 사라졌다.
그토록 자존심이 강한 자가 자기 자존심을 꺾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왜냐하면 랭킹 1위와 2위라고는 하지만 그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격차가 있다는 걸 시공간의 세습자 본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원은 물러서는 시공간의 세습자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저런 걸 더러 자강두천이라고 하던가.'
랭킹 1위와 2위 모두 보통 수험자와는 존재의 지평을 달리하는 괴물들이었지만 상원의 고려 대상에 들어있지조차도 않았다.
앞으로 상원이 상대할 황제 하상효와 흑천교주 해원향에 비하면 저들은 하룻강아지에 불과하니까.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그때 익숙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타르마냥 새까맣고 끈적끈적하고 악취가 나는, 다름 아닌 '검은 숲의 목자'의 마력이었다.
마력은 사람의 눈이 잘 닿지 않는 황성 근처의 숲속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눈치 빠른 진아가 말했다.
"상원 씨도 느꼈죠?"
상원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서 걷기 시작하자, 문혁과 진아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마력을 따라 숲속을 걸어 들어가니 나무 그늘 아래 낯익은 두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창훈과 혜경이었다.
"엄마가... 엄마가 꼭 구해줄게."
넋나간 얼굴로 중얼거리는 혜경의 입가에 침이 허옇게 말라붙어 있었다.
창훈은 혜경의 날갯죽지에 두 손을 대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상의를 벗어 드러난 한창훈의 메마른 몸에서 땀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묵영도의 기운을 가라앉히는 중이란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언니!"
상원이 소리를 지르며 뛰려는 진아를 말렸다.
"지금 잘못 건드리면 혜경 씨는 주화입마에 빠져 폐인이 됩니다."
상원의 말에 진아가 침통한 얼굴로 물러섰다.
상원은 혜경이 묵영도를 익히는 과정에서 끝없는 광기에 사로잡힐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묵영도를 익히라고 한 건 묵영도가 있어야만 송헤경이 마리야를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상원은 부부가 힘을 합치면 폭주하는 마력을 가라앉힐 수 있을 거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가만히 서서 부부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숲 저쪽에서 훈풍이 불어 왔다.
이윽고 혜경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혜경의 눈빛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창훈이 뒤로 벌러덩 드러누우며 말했다.
"으아아악, 너무너무 힘들었다."
흔들리던 혜경의 눈이 상원을 향해 또렷하게 고정됐다.
"어머, 오셨네요. 진아랑 문혁 씨도 왔네요?"
상원이 혜경을 향해 손을 내밀자, 혜경이 상원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묵영도의 마력에 상원이 손이 저릿할 정도였다.
상원이 말했다.
"비급서점에서 여기까지 오시는 것도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혜경이 머리칼을 쥐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분명히 서점에서 나올 때는 상태가 괜찮았는데... 황성 앞에 오니까 갑자기 머리가 너무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급한 대로 숲으로 들어왔죠."
창훈이 헐떡이며 물었다.
"이거... 앞으로 이런 일이 종종 있는 건가요?"
그 말에 상원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묵영도의 기를 두 번에 걸쳐 눌러 놨으니, 당분간은 이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말에 부부가 나란히 상원의 얼굴을 보았다.
창훈이 물었다.
"당분간은... 이면, 언젠간 또 이럴 거란 거잖아요."
"없다고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당분간은 혜경이 폭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묵영도까지 소화한 혜경을 폭주시키는 건, 적어도 4대 길드의 마스터 급은 데려와야 가능한 일일 테니까.
'그나저나 샤믹이 보이지 않네. 어디에 있는 거지?'
진아와 문혁도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샤믹이 보이지 않네요."
"정문에 도착했더라도 우리가 여기 있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겁니다."
옳은 말이었다.
"네, 다들 정문으로 가시죠."
상원은 일행들을 데리고 숲을 빠져나갔다.
과연, 저 멀리서 샤믹이 헉헉대고 달려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