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138화 (138/230)

제138화. 만공당 (5)

단국호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래, 그래. 자네는 뭐가 필요한가?"

혜경이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씩씩했다.

"묵영도를 배울래요."

혜경의 말에 단국호의 표정이 굳었다.

"뭐라고 했나?"

"묵영도를 배우겠다고요."

단국호가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오늘은 이상한 날이군. 대악사청봉을 가볍게 깨부수는 자가 나타나더니, 묵영도를 찾는 사람이라니."

단국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네, 묵영도가 도대체 뭐 하는 무공인지는 알고 있나?"

그 말에 혜경이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몰라요."

"뭐?"

"모른다구요."

단국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혜경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런데 묵영도를 배우겠다고? 뭔지도 모르는걸?"

혜경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단국호가 혜경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눈 쌓인 소나무 같은 하얀 눈썹 아래 그의 눈빛이 호랑이마냥 형형했다.

"자네, 진심이군."

단국호가 한숨을 쉬었다.

혜경이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영감님, 빨리 비급서 주세요."

그 말에 단국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묵영도는 비급서가 없어."

"네?"

"묵영도는 전대 흑천교주 구두망이 개발한 마공이야. 당연히 무림맹엔 그런 비급서가 있을 리 없지."

'그럴 리가?'

샤믹이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비급서점에서 묵영도를 배우라고, 대장은 혜경에게 분명히 그렇게 지시했다.

그런데 대장의 지시가 틀렸다고?

혜경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아니, 그... 그게 정말이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상원 씨가 틀림 없이...."

"잠깐만."

단국호가 한숨을 쉬며 품에서 부적을 꺼냈다.

"비급서는 없지만 기억은 있지."

단국호가 부적 한 장을 집더니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부적 위에 그 피로 묵영도(墨影刀)라는 글씨를 휘갈겨 썼다.

혜경이 물었다.

"이게... 묵영도의 기억이 담긴 부적인가요?"

단국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얼마죠? 2만 코인? 3만? 얼마든지 불러봐요. 코인은 충분하니까."

"아니."

단국호가 씩씩대며 다가서는 혜경에게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건 공짜야."

"네?"

"자네 같으면 사람 죽이는 독을 돈을 받고 팔 수 있겠어?"

그 말에 혜경의 안색이 변했다.

"사람을 죽이는... 독이요?"

"그래."

단국호가 한숨을 쉬었다.

"묵영도에 도전했던 자들은 하나같이 미쳐서 죽었어. 그걸 익히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하나, 구두망 뿐이야. 그 구두망도 결국은 이 무공을 버렸지. 그만큼 위험하니까."

샤믹은 두 귀를 의심했다.

익힌 사람이 미쳐서 죽는 마공이라고?

그리고, 대장이 그걸 혜경에게 배우라고 했다고?

듣고 있던 창훈이 외쳤다.

"여... 여보, 이거 뭔가 위험한데...."

혜경이 창훈의 말을 잘랐다.

"하겠어요."

혜경의 표정이 살벌했다.

"그 정도는 견뎌야... 방금 그 년을 이길 수 있는 거잖아."

혜경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샤믹이 한숨을 쉬었다.

"후우."

그래, 그렇다.

대장이 짠 작전대로라면, 혜경은 생명나무 제전에서 외팔 검객을 상대해야 한다.

그 무시무시한 여자를 상대하려면 마공이든 뭐든 익혀야 했다.

창훈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그래. 상원 씨가... 우리가 견디지 못할 걸 시켰을 리가 없지."

창훈이 혜경의 옆에 서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하자, 여보."

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국호가 결연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부부를 번갈아 쳐다보고는 말했다.

"그래. 묵영도는 익히는 건 부인만의 일이 아닐세. 남편도 끝까지 도와주어야 해."

단국호의 말에 창훈이 대답했다.

"도와주는 게 아닙니다. 이건 제 일이기도 하니까요."

"좋아."

단국호가 샤믹에게 말했다.

"자네는 어서 여기를 떠나게. 여기 있다간 자네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어."

저 둘을 남겨두고, 여기를 떠나라고?

"아니, 하지만...."

망설이는 샤믹에게 혜경이 웃어 보이며 말했다.

"가요 샤믹."

창훈이 너스레를 떨며 덧붙였다.

"정오에 황성 정문이에요. 늦지 말아요."

"네... 네."

샤믹은 돌아서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발걸음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단국호가 혜경의 이마에 부적을 붙이고 있었다.

두 눈이 새까맣게 물든 혜경이 짐승 같은 소리를 질렀다.

"끄아아아아악!"

"남편! 부인의 기를 눌러! 너무 솟아도 너무 가라앉아도 안 돼! 잘못하면 부인은 그대로 죽어!"

"네... 네!"

창훈이 혜경의 날갯죽지에 손을 대고 오만상을 썼다.

단국호가 샤믹에게 일갈했다.

"어서 가! 자네가 가는 게 이들을 도와주는 일이야!"

샤믹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앞으로 내달렸다.

혜경이 지르는 비명이 멀어져갔다.

연무장을 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 주변의 풍경이 비좁은 서점으로 바뀌었다.

천둥망치의 짓인지, 서점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비틀거리며, 샤믹은 서점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했다.

어느새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수도의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괜찮을까, 괜찮을까?'

샤믹은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하늘 위로는 높다란 생명의 나무가 잎사귀를 흩뿌리고 있었다.

* * *

얼마 뒤, 수도의 외곽.

생명의 나무의 거대한 뿌리 위에 누워, 해원향은 치밀어오는 아침 햇살을 쬐고 있었다.

지난번 계시 이후 두문불출하던 차, 실로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나신을 드러내고 햇살을 쬐는 이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해원향은 천천히 자기 몸을 살펴보았다.

우유처럼 뽀얀 피부 여기저기 시퍼런 뱀 비늘이 돋아 있었다.

굵직한 왼쪽 허벅지는 통째로 뱀 비늘에 덮여 있었다.

그녀는 직감했다.

'등선이 임박했다.'

흑천께서 끝을 말씀하셨다.

그 끝의 순간에, 그녀는 인간의 껍질을 벗고 마선이 되어 하늘에 오를 것이다.

계시의 순간이 오기까지, 그녀는 모든 힘을 다해 등선을 참고 또 참았다.

등선을 참는 건 몹시 괴로운 일이었다.

등선을 한다면 그 괴로움도 끝이 나겠지.

'아니, 그런 걸까?'

일백 하고도 오십 년을, 오로지 존귀하신 흑천의 종으로서 살아왔다.

그 세월 동안 그녀는 흑천교의 일으키고 무림맹을 뿌리 뽑았으며 황실을 복속시키고 마침내, 저 거대한 제국을 그녀의 발아래 두었다.

그 모든 것이 오로지 흑천의 뜻이었다.

그중 그녀의 뜻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아니, 뜻을 가져본 적은 있던가?'

그녀의 최후 또한 그녀의 뜻은 아니었다.

대국의 황제 하상효가 오로지 그녀를 죽이기 위한 일념으로 힘을 모으고 있다는 걸,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묵인했다.

그것 또한 흑천의 뜻이었으니까.

문득 그녀는 슬퍼졌다.

일백오십 년 동안 좀처럼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해원향은 허리를 세워 햇살 아래 빛나는 수도를 내려다보았다.

생명의 나무라는 괴물을 옆에 두고도 삶의 활력을 잃지 않는 그곳을.

마교를 숭배하면서도, 폭군을 섬기면서도, 그곳의 사람들은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과연 지금, 살아가고는 있는 것인가.

'갑자기 이 무슨 불경한 생각을....'

평소 같았으면 엎드려 기도를 했을 텐데,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해원향은 무릎을 감싸고 웅크려 긴 꼬리로 몸을 둘렀다가, 고개를 들어 수도를 내려다보았다.

'하늘에 오르면, 이 번뇌가 사라질까.'

그때 그녀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한 여자가 그녀가 있는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중원인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는데, 피부가 까무잡잡했기 때문이었다.

"나무의 자식인가."

하기사, 중원인이라면 해원향을 마주칠지도 모르는 이곳까지 오지는 않을 것이다.

잠시 여자를 살펴보던 해원향은 특이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야... 저 기의 흐름은?'

흰머리 남자를 비롯해 수많은 나무의 자식들을 보았지만 저런 기의 흐름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단전에는 그녀의 몸을 부숴버릴 만큼 강렬한 기 덩어리가 뭉쳐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멀쩡한 건, 그보다 훨씬 강한 또 다른 기의 흐름이 단전의 기를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형국도 형국이었거니와 그녀가 진정으로 놀란 건 그 기의 양이었다.

특히 전신을 흐르는 기의 양은 그녀가 어디서도 보지 못한 수준이었다.

문득, 그녀의 생각이 닿은 물건이 있었다.

얼마 전 등선을 앞두고 뱉어냈던 그 내단이었다.

'아아, 저 아이라면... 어쩌면.'

해원향은 도포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내단을 꺼내 보았다.

겨우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그 검은 돌조각 속에, 무시무시한 양의 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구두망도 하상효도 소화하지 못할 만큼의 기였다.

하지만, 어쩌면 저 아이라면.

해원향은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쾌청했다.

지금껏 흑천의 뜻대로 살았다.

'이 정도 일탈은 봐주시지 않을까.'

하늘을 향해 살짝 웃어 보인 해원향이 도포를 챙겨 입고 나무뿌리에서 뛰어내렸다.

저 멀리서, 그 아이가 해원향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 *

"여기는...."

한참을 정처 없이 걷던 샤믹은 문득 자신이 인적 없는 곳에 와 있는 걸 발견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웬만한 건물보다 거대한 나무뿌리가 성벽처럼 서 있었다.

생명의 나무의 뿌리였다.

'너무 멀리 왔다.'

해는 점점 높이 떠오르고 있었다.

정오까지 황성 정문에 도착하려면 이제 돌아가야 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고운 목소리였다.

"얘야, 이리 와보지 않으렴?"

저 멀리서 누군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기며 샤믹은 생각했다.

'이거...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 같은데?'

길 저편에 그녀를 부르는 형체가 보였다.

조금 더 다가가니 그녀의 모습이 또렷해졌다.

새까만 도포 차림의 청초한 미녀였다.

저토록 아름다운 사람을 본 적이 있던가?

아, 본 적이 있었다.

샤믹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해원향!"

흑천교주 해원향, 이 중원의 정점에 서 있는 자.

저자를 여기서 만날 줄이야.

그녀의 직감이, 도망쳐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겁내지 마렴, 아이야. 이리 와보지 않겠니?"

목소리가 발을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터덜터덜, 샤믹은 해원향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샤믹은 해원향이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거구라는 걸 알았다.

해원향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너 참... 좋은 기를 가지고 있구나?"

해원향이 긴 꼬리로 샤믹의 뺨을 쓰다듬었다.

'꼬리? 꼬리가 있다고?'

샤믹이 주춤 물러서려는데, 그녀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아이야, 너에게 줄 게 있단다."

해원향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새까만 돌덩이가 꼭 알사탕 같았다.

"이걸 한 번 먹어보지 않으련?"

그녀의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그걸 절대 먹으면 안 된다고.

하지만 샤믹은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은 돌을 받아 꿀꺽 삼켰다.

돌을 삼킨 샤믹이 해원향을 올려다보았다.

그때였다.

"크... 으으윽!"

미칠 듯한 통증이 온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태어난 이후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지독한 통증이었다.

해원향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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