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만공당 (4)
강렬한 뇌전을 두른 주먹이 샤믹의 온몸을 두들겼다.
찌릿거리는 고통에 샤믹은 저절로 몸을 웅크렸다.
"큭!"
호기롭게 상대를 도발한 샤믹이었지만, 처음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얻어맞기만 했다.
하지만 맞다 보니 점점 고통에 익숙해졌다.
'뭐야 이거? 별거 아니잖아?'
샤믹은 몸을 펴고 허수아비들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몸에 꽂히는 주먹이 전처럼 아프지 않았다.
'이제 내 차례야!'
그녀가 주먹을 움켜쥐자 빠드득하고 돌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돌가루가 흩날렸다.
샤믹이 바로 앞에 있는 놈을 향해 대지의 마력이 실린 주먹을 뻗자, 놈이 팔을 교차하며 주먹을 막았다.
그러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팔이 터져 나갔다.
혜경이 소리를 질렀다.
"좋아요 샤믹!"
저 멀리서 노인이 호오 하고 입을 벌렸다.
'내가 힘 하나는 끝내준다고!'
그 모습을 보고는 다른 허수아비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계속해 짜식들아!"
샤믹이 소리를 지르며 또 다른 허수아비를 향해 달려들었다.
허수아비가 허리를 살짝 비틀자, 그녀가 내지른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이어서 허수아비의 주먹이 무방비가 된 샤믹의 얼굴에 꽂혔다.
깃털처럼 가벼웠다.
뇌명공을 두른 주먹이 샤믹의 몸에 소나기처럼 꽂히고, 대지의 마력을 두른 주먹은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이 정도는 계속할 수 있었다.
이렇게 피뢰공을 익히면 대장이 계획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그렇게 한동안 샤믹과 허수아비들의 싸움이 이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그녀는 바라 마지않던 시스템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비급 '피뢰공'이 개화했습니다.]
[피뢰공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뇌전 저항력이 오릅니다.]
온몸이 한층 더 단단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아, 드디어!'
샤믹이 단전에서부터 긴 숨을 끌어올렸다.
"후우."
뇌전을 실은 발길질이 그녀의 머리를 때렸다.
퍽 하는 소리가 울렸다.
샤믹이 씩 웃었다.
허수아비에 담긴 곤륜 고수의 발차기가 조금도 아프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샤믹이 발을 구르며 말했다.
"이제 시작이야!"
그때였다.
갑자기 허수아비들의 이마에 붙어 있던 부적들이 떨어지더니 노인의 손으로 날아갔다.
그러자 허수아비들은 줄이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풀썩 쓰러져버렸다.
노인이 부적 뭉치를 품속에 집어놓고는 박수를 쳤다.
"고생했네, 고생했어."
노인이 샤믹에게 다가와 말했다.
"뇌명공은 곤륜의 고수들 사이에서만 전해져 내려왔던 비전이야. 아마 다른 사람이 피뢰공을 익히려고 들었다면 그대로 통구이가 되어버렸을 걸세."
노인의 말에 샤믹이 생긋 웃었다.
노인이 덧붙였다.
"고맙네. 자네 덕에 또 하나의 무공이 세상에 나갈 수 있게 됐군."
창훈과 혜경이 다가와서 말했다.
"축하해요 샤믹. 완전 멋있었어요!"
"역시 우리 팀 에이스야."
샤믹이 쑥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혜경이 샤믹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말했다.
"다음은 내가 할게. 영감님, 저는 '묵영도'라는 걸...."
그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불어닥친 엄청난 마력에 샤믹은 뒤를 돌아보았다.
시퍼런 뇌전 줄기가 공간을 갈기갈기 찢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창훈과 혜경이 위험했다.
생각할 새도 없이, 샤믹은 폭주하는 뇌전 덩어리를 향해 몸을 던졌다.
번개 줄기가 그녀의 온몸을 집어삼켰다.
뇌명공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마력이었다.
샤믹은 저절로 신음을 뱉었다.
"크윽!"
뇌명공을 두르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였다.
'도대체 이 정도 마력이 어디서 갑자기?'
그녀의 피부가 부서졌다 재생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순간, 뇌전이 멎고 목소리가 들렸다.
"허 이런, 여기 바로 사람이 있었을 줄이야. 미안해요 아가씨."
도대체 사람이 맞나 싶은 거한이 샤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샤믹의 몸통만 한 망치를 든 채로 금빛 장발을 휘날리는 남자는, 샤믹이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바로 세브로 랭킹 부동의 1위를 자랑하는 수험자, 최강의 길드인 '발할라'의 길드장, '천둥망치'였으니까.
그의 전용 보구, 망치 '뇌신의 파괴자'가 아직도 시퍼런 뇌전을 내뿜고 있었다.
그제야 샤믹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서점에서 연무장으로 이어지는 공간 결계를, 천둥망치는 그냥 자기 마력으로 부숴버린 것이었다.
'그걸 이렇게 깨버릴 수 있다고...? 대장도 이런 건 못할 것 같은데?'
이어서 누군가 말했다.
"뭐야, 어떻게 그걸 맞고 살아있을 수 있지?"
혜경보다도 키가 커 보이는, 검은 숏컷을 한 차가운 인상의 여자였다.
등에는 자기 키만 한 장도를 메고 있었고, 오른팔을 코트로 가리고 있었다.
그녀 또한 혜경이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현시점 세브로 랭킹 4위의 강자, 발할라의 부길드장 '외팔 검객'이었다.
샤믹은 침을 꿀꺽 삼켰다.
천둥망치와 외팔 검객을 한자리에서 보다니.
"어이구, 미안합니다 아가씨. 좀 괜찮아요?"
천둥망치가 넉살 좋게 웃으며 샤믹에게 말을 걸었다.
샤믹이 얼떨결에 대답했다.
"네, 네."
그 와중에 천둥망치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는걸 샤믹은 놓치지 않았다.
그저 호인처럼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뱃속에 능구렁이가 꽉꽉 들어차 있다는 게 직접 보니 느껴졌다.
그 와중에 노인에게 다가간 외팔 검객이 노인 앞에 무언가를 툭 던졌다.
피뢰공과 마찬가지로 낡아빠진 비급서, 표지에는 대악사청봉(大岳四靑峰)이라 적혀 있었다.
외팔 검객이 말했다.
"이거, 팔아."
노인의 표정이 복잡했다.
그 복잡한 서가에서 비급서를 찾고 공간 결계를 부순 이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런 생각을 하는 듯했다.
한동안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노인이 말했다.
"3만 전."
'3만 전? 스킬 하나에 3만 코인?'
피뢰공도 억 소리 나게 비쌌는데, 대악사청봉이라는 건 그 세 배의 가격이었다.
도대체 저게 무슨 스킬이길래 저 가격을 받는다는 말인가?
더 놀라운 건 외팔 검객의 반응이었다.
그 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이 그냥 노인을 향해 손을 내민 것이다.
3만 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샤믹은 입을 떡 벌렸다.
'이게... 발할라의 자금력이구나.'
혜경과 창훈의 표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노인이 외팔 검객의 손을 잡자 손등이 파랗게 빛났다.
이어서 노인이 허공에 부적을 흩뿌리자, 부적들이 날아가 허수아비의 이마에 붙었다.
노인이 말했다.
"대악사청봉, 화산의 수많은 고수들이 대를 이어 만들어낸 화산의 비전(秘轉). 화산의 네 봉우리와 같은 네 초식엔 검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들 하지."
이마에 부적을 붙이고 일어나는 허수아비들의 검에 새파란 검기가 일렁였다.
"자네가 그것을 이을 자격이 있는지, 한 번 보세."
노인이 손짓을 하자 허수아비들이 검기를 흩뿌리며 외팔 검객에게 달려들었다.
새파란 검기가 허공에 날카로운 궤적을 그렸다.
비전을 담은 기억이라서일까, 샤믹에게 달려들었던 것들과는 기세 자체가 달랐다.
꿀꺽, 샤믹이 침을 삼켰다.
그때 천둥망치가 바닥에 앉으며 말했다.
"여러분들 순서였던 것 같은데 끼어들어서 미안하군."
한편 그 살벌한 것들을 앞에 두고, 외팔 검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눈을 내리깔 뿐이었다.
이어서, 외팔 검객이 허공을 향해 던진 코트가 펄럭였다.
코트 아래는 타이트한 트레이닝복이 군살 없이 탄탄한 몸을 감싸고 있었다.
이름 그대로 오른팔이 없는 탓에, 그녀는 키만큼이나 거대한 양손검을 왼손만으로 뽑아 들어야 했다.
그런데 그 동작이 가볍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화산의 비전을 담은 검기가 그녀의 목을 노리고 쇄도했다.
그 기가 어찌나 강렬한지 몇십 발자국 떨어진 샤믹에게까지 서늘한 기운이 전해질 정도였다.
그녀를 향해 떨어지는 검강 아래서, 외팔 검객은 조용히 검을 움직였다.
천둥망치가 중얼거렸다.
"금방 끝날 거야."
양발을 벌리고 선 그녀가 요술지팡이를 든 마법사같이 우아한 동작으로 검을 두드렸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대악사청봉의 검기 사이로 그녀의 검이 톡톡 움직일 때마다 허수아비들의 목이 뎅겅뎅겅 떨어져 나간 것이다.
가벼운 발이 춤추듯 움직일 때마다 허수아비들의 검강은 허공을 갈랐다.
마치 리듬체조를 하는 체조선수 같은 움직임이었다.
샤믹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검술이 아닌 춤에 가까운 몸짓.
아름답기까지 한 그 몸짓에 중원 최강의 검술이 무너지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투둑
목이 잘린 허수아비들이 바닥에 쓰러졌다.
찰나였다.
그 찰나에, 화산의 비급 '대악사청봉'의 기억을 담은 허수아비 다섯이 고꾸라졌다.
두 눈으로 보았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실력이었다.
외팔 검객이 말했다.
"시시해."
그녀가 검을 등에 멨다.
"중원 최고의 검법이라더니만, 실망이야."
한편, 그 모습을 본 노인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세상에... 세상에."
노인이 꿀꺽 침을 삼켰다.
"17대 무림맹주 단국호, 지금껏 수많은 검객들을 보아왔지만.... 이런 경지는 보지 못했어."
샤믹이 입을 살짝 벌렸다.
'아, 저 사람이 전 무림맹주였어?'
대장은 '비급서점에서 피뢰공을 사라'고만 말했을 뿐, 주인의 신상 같은 건 얘기해주지 않았다.
저 사람, 무림의 비급을 전하는 걸 업으로 삼았군.
어쨌든.
단국호가 외팔 검객에게 물었다.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요?"
외팔 검객이 코트를 걸치며 대답했다.
"내 이름은 마리야 율리야노바. '외팔 검객'의 화신이다."
단국호가 그 이름을 되뇌이듯 중얼거렸다.
"외팔 검객, 마리야 율리아노바."
단국호가 눈을 잠깐 감았다 떴다.
"대악사청봉이, 당신의 빛나는 명성과 함께 살아있기를 바라겠소."
"봐서."
내뱉듯 대답한 마리야가 몸을 돌려 샤믹과 천둥망치를 향해 다가왔다.
천둥망치가 말했다.
"역시, 금방 끝난다고 했잖아."
천둥망치가 껄껄 웃으며 거구를 일으켰다.
"가자 아저씨."
"그래, 기대한 대로야?"
"개뿔."
마리야가 살짝 고개를 돌려 노인을 바라보더니 눈쌀을 찌푸렸다.
"최고의 검술이라는 게 이따위니까 흑천교 같은 것들한테 잡아먹혔겠지."
"하, 하하하! 그래 맞아 마리야."
껄껄 웃은 천둥망치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샤믹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조만간 또 보자고 아가씨."
천둥망치와 마리야가 연무장 저편을 향해 사라져갔다.
멀어지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샤믹의 귓전에 울렸다.
"그나저나 아저씨, 은퇴한 무림맹주의 가게라고 봐주기라도 한 거야? 어떻게 저런 여자애 하나 처리를 못 해서...."
"아니, 그렇지 않아. 최선을 다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람 봐가면서 힘을 조절한 것도 아니다."
"그럼...."
천둥망치와 마리야가 연무장 밖으로 사라졌다.
샤믹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괴물들을 상대해야 한다고?'
그때였다.
분을 참지 못한 듯 혜경이 소리를 질렀다.
"젠장! 저놈들 뭐야? 완전 제멋대로잖아?"
단국호에게 달려든 혜경이 그의 옷깃을 붙잡고 말했다.
"영감님! 정신 차려요! 나도 비급이 필요하다고!"
아 그래, 발할라의 길드원들이 난입한 탓에 잊고 있었다.
여기서 비급을 익혀야 하는 건 샤믹 뿐만이 아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