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만공당 (3)
하상효가 말했다.
"좋아, 좋소 선생. 그것이 선생이 원하는 바라면야, 충분히 맞추어 드리지."
하상효가 발을 딛자, 그가 내뿜는 무시무시한 기에 돌바닥이 쩍 하고 갈라졌다.
"그런데 말이오, 그 조건을 맞추면서 내가 선생의 목숨까지 보장할 수 있을지 모르겠소."
상원이 팔짱을 끼고 대답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폐하. 제 한 몸을 지킬 힘은 충분하니까요."
용의 수염처럼 길다란 하상효의 콧수염이 꿈틀거렸다.
"허어, 짐이 그냥 보기엔 비곗덩어리처럼 보일지라도 말이오, 화경에 다다른 고수들마저도 짐의 손에 명을 달리했다오."
하상효의 손바닥에 검붉은 기운이 일렁였다.
황제 하상효가 수많은 무림 고수들의 기를 흡수해 쌓은 마공.
그 위력은 상원도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전생에도 수많은 수험자들이 저 마공에 벌레처럼 죽어 나갔으니까.
하지만 상원은 겁나지 않았다.
불신자 상원에겐 저 마공도 통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하나 더, 하상효가 저 마공을 극한까지 펼쳐 보여야 할 상대는 상원이 아니었다.
어쨌든.
상원이 살짝 목례를 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흐흐, 그래 그래.“
쿵 쿵
하상효가 상원의 코앞까지 다가와 우뚝 섰다.
곰보다도 훨씬 커다란 하상효의 거체가 달빛을 등지고서 드넓은 그늘을 만들었다.
화등잔만 한 눈에서는 검붉은 안광이 일렁였다.
같은 인간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괴물 같은 외형.
상원은 마른 침을 삼켰다.
얼마 뒤 이 자와 대장전을 치러야 한다.
수백 수천 번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지만, 막상 이 거리에서 보니 하상효의 위압감은 대단했다.
그 마음을 눌러 삼키며, 상원은 덤덤하게 말했다.
"그럼 폐하, 제전에서 뵙겠습니다. 그때 한 수 부탁드리겠습니다."
귀밑까지 찢어진 하상효의 입에서 날카로운 이빨들이 날 선 빛을 뿜었다.
"그래, 좋소 선생. 곧 봅시다."
상원은 박피 단검을 지갑에 넣고 돌아섰다.
너른 뜰 안에 하상효의 걸걸한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 * *
그 시각, 수험자 샤믹 프란시스코는 한창훈, 송혜경과 함께 야시장을 걷고 있었다.
처음엔 문혁과 진아를 포함해 다섯이 함께였는데, 둘이 노점에 들른 사이 혜경이 샤믹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 갑자기 왜?’
샤믹이 멀어지는 문혁과 진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 어어? 문혁 씨랑 진아 씨 같이 가야 되지 않아요?"
혜경이 엉큼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 저분들은 두 분이 즐겁게 지내시게 놔둬요."
"그럼 그럼, 우리는 이쯤에서 빠지자구요."
참, 이 사람들은 저 두 사람을 못 엮어줘서 안달이구나.
평소 눈치 없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 샤믹이 보기에도 노골적일 정도였다.
가벼운 표정으로 재잘거리는 부부와는 달리, 샤믹의 마음은 편치만은 않았다
문혁과 진아가 이어지는 건 수많은 서울역 수험자들이 바라는 일이었지만, 대장이 특별히 지시한 일을 앞에 두고 이렇게 가볍게 행동해도 되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대장 없이 발할라를 상대해야 되는데… 저렇게 마음 편해도 되는 거야?’
아니, 그렇진 않을 것이다.
창훈과 혜경은 경박해 보이지만 속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과연, 조금 시간을 두고 지켜보니 그들의 어조는 평소보다 높았고 동작도 컸다.
‘저분들도 긴장을 떨치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구나.’
샤믹은 살짝 웃고는 두 수험자의 등을 떠밀었다.
갑자기 샤믹이 적극적으로 나오자 오히려 부부가 당황했다.
“어어, 왜 그래요 샤믹 갑자기?”
“헤헤, 기왕 사라질 거면 빨리 사라져야죠.”
“아이 참. 쫌만 살살 해요.”
세 수험자는 긴장되는 마음을 웃음으로 달랬다.
그렇게 세 수험자는 진아와 문혁을 남겨두고 야시장의 인파 속으로 파고들었다.
* * *
쇼핑과 식도락을 즐기며 야시장을 돌아다니다가, 일행은 유흥을 멈추고 본업으로 돌아왔다.
목적지에 다다른 것이다.
빼곡히 늘어선 중국풍 건물들 사이에 꽂힐 서가를 잘못 찾은 책마냥 끼어 있는 눈에 띄게 초라한 집 하나.
거기가 바로 상원이 이야기한 비급서 상점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들은 그 집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 신경도 쓰지 않고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세 사람이 낡은 문 앞에 서서 초라한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혜경이 현판을 읽었다.
"만공당(萬功堂), 여기군요."
샤믹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공당, 상원은 말 그대로 모든 무공이 있는 집이라고 했다.
창훈이 말했다.
"못 찾을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더니 역시 그렇네."
"으리으리한 집들 사이에 이 정도로 낡은 게 끼어 있으면 못 찾는 게 신기하지."
창훈의 말에 덧붙인 혜경이 만공당의 낡은 문을 밀자, 끼익하는 을씨년스러운 소리가 났다.
문지방 너머의 공간은 낡은 서점이었다.
비좁은 공간에 서가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고, 서가마다 표지가 누렇게 빛이 바랜 책들이 가득했다.
그 비좁은 공간에 수없이 들어찬 책을 보니 책의 파도가 들이친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그때 서가 사이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물었다.
노인은 단정한 흰 옷차림이었고, 눈썹과 수염이 길게 자란 탓에 눈과 입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비급서를 사러 왔는가?"
'단도직입적이네.'
샤믹은 상원이 말했던 무공을 떠올렸다.
"예 어르신, '피뢰공(避雷功)'을 익히려고 해요."
그 말에 긴 눈썹 아래 노인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아 그리고 저는...."
샤믹에 이어 혜경이 말을 하려는데, 노인은 혜경의 말을 듣지도 않고 서가 사이로 슥 사라져버렸다.
혜경이 열을 냈다.
"아니 뭐 저런, 저런 영감탱이가 다 있어? 여자라고 무시하는 거야?"
"아이, 그래도 제 말은 들었잖아요 언니."
"아니, 그렇긴 한데...."
샤믹이 열 받은 혜경을 달래는데, 노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는 누런 표지에 때가 잔뜩 낀 꾀죄죄한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노인이 샤믹에게 다가와 책을 내밀며 툭 내뱉듯 말했다.
"1만 전."
"예?"
노인의 말에 혜경이 놀라서 소리쳤다.
이곳의 1전은 1코인, 그러니까 이 책 한 권이 1만 코인이란 소리였다.
비급이라는 것도 어차피 스킬 중 하나.
1만 코인이면 스킬 하나치고는 말도 안 되게 비싼 가격이었다.
혜경이 씩씩대며 말했다.
"아니, 영감님! 이 무공이라는 게 끽해봐야 스킬 하난데, 무슨 스킬 하나 팔면서 1만 코인을 받아요?"
그러자 노인이 선선한 눈으로 혜경을 바라보다가 책을 거두며 말했다.
"됐어, 썩 꺼져."
서가 사이로 사라지는 노인의 휘척거리는 걸음이 지나치게 빨랐다.
노인의 뒷모습을 보며 샤믹이 외쳤다.
"잠깐, 잠깐만요!"
상원이 반드시 사야 한다고 말한 비급서였다.
상원이 비급서의 가격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는 건, 저 가격을 깎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였다.
거기다 혜경의 말에 대한 노인의 태도를 보아하니, 가격을 흥정할 여지도 없다고 보아야 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1만 전을 내더라도 저 비급서를 사야 한다.
샤믹이 재빨리 노인을 쫓았다.
비좁은 책방 안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샤믹과 노인 사이의 거리는 벌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수호신 '가라앉은 거인'이 가호를 준 덕에, 그녀는 순식간에 노인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노인이 그녀를 보며 중얼거렸다.
"빠르군. 보기랑은 다르게."
샤믹이 비급서를 낚아채듯 쥐며 말했다.
"살게요, 이 비급서, 1만 전에 살게요."
노인이 빙긋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러자 비급서를 쥔 샤믹의 손등에서 '시험의 표식'이 새파란 빛을 뿜었다.
이어서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비급서 '피뢰공'을 구입하였습니다. 1만 코인을 지불합니다.]
[비급 '피뢰공'을 익혔습니다.]
[피뢰공 개화율: 00%]
처음 보는 메시지였다.
'개화율? 스킬을 바로 익힌 게 아니야?'
샤믹이 당황해서 시스템 메시지를 살펴보는데, 노인이 말했다.
"따라오시게."
"네?"
"따라오라고. 비급서 하나 봤다고 비급을 익힐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러면서 노인은 서가 사이로 휘척휘척 걸음을 옮겼다.
"어르신, 잠깐만요! 어르신!"
노인을 따라 서가의 모퉁이를 돌았을 때, 샤믹은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서가 너머로 끝없이 넓은 연무장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무장엔 사람만 한 허수아비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샤믹은 자신의 공간지각력을 의심했다.
'도대체 그렇게 작은 집에 어떻게 이렇게 넓은 정원이 있을 수 있는 거지?'
혜경과 창훈 또한 벙찐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뜰 가운데 선 노인이 샤믹에게 말했다.
"이제 자네는 피뢰공이 뭔지 알았을 뿐이야. 그걸 적용하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지."
샤믹이 꿀꺽 침을 삼키고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죠? 피뢰공을 적용하려면."
노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직접 당해보는 것보다 빠른 게 있겠어?"
"네?"
노인이 품에서 부적 뭉치를 꺼내 허공에 흩뿌렸다.
그러자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 부적 뭉치들이 허수아비의 머리통에 척척 붙었다.
샤믹은 그 광경을 넋이 나가 지켜보고만 있었다.
노인이 말했다.
"강호를 수놓았던 무림인들의 기억일세."
이마에 부적이 붙은 허수아비들이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수아비들의 손끝에서 새파란 뇌전이 일었다.
샤믹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거... 설마...?"
노인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이건 뇌명공(雷鳴功)을 익혔던 곤륜 고수들의 기억이지."
노인이 뒤로 물러나고 허수아비들이 샤믹을 감쌌다.
오른손을 허리에 대고 왼손을 앞으로 뻗은 자세가 영락없는 권법 자세였다.
"피뢰공은 말 그대로 번개를 피하는 무공이야. 번개를 피하는 무공을 익히려면 번개를 직접 맞아보는 게 제일 빠르겠지."
허수아비일 뿐이었는데도, 그들이 내뿜는 무공의 박력은 상당했다.
그들이 두른 뇌전이 어찌나 강력한지 샤믹의 머리가 슬금슬금 떠오를 정도였다.
샤믹은 생각했다.
'저거... 많이 아프겠지?'
샤믹은 뇌전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다림델에서 '천둥망치'의 전용 보구 '뇌신의 파괴자'를 쥐었을 때도, 정말 정말 아팠다.
하지만 이겨낼 것이다.
대장이, 발할라 길드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피뢰공을 반드시 익혀야 한다고 했으니까.
대장을 위해서 해낼 것이다.
까득, 이를 간 샤믹이 나직이 말했다.
"좋아요."
샤믹이 심호흡을 들이쉬고 단전으로부터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단전에서부터 온몸의 말단까지 단단한 기운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살결이 화강암처럼 견고해진 게 느껴졌다.
그 무엇도 이 몸을 해할 수 없다는 바위 같은 자신감이 피어올랐다.
샤믹이 발을 구르자 돌로 된 바닥이 과자처럼 부서졌다.
그녀는 무(武)의 오의를 깨달은 초절정 고수와 같은 몸짓으로, 한 손은 뒷짐을 지고 다른 손을 까닥였다.
노인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좋아, 좋아! 좋은 자세일세 젊은이."
뇌명공을 두른 허수아비들이 그녀를 향해 소리 없이 쇄도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