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화. 만공당 (2)
구름 너머까지 뻗은 거대한 나뭇가지가 창공을 떠도는 바람에 우수수 흩날렸다.
나뭇잎들이 바람에 실려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
문혁이 말했다.
"많은 종교에서 나무는 하늘과 땅을 잇는 상징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나무는... 정말로 하늘까지 뻗어 있군요."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어서 덧붙였다.
"그리고 이 나무 위에는 신과 같은 존재가 살고 있지요."
상원의 말에 일행들의 얼굴이 굳었다.
그 신과 같은 존재에 대해 생각해서였다.
흑천교주 해원향.
상원이 웃으며 말했다.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해원향을 상대하는 게 아니니까요. 우리의 상대는 발할라 길드입니다."
창훈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요. 뭐 천둥망치 그 양반이 괴물같다고 해도, 해원향 만큼은 아니겠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일행들의 표정은 쉽사리 밝아지지 않았다.
상원이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부터 이렇게 쳐져 있으면 곤란한데.’
이번에 도전할 위업은 상원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고, 반드시 남은 다섯 명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띄우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은 상원이 앞장서서 일행들을 불야성 속으로 이끌었다.
"자, 일단은 잊어버립시다. 황성은 시험의 무대이기도 하지만, 즐길 거리가 넘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일행들이 상원을 따라 걸었다.
붐비는 거리 양쪽으로 진기한 물건을 파는 상점들과 보기만 해도 군침 도는 음식을 파는 노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음식과 쇼핑을 즐기며 일행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일행들의 얼굴에서 긴장이 가셨을 때, 공교롭게도 그들은 중국풍의 거대한 대궐 앞에 다다라 있었다.
그 폭이 얼마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을 만큼 넓은 문 위의 금빛 기와로 별빛이 쏟아졌다.
그 앞으로 중무장한 병사들이 잔뜩 늘어서 있었다.
여기가 바로 스물다섯 번째 시험이 펼쳐질 장소, 황성의 입구였다.
상원이 말했다.
"내일 정오에 여기서 뵙겠습니다. 말씀드린 비서들과 아이템은 꼭 챙기시고,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보내십시오. 긴장 풀고 푹 쉬다가 오시기 바랍니다."
샤믹이 손을 들고 물었다.
"대장, 대장은 어디로 가시게요?"
상원이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저는 따로 가볼 데가 있습니다."
일행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상원은 황성의 담벼락을 굽이굽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노트에서 보았던, 황성의 가장 안쪽 황제의 침전으로 가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 * *
황성 가장 안쪽 황제의 침전 앞엔 널따란 뜰이 있었다.
뜰의 가장자리를 따라 늘어선 화로의 불빛이 뜰의 돌바닥을 비추었다.
그 뜰의 한가운데 두 남자가 있었다.
한 남자의 솥뚜껑 같은 손이 다른 중년 남자의 골통을 부수는 중이었다.
머리를 잡힌 중년인이 끔찍한 고통을 이겨내며 말했다.
"하... 상효! 당신이... 당신이, 이러고도 황제요?"
머리를 쥔 남자, 황제 하상효가 더운 콧김을 내뿜었다.
"흐, 흐흐. 짐이 황제가 아니면 누가 황제란 말인가? 아, 아닌가?"
하상효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중년인의 머리통을 집어 올려 하늘을 향해 뻗었다.
중년인의 눈이 하늘 높이 솟은 나무를 향하고 있었다.
하상효가 절규하듯 외쳤다.
"아니면! 저 나무 위에 있는 그 구렁이 년이! 이 나라의 황제라는 말이냐!"
하상효가 손을 놓자 중년인이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중년인이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말했다.
"으... 으으, 황제, 그러니, 우리가 힘을 모아... 흑천교로부터 중원을 지켜야 했을 것 아니오...."
그 말에 하상효가 코웃음을 쳤다.
저벅저벅 중년인에게 다가간 하상효가 발로 중년인을 굴렸다.
엉망이 된 얼굴이 하상효를 향했다.
"화산제일검, 검선 제정수. 대답해봐라."
하상효의 곰 같은 발이 제정수의 몸통을 누르자, 제정수가 입으로 시뻘건 피를 뱉어냈다.
"저 구렁이 놈들이 하늘을 참칭하며 백성들을 혹세무민할 때 너희 무림맹 놈들이 한 일이, 황실을 욕하는 것 말고 무엇이 있었는지 말을 해봐."
하상효의 관자놀이에 뱀같은 힘줄이 꿈틀거렸다.
제정수의 눈동자가 부들부들 떨렸다.
"우리... 무림맹은 힘을, 힘을 모아서...."
"힘? 지랄하고 자빠졌네. 고작 구두망 한 놈한테 모가지를 줄줄이 따여 놓고는 힘은 무슨 얼어 죽을 힘이야."
하상효가 제정수의 왼손을 밟자, 화경에 이른 고수의 손이 벌레처럼 으스러졌다.
"크아아아악!"
"그래, 그래서 네놈들이 모아본다던 그 힘 이제 짐이 직접 모아본다는 것 아니냐?"
하상효가 발을 내려놓고는 제정수의 단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제정수의 온몸에서 시뻘건 기운이 빠져나와 하상효의 손을 타고 흡수되기 시작했다.
하상효가 제정수의 기를 흡수하는 것이었다.
온몸을 쥐어짜는 고통에 제정수가 미친 듯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으아아아악!"
"이놈, 시끄럽기는. 구렁이 년이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하상효가 어금니를 드러내고 웃으며, 손가락에서 기를 뽑아내 제정수의 울대를 날려버렸다.
그러자 제정수는 입으로 연신 피를 쏟아내며 비명을 질렀다.
그렇지만 그의 입에서는 비명 대신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화산제일검(華山第一劍)이라는 칭호에 빛나는, 화경에 다다른 고수가 이토록 비참한 꼴이 될 거라고 그 누가 짐작했으랴.
"으으으..."
마침내 제정수의 온몸에서 기가 빠져나가고, 마른 걸레처럼 되어버린 제정수의 몸이 바닥에 털썩 늘어졌다.
제정수는 미라처럼 흉한 몰골이 되어 있었다.
제정수의 기를 빨아들인 하상효가 맛있는 걸 먹었다는 듯 기쁨에 찬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상효는 다시 평소의 냉혹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힘은 저 나무 둥지에 들어앉은 흑천교주 해원향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상효가 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주변의 돌바닥에 순식간에 균열이 갔고, 하상효가 내뿜은 기에 돌조각들이 우수수 떠올랐다.
이 정도면 현경(玄境)에 다다랐다 해도 좋았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무림의 내로라하는 고수는 거의 다 잡아 먹었거늘... 아직도 내 힘은 이것뿐인가.'
아니다, 이 정도면 됐다.
하상효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이 손에 박피 단검만 들어오면... 그깟 구렁이 년 하나쯤은...!'
그때였다.
뜰을 오가는 바람에서 낯선 냄새를 맡은 하상효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낯선 냄새, 분명 누군가 이 공간에 있었다.
'기습인가...?'
하상효가 손끝에 기를 모으자 검붉은 기운이 피어났다.
'아직도 짐에게 암살이 통한다고 생각하는 멍청이가 남아있었단 말인가?'
이윽고 뜰 저쪽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기척을 알아챈 하상효가 그쪽으로 기탄을 쏘려는 순간, 낯선 자가 먼저 말했다.
"멈추시오 하상효. 성격도 급하군."
그 목소리에 하상효가 살기를 거두며 말했다.
"하하, 반갑소 선생! 선생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오."
하상효가 환영한다는 듯 양팔을 벌렸다.
남자가 화롯불이 비추는 곳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흰머리에 검은 코트 차림의 남자, 황금뱀을 통해서 보았던 그 사람이었다.
남자가 말했다.
"대국의 황제를 뵈옵는데, 이 미천한 놈이 변변한 선물 하나 준비하지 못해서 어떡합니까?"
하상효가 순간 눈을 날카롭게 뜨고 남자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하상효는 생각했다.
'말라 죽은 시체를 보았는데도 기가 한 치도 흔들리지를 않는군. 예삿 놈이 아니다. 하기사 '박피 단검'을 가진 놈이 보통 놈일 리가 없지.'
하상효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흠흠, 괜찮소, 괜찮소. 이런 누추한 곳에 오셨는데 선물 같은 게 있었다면 오히려 내가 민망하지 않았겠소?"
하상효가 남자를 향해 걸음을 옮기자 마치 곰이 걷기라도 하는 듯 쿵쿵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선생, 이 빈처까지 오신 이유가 무엇이오?"
남자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대답했다.
"이것을 보여드리기 위해서지요. 틀림없는 물건인지 직접 보셔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남자가 품에서 꺼낸 물건이 쉬이익 소리와 함께 하상효의 미간을 향해 짓쳐 들어왔다.
하상효가 반응도 제대로 못 하는 사이, 그것이 하상효의 눈앞에 딱 멈추었다.
날에 패인 홈을 따라 새빨간 독기가 흐르는 은장도였다.
하상효가 칼날에 손을 대보았다.
그러자 고작 은장도의 칼날이, 현경 고수 하상효의 손가락에 생채기를 내고 저릿거리는 느낌을 주었다.
그래, 이것이 틀림없었다.
흑천교의 가르침에 이르기를, 예언자의 목을 베리라 예비된 그 칼, '박피 단검'이었다.
"그래, 이것은 틀림없는...."
하상효가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자, 박피 단검이 쉬이익 하는 뱀 소리와 함께 남자에게 돌아갔다.
방금 전까지 검이 있던 곳을, 하상효는 살짝 쥐어 보았다.
황제에게 농을 부리다니, 저놈이 지금 실성을 했나?
아니, 아니야.
저놈에게 검이 있는 이상, 여기서 역정을 부리면 일을 모조리 그르친다.
하상효는 자존심을 접고 부드럽게 나가기로 했다.
"하하, 왜 그러시오 선생. 마음이 바뀌시었소?"
그러자 남자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대답했다.
"마음이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이걸 폐하께 지금 드릴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거든요."
"뭐라...?"
황제의 눈썹이 꿈틀했다.
"폐하, 저는 이걸 폐하께 그냥 드리지는 않을 겁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그 말에 황제가 대답했다.
"조건? 어떤 조건을 얘기하는 거요? 작위가 필요하시오? 보물? 봉토? 여자? 무엇이 필요하시오? 필요하면 필요한 만큼 드리리다."
"제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닙니다 폐하."
쉬이익, 뱀 소리를 내며 박피 단검이 위성처럼 남자의 주위를 빙글 돌았다.
"폐하께서 '생명나무 제전'의 대장전에서 절 이기시면, 그때 이걸 드리겠습니다."
어, 뭐라고?
예상치 못한 말에 잘못 들었나 싶어 순간 굳어 있던 하상효가 파안대소했다.
"하, 하하! 하하하하! 뭐라고? 대장전에 이기면 그걸 주겠다?"
그 말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인 즉슨 나보고 생명나무 제전에 참가하라는 얘기인가? 제전의 주최자인 내가?"
"그렇습니다. 못하실 것도 없지 않습니까?"
"흐, 흐. 그래. 그렇기는 하지."
생명나무 제전은 생명의 나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무투 대결이다.
황제는 자기 탄신일마다 생명나무 제전을 개최해 왔었다.
올해는 오랑캐 용사들이 펼치는 무투 대결을 감상할 참이었다.
그런데 그 대전에 직접 참가하라고?
뭐, 그래 그건 그렇다고 치자고.
"그런데 말이오 선생, 선생은 짐을 이길 자신이 있으시오?"
하상효가 씩 웃으며 손끝에 기를 살짝 불어넣자, 그의 손끝에서 검붉은 기운이 수증기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중원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을 잡아먹으며 축적한 내력, 평범한 오랑캐라면 버티지 못하고 갈아버릴 농도의 힘이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보는 남자의 얼굴은 손톱만큼도 변하지 않았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것이지요 폐하."
"허, 허허허허."
어이없어하는 황제의 웃음이 뜰에 가득 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