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황제에게 바치는 조공 (4)
'누구지? 자객인가?'
당황한 상원이 코트 주머니에 손을 가져갔다.
남자가 엷게 웃으며 양손을 내밀었다.
"워워. 침착해. 해치려는 건 아니니까."
그럼에도 상원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승천 시험에서 남의 모습을 따라 하는 자들은 대부분 자객이었으니까.
게다가 상원은 이 사람이 근처에 다가올 때까지 알아차리지도 못했다는 건 보통 실력자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상원이 낮게 말했다.
"누구냐."
그 말에 남자가 피식 웃으며 상원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만!"
상원이 바위에 박힌 검을 꺼내 남자에게 겨눴다.
하지만 남자는 손으로 검을 가볍게 밀어내고 상원에게 다가왔다.
주춤주춤 물러나는 상원의 가슴팍을 남자가 커다란 손으로 두드렸다.
툭 툭 하는 소리가 마치 시계추 같았다.
그런데 그 느낌이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그때 상원의 머릿속을 스쳐 가는 말이 있었다.
기계장치의 신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그러게 좀 작작 쓰지 그랬나? 에잉, 거 그래도 절대자 하시던 양반이 만든 거라 꽤 튼튼한데, 참 아쉽구먼 아쉬워.'
신화의 몸에 박혀 있는 신기 '황금시대의 모래시계', 그걸 만든 이가 바로 '황금시대의 군주'.
그렇다면 이 사람이 설마?
상원이 넋 나간 목소리로 물었다.
"황금시대의... 군주?"
남자가 엷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상원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선대 절대자'가 있다는 걸 안 것도 충격이었는데, 그 선대 절대자를 연달아 둘이나 만나다니.
남자가 주저앉은 상원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상원은 자기도 모르게 남자의 손을 잡았다.
곰의 앞발처럼 커다랗고 투박한 남자의 손은 보기와는 다르게 부드럽고 따뜻했다.
상원은 남자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상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당신이 정말, '황금시대의 군주'가 맞습니까?"
상원의 물음에 남자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말했다.
"의심이 많군. 누가 불신자 아니랄까 봐."
"제가 아니라 어느 누구도 믿지 않을 겁니다."
상원의 말은 사실이었다.
'황금시대의 군주', 그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단 하나뿐이었다.
새하늘시험의 어떤 아이템보다도 강력한 신기 '황금시대의 모래시계'를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
새하늘시험 전체를 통틀어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건 '황금시대의 모래시계'의 설명문 뿐이었다.
아, 상원은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그가 선대 절대자 중 하나라는 것.
남자가 대답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내가 시험에서 떠난 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까."
남자가 고개를 돌려 한강 수면 위, 아직도 공중에 떠 있는 돌멩이를 보고 말했다.
"이러면 믿을까?"
남자가 돌멩이를 향해 손을 뻗자, 돌멩이에서 황금색 가루가 흩날렸다.
황금시대의 모래시계가 작동할 때 뿜어져 나오는 모래와 정확히 같았다.
이어서 돌멩이가 첨벙 소리를 내며 강 속으로 떨어졌다.
눈속임은 아니었다.
상원에겐 어떤 속임수 스킬도 통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저 스킬이 진짜라는 건, 눈앞의 남자가 틀림없는 '황금시대의 군주'라는 뜻이었다.
상원이 남자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틀림없군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제 앞에 나타난 거지요? 시계 때문입니까?"
남자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시계 때문이야."
그 말에 상원이 뒤로 물러나며 남자를 향해 가지를 겨눴다.
남자가 시계를 가져갈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상대가 아무리 그 잘난 절대자라도, 이대로 시계를 빼앗길 수는 없었다.
비록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한 번 더 쓰면 부서질 물건이라 해도 소중하기 그지없는 물건이었으니까.
상원의 양팔로부터 뻗어 나온 마력이 새하얀 빛이 되어 가지를 감쌌다.
남자가 가지를 보며 말했다.
"하늘과 땅의 주술사. 아주 오랜만에 보는 힘이로군."
남자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긴장 풀어, 그거 가져가려고 한 거 아니니까. 난 너랑 싸울 생각이 없어."
남자가 두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상원이 가지를 꽉 쥐고 말했다.
"나타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건 곧 시계가 부서질 것 같기 때문이야. 부서지기 전에, 자네를 꼭 만나야 했거든."
'그게 무슨 소리지?'
상원이 가지에서 마력을 거두었다.
남자가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말했다.
"'황금시대의 군주.' 세간에선 나를 그렇게 부르지. 나는 황금시대의 군주가 맞고... 아니기도 해."
남자가 다시 상원의 가슴팍을 툭툭 두드렸다.
"나는 정확히는, 거기 남아 있는 사념이야."
'뭐라고?'
아이템에 승천자의 사념이 남아 있는 건 놀라운 게 아니었다.
실제로 그런 아이템은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그런데 특이한 건, 눈앞의 남자가 사념체 치고는 지나치게 선명하고 생생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는 게 승천자 본인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절대자쯤 되면 저런 사념을 남길 수도 있는 건가?
"그리고 시계가 부서지기 전... 그러니까 내가 사라지기 전에 자네 앞에 나타난 건,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지."
천천히 강둑에 앉은 남자가 상원을 보고 말했다.
"자네도 와서 앉아. 얘기 듣다가 또 주저앉지 말고."
남자의 말에 상원이 천천히 강둑에 가서 앉았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강물을 보았다.
'또 주저앉을지도 모른다고?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상원이 남자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굳세고 각진 옆얼굴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남자는 한동안 아련한 얼굴로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자네, 이 시험의 끝에 뭐가 있다고 생각하나?"
그런 당연한 걸 왜 묻냐는 투로 상원이 대답했다.
"승천이 있습니다."
남자가 중얼거렸다.
"승천."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바라는 대답이 있나?
침묵이 어색해 상원은 다시 입을 열었다.
"속죄, 그리고 구원이 있습니다."
남자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속죄. 모두들 그렇게 믿지."
이어서 남자가 하늘로 손을 뻗었다.
밤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하늘에 오르면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고."
남자가 고개를 돌려 상원을 보았다.
그의 눈빛이 쓸쓸했다.
"자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때아닌 돌풍에 수면이 흔들리고 나뭇잎 몇 장이 바닥을 뒹굴었다.
남자의 말이 상원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럼요."
당연하다는 듯 대답한 상원이었지만 그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불안했다.
기계장치의 신에게서 들었던 말이 귓전을 때렸다.
'불신자 선생, 자네는 자네가 이 시험의 모든 것을 아는 것 같나?'
남자가 물었다.
"자네가 그렇게 구원을 철썩같이 믿는 건 무엇 때문이지?"
상원은 갈등했다.
상원이 가진 무기, '승천계시록'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게 좋을까?
하늘방을 탈출한 이후 상원은 그 누구에게도 계시록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이 사람에겐 그 얘기를 해도 괜찮을까?
괜찮을 것 같았다.
어차피 사념체인데 그걸 알아서 무엇하겠는가?
그리고 어쩐지, 이제는 누군가에게 그걸 얘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 계시. 맞아. 그런데."
남자가 잠깐 말을 끊었다.
"그걸 믿는 이유는 뭐지? 자네는 불신자잖아."
잠깐의 정적.
상원은 눈에 힘을 주고 대답했다.
"계시가 실현되는 걸 보았으니까요."
보았으니까.
상원은 그 말을 혀로 나직이 굴려보았다.
껄껄 웃은 남자가 굵은 손가락으로 상원의 눈을 가리켰다.
"그래 맞아. 보았기 때문이야. 보고 나면 믿게 되지."
남자가 눈을 내리깔았다.
강세가 규칙적이고 리드미컬한 남자의 독특한 억양이 마치 째깍거리는 시계의 초침 같았다.
"거기 적힌 수많은 것들이 그대로 이루어졌으니, 모든 구절이 사실이라고 믿는 거지. 이를테면 '새하늘 주인께서 새하늘에 오를 자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셨음이라.' 따위의 구절들 말이야. 보지 않으면 믿지 않지만, 보면 믿게 돼. 과거와 현재가 실현되는 걸 보면, 미래가 실현되는 걸 믿게 되는 거지. 경험이란 그런 거야. 시간 위에 전망을 세우지."
낮고 단조로워서 마치 아주 오래된 이야기 같았던 남자의 말투가 점점 빨라졌다.
마치 시계를 빨리 돌린 것처럼.
"그 전망이 바로, 믿음의 전당이야."
남자가 말을 멈췄다.
그리고 남자가 자기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래서 보고 나면 믿게 되지. 심지어 자네같이 머리에 결함이 있는 불신자라도."
머리의 결함, 그걸 이 사람이 어떻게 아는 거지?
후덥지근한 여름인데도 관자놀이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니까 실제로 보면 달라지는 거지. 새하늘에 무엇이 있는지."
남자의 목소리가 오래된 진열장 속의 골동품처럼 아득했다.
새하늘에 무엇이 있는지 본다고...?
잠깐!
상원이 다급하게 물었다.
"승천을 하지 않아도 새하늘에 갈 수 있는 겁니까?"
남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건 아니야. 그냥 엿보는 거지. 저 집 마당에 뭐가 있는지 담벼락 너머로 살짝 보듯이."
불어온 돌풍을 따라 황금색 흙먼지가 조금 흩날렸다.
"그런데... 때로는 말이야, 사태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는 바깥에서 보는 게 도움이 되기도 해."
남자의 형체가 조금씩 조금씩 모래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남자가 상원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의 손 위에는 낡은 막대기가 놓여 있었다.
한때 찬란한 광채를 뿜었을 것이 틀림없는 황금색 막대는 이제는 때가 잔뜩 끼어 광채를 잃어버린 채였다.
상원은 막대를 받았다.
보기와 달리 막대는 묵직했다.
남자가 말했다.
"다시 시계를 쓰게 되면, 그걸 시계에 박아. 그러면 보여줄게. 내가 봤던걸."
휘익!
돌풍이 강해졌다.
세월에 부서지는 유적처럼, 남자가 모래 먼지가 되어 흩어져갔다.
사라져가는 남자의 서글픈 눈빛이 상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그 눈빛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조만간 보자고."
마침내 남자가 완전히 사라졌다.
남자가 앉아있던 자리엔 그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방금은 뭐였지? 꿈이었나?'
그렇지 않았다.
상원의 손 위엔 여전히 황금막대가 들려 있었으니까.
상원은 막대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남자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자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새하늘의 끝에 구원이 아니라면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아니, 거기에 구원이 없다면 지금까지 상원이 걸어온 길은 무엇이 되는가?
새하늘교 신도들은, 아버지는, 누나는... 어떻게 되는 건가?
상원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심지어 그의 모습이 신화의 몸과 일치했다는 것까지.
그 와중에도 강물은 결코 멈추지 않는 시간처럼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 * *
마음은 소란스러웠지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서 상원은 며칠 동안 사냥에 매달렸다.
의체의 경험치가 거의 오르지 않을 정도로 무의미한 사냥의 연속이었지만, 상원은 거기서 안정감을 얻었다.
적어도 수많은 마물과 던전들은 계산의 범위 안에 있었으니까.
그러는 와중에 시간은 흘렀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스물다섯 번째 시험으로 이어지는 큰 줄기의 시작, 바로 중원으로의 초대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