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황제에게 바치는 조공 (3)
은장도 위에서 구불거리던 뱀들이 은장도를 중심으로 원을 그렸다.
이 표식은...?
"어째... 어찌 이런...."
놀란 사신이 말을 더듬었다.
저 표식이 무엇인가?
그건 황제께서 직접 이 물건을 보고 계신다는 뜻이었다.
수십 수백의 다른 사신들이 수집한 수많은 물건들을 제치고, 이것을 직접 보고 계셨다.
고작 단검 하나에, 저런 답이 돌아온다고?
사신이 벌벌 떨며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황제께서... 황제께서...."
그때였다.
쿠르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뱀 단지가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뭔가?
사신이 넋을 잃고 뱀 단지를 바라보는데 뱀 단지가 철퍼덕하고 쓰러져 데구르르 굴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지나치게 당황해서일까.
사신의 머릿속으로는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들이 스쳐 가고 있었다.
'저거... 저러다가 뱀들이 쏟아져 나오는 거 아닌가? 저 안에 들어 있는 뱀만 오십 마리는 넘을 건데, 저걸 언제 다 잡아서 집어넣지?'
사신의 걱정과는 다르게 뱀들은 우르르 쏟아져 나오지 않았다.
대신 지금껏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뱀 비린내가 훅 풍겨왔다.
이어서 사신이 생각지도 못했던 존재가 뱀 단지 안에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머리끝에서 꼬리 끝까지 눈부신 황금빛 비늘을 두른, 뱀이라기보다는 용이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은 존재가 꾸물거리며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 항아리 안에 저런 놈이 들어가 있었다고?'
사신은 넋 나간 얼굴로 그 뱀을 보았고, 생각지도 못한 대사(大巳)의 등장에 놀란 시녀들과 소리꾼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들과는 달리 흰머리의 사내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역시, 직접 왔군. 황제 하상효."
사신은 놈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도대체 저 무엄한 놈이 지금 무엇을 입에 담은 것인가?
"이... 이놈.... 무엄하다! 어디서 발칙하게 그 이름을...!"
- 닥쳐라!
생각지도 못한 천둥 같은 전음이 사신의 목소리를 끊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그러나 여기서 들을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목소리, 바로 황제 하상효의 목소리였다.
황금색 대사가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사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황금색 대사... 아, 아, 생각났다.
이 대사는 황제께서 직접 빙의하는 뱀이.
그렇다는 것은...!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사신이 그 커다란 몸뚱이로 바닥에 엎드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미천한 몸이 너르신 황제의 성음을 들었나이다!"
황제께서, 이곳을 직접 보고 계신다.
소리꾼이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성음을 들었나이다!"
그 소리에 이어 철컥거리는 쇳소리와 함께 사절단의 병사들이 일제히 외쳤다.
"성음을 들었나이다."
쇳소리는 누각을 올려다보던 군사들이 일제히 예를 표하며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그때 누각 한쪽에서 멍청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헤... 헤헤."
사신이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보았다.
시녀 하나가 침을 질질 흘리며 헤싯거리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아예 거품을 물고 혼절해버렸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저 계집들은 내공이 깊지가 않다.
이토록 강렬한 기가 담긴 전음을 그대로 들었으니 두 년 다 평생을 온전한 정신으로 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대국의 황제 하상효는 그딴 걸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다.
대사가 거대한 몸을 꾸물럭 꾸물럭 일으키며 목 옆의 볏을 세웠다.
볏에 새겨진 커다란 무늬가 마치 황제 하상효의 날카로운 눈매를 보는 것 같았다.
- 멍청한 놈!
사신이 식은땀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마... 망극하옵니다 폐하...."
이마를 마루에 박아넣기라도 하듯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데, 뒤통수에 서늘한 느낌과 함께 뱀 비린내가 훅 풍겨왔다.
- 그래도 이것을 받았으니, 그것은 인정하도록 하마.
"화... 황송하옵니다... 황송하옵니다 폐하."
사신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눈앞을 쳐다보았다.
황제와는 눈을 잘못 마주치기라도 하면 목이 달아나는 것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서 그 광경을 쳐다볼 생각을 했을까.
대사가 고개를 돌려 흰머리 사내를 마주하고 있었다.
놈은 그 끝없는 황제의 위엄에도 한 치도 주눅 들지 않았다.
황제도 그것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대사가 먼저 놈을 향해 고개를 숙인 것이다.
- 짐의 수하들이 보인 무례를 용서하시오. 미천한 이들이 보인 추태에 너른 아량으로 눈감아주시기를 바라오.
황제의 전음이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황제께서, 흑천교주 말고 다른 사람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신다고?
'이럴... 수가 있나?'
흰머리 사내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대국의 황제이시여."
대사가 꼬리를 스르르 움직여 놈이 내밀었던 단검을 쓰다듬었다.
- 흐... 흐흐흐. 이 귀한 걸 도대체 어디서 구하셨소?
남자가 바닥에 철퍼덕 앉으며 말했다.
"다 방법이 있지요 폐하."
대사가 꼬리 끝으로 칼날을 살짝 문지르자 핏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 틀림없군. 틀림없어. 틀림없는 박피 단검이로다.
대사가 흐뭇한 눈으로 단검을 쳐다보았다.
그때 남자가 허공을 향해 손짓을 하자, 박피 단검이 쉬이익 하는 뱀 소리를 내며 남자의 손으로 날아갔다.
'이건... 필시, 어검술? 저놈이 어검술마저도 쓸 줄 알았단 말인가?'
중원의 그 수많은 절세 고수들 중에서도 이렇게 빠른 놈은 손에 꼽았다.
그 정도라면 어검술을 쓸 줄 아는 것도 당연했다.
문제는 황제의 반응이었다.
손에 거의 들어왔던 물건이 빠져나갔으니 불같이 화를 낼 것이었다.
사신은 그 화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황제는 예상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 하하하하! 그래 틀림 없구만! 좋소, 좋소!
대사가 주저앉은 남자와 눈높이를 맞추고 말했다.
- 귀공을 짐의 탄축일에 초대하는 바이오. 미천한 자리이오나 귀공의 참석으로 그 위상이 널리 빛났으면 하오.
그 말에 남자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폐하. 그런데 저는 허락된 자리가 몇 개인지가 궁금합니다. 폐하의 마음에 꼭 맞는 것을 준비하였사오니, 받을 수 있는 만큼 많은 자리를 받았다고 생각해도 될런지요?"
뭐야?
공물의 질에 따라 초대받을 수 있는 사람의 수가 달라진다는 걸 저놈이 어떻게 아는 거지?
- 하하하하! 좋소, 좋아. 내 남은 자리를 모두 드리리다. 여봐라! 초청장을 모두 가져와라!
"예... 예이."
이것은 본디 시녀들의 일인데, 지금은 시녀들이 모두 저 꼴이 되어버렸으니 어찌할 수 없다.
사신은 잔뜩 살찐 몸을 뒤뚱뒤뚱 놀려 누각 한 켠에 고이 모셔둔 황제의 초청장을 가져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값비싸기 그지없는 비단에 꽁꽁 싸인 나무패, 그게 황제의 초청장이었다.
초청장은 모두 여섯 개.
사신은 대사의 옆으로 허둥지둥 달려가 초청장을 바닥에 늘어놓았다.
남자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좋습니다 폐하. 여섯 자리군요. 전에는 그렇게 많은 보물을 준비했는데도 겨우 두 자리였는데."
- 응? 지금 무어라...?
"아니, 아닙니다 폐하."
남자가 씩 웃고는 허리를 숙여 초청장을 코트 품속에 집어넣었다.
이어서 두 손으로 단검을 대사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미천한 저를 이렇게 친히 알현하여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황성에서 뵐 때 폐하께 이것을 직접 드리겠사오니 조금만 기다려주소서."
대사가 커다란 혀를 날름거렸다.
- 아아, 탄신제가 열흘이나 남았다는 사실이 이토록 통탄스러울 수가 없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열흘이라도 빨리 태어날 걸 그랬어! 끄흐흐흐흐. 고맙소. 그대를 볼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겠소.
대사가 고개를 돌려 사신을 보았다.
- 너도 수고했다. 볼 일은 다 보았으니 이제 돌아와라.
"예... 예이."
사신이 머리를 조아렸다.
대사가 커다란 몸을 항아리 속에 욱여넣었다.
도대체 저 큰 놈이 어떻게 저 속에 들어있을 수 있었지?
이어서 안에 든 다른 뱀들이 나오려는 걸, 사신이 얼른 달려가 뚜껑을 덮어 막았다.
그때 남자가 끌끌 웃으며 말했다.
"황제께서는 예를 아시는데, 그 부하들이 이다지도 예에 밝지 못하다니 통탄스런 일이 아니냐."
생각지도 못한 수모에 부들부들 떨면서, 사신은 뱀 단지를 수습했다.
도대체 저놈이 저런 물건을 꺼내놓으리라고 어찌 생각했단 말인가?
"이번 일이 네놈의 오만함을 꺾는 데 큰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마. 썩 물러가라."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선선하게 말한 남자가 광장으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광장에서 오랑캐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와 상원 씨 대단해요! 어떻게 이걸 이렇게 한 번에."
"조상원! 조상원!"
사신은 환호를 받으며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남자를 오래 쳐다보다가 힘없이 명령을 내렸다.
"물러가자."
"물러가잡신다!"
소리꾼의 말에 맞추어 사절단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길엔 나팔이 울리지 않았다.
시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자, 시녀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사신의 손을 마구 할퀴고 물어뜯었다.
이 아이와도 함께한 세월이 일 년이 넘었는데.
아아, 많은 것을 잃어버린 행차였다.
* * *
그날 밤, 상원은 한강변에 서서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강변에 마물로부터 안전한 곳은 몇 군데 없었는데 상원이 있는 곳이 그중 하나였다.
상원은 수면을 향해 돌을 던졌다.
통, 통, 통.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물수제비가 떴다.
스물네 번째 시험도 쉬웠다.
대국의 황제 하상효가 그 무엇보다도 원하는 물건 '박피 단검'이 상원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상효는 그걸 원하는 건, 그게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상효는 그게 얼마나 귀한 물건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상원은 경전과 노트를 통해 이 모든 사실을 알았다.
스물다섯 번째 시험도, 세 번째 별도 문제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불신자 선생, 자네는 자네가 이 시험의 모든 것을 아는 것 같나?'
기계장치의 신이 했던 말이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게 있다고?'
상원은 돌을 하나 더 던졌다.
이번에는 물수제비가 마음처럼 그려지지 않았다.
상원은 앞으로 남은 계획을 그려보았다.
특별한 변수는 없었다.
이대로 일곱 별의 왕관을 완성하고, 이대로 승천해서 속죄하고, 그리고 승천자로서 이 게임에 참여해서 권좌에 오를 것이다.
그대로만 하면 된다.
'그런데 왜 이렇게....'
상원은 수면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때였다.
거짓말처럼 허공에서 돌이 멈췄다.
이어서 누군가 말했다.
"고민이 많군."
상원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사람을 보고 상원은 숨이 멎을 수밖에 없었다.
"흐읍...!"
터질 듯한 근육질의 거한이 상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과거의 상원 자신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