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화. 황제에게 바치는 조공 (2)
지존이신 황제의 칙령을 품은 사절단은 동쪽 하늘을 등지고 행군하고 있었다.
초여름의 후덥지근한 햇살이 등 뒤에서 치밀어왔고 이른 아침 이슬의 냄새가 무너진 세계의 도로에서 피어올랐다.
사신은 한껏 숨을 들이켰다가 기분이 불쾌해져 얼굴을 찡그렸다.
"쓰으으읍."
이건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오랑캐들의 냄새가 아닌가.
코가 더러워지는 것 같아, 사신은 옆구리에 붙어 있던 시녀의 목덜미에 얼른 코를 묻었다.
젊은 계집애의 진한 향수 냄새가 이세계의 악취를 깨끗하게 덮었다.
헐벗은 시녀가 꺄르르 웃으며 사신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잉, 간지럽사옵니다."
"허허, 간지럽느냐 이것아."
살찐 손으로 계집애의 봉곳한 젖퉁이를 움켜쥐자 계집애가 베시시 웃으며 꺅 하고 소리를 질렀다.
"흐흐, 귀여운 것."
"아잉, 저도 만져주셔요."
다른 쪽 옆구리에 붙어 있던 시녀가 사신의 가슴팍에 강아지처럼 머리를 부비며 말했다.
"흐, 흐흐흐. 그래 그래."
짙은 향수를 뿌린 계집 둘을 옆구리에 끼고, 사신은 나른한 향락 속으로 젖어 들었다.
그저 이렇게만 살면 좋을 것을.
그런데 저 멀리 피어오르는 불꽃 기둥을 보니 두 눈썹이 저절로 꿈틀거렸다.
"쓰읍."
그 불꽃이 황제의 칙령을 상기시켰다.
사신의 시선이 눈앞의 고급스런 탁자 위에 놓인 황금색 두루마리에 닿았다.
저것이 황제의 칙령이다.
이 계집애들은 알까?
이 칙령을 내린 자, 황좌에 앉아 이 제국을 움직이는 자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겉으로 보기엔 우둔한 곰처럼만 보일 뿐인 그 자가의 가슴 속에 어떤 야망이 꿈틀거리고 있는지.
모두가 흑천교주의 꼭두각시일 뿐이라고 여기는 그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그리고 저 칙서에 담긴 명령, 그것은 너무나도 대단한 것이었다.
'황제의 마음에 드는 공물을 준비하라. 그 공물이 마음에 들면 황제의 탄신제에 초대하겠다.'
막연하게 마음에 드는 선물을 준비하라는 명령은 언뜻 보기엔 밑도 끝도 없는 강짜였지만, 거기엔 황제의 의도가 숨어 있었다.
사실 공물은 핑계였고, 진짜 의도는 그 공물을 준비할 능력이 있는 절세고수를 찾는 것이었다.
그렇게 절세고수들을 찾아서 황성에 초청하고는, 그다음은....
그때 시녀 하나가 사신의 목덜미에 엉겨 붙으며 말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옵니까? 소녀 섭섭하옵니다."
"응, 아니다. 아니야."
사신이 생각을 떨쳐내듯 손을 휘휘 젓고는 계집애의 탐스럽게 살이 오른 궁둥이를 쓰다듬었다.
황제의 크나크신 계획이 나를 이끌고 있다.
그래, 공물.
공물이 중요하다.
고개를 흔든 사신이 앞쪽을 보았다.
번쩍거리는 금빛 갑옷을 두른 병력을 앞세운 사신단이 향하는 곳, 그곳에 하늘로 끝없이 솟아오르는 불기둥이 있었다.
그 불덩이를 보고 사신은 감탄했다.
"오오."
저토록 선명한 기의 흐름을 본 적이 있던가.
중원의 어디에서도, 중원의 바깥에서도, 저 정도로 강렬한 흐름을 본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필시 상당한 공물을 준비해 놨겠군.
거 먹음직스럽겠다.
사신은 심술궂은 도깨비처럼 끌끌 웃었다.
대오의 선두에는 황제가 직접 키운 중갑 기병들이 말을 몰고 있었고, 그 뒤로는 중장보병들이 행군하고 있었다.
발목에 쇳조각을 달아놓은 덕에 걸을 때마다 철컥거리는 소리가 위압적으로 울렸다.
그렇게, 황제의 병력은 걷는 것만으로 오랑캐들을 질리게 만들었다.
사신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중원의 그 내로라하는 무인들을 모조리 도륙해버렸던 병력이다.
네깟 오랑캐 놈들이 버틸 수가 있을까?
그러는 사이 불기둥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이윽고 사신단은 널따란 광장에 닿았다.
일부러 천천히 걸은 효과가 있는지, 광장에는 휘둥그런 눈을 한 군중들이 구름처럼 운집해 있었다.
그 많은 눈들이 자기를 올려다보고 있음에, 사신은 한껏 기분이 들떴다.
그 지엄하신 황제의 목소리가 내 손 안에 있다.
이제 칙령을 발할 시간이 됐다.
사신이 누각 곁에 서 있던 소리꾼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소리꾼이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가 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오랑캐들은 들으라! 이제 지존이신 황제의 말씀을 전하니 그 예를 갖추도록 하라!"
소리꾼의 목소리가 온 광장에 쩌렁쩌렁 메아리쳤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존이신 황제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거늘,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지는 않더라도 하다못해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는 것 아닌가?
소리꾼도 당황했는지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으... 응?"
'허어, 이럴 줄이야.'
사신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소리꾼이 다시 한번 외쳤다.
"오랑캐들은 예를 갖추라!"
역시나였다.
사신은 이제 됐다는 뜻으로 소리꾼에게 손짓을 했다.
그리고는 잔뜩 살이 쪄서 쉽게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일으켜 누각의 앞으로 걸어갔다.
뿌우, 하는 나팔 소리가 들리자 사신을 향해 일제히 몸을 돌린 병사들이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그래, 이것이 예지.
감히 황제의 말씀을 전하는데 무엄하게 서 있다니.
사신이 배를 잔뜩 내밀고 말했다.
"나는 지엄하신 황제의 말씀을 전하는 사신이다. 자고로 옛 성현들께서 이르시기를, 법도를 알지 못함에는 쇠붙이로 그 죄를 물음이 예에 어긋남이 아니라고 하셨다."
군중들이 휘둥그런 눈으로 사신을 바라보았다.
끌끌, 이 야만스런 놈들이 예를 모르니 화를 자처하는 것이다.
"군사는 이들에게 예의 지엄함을 보이도록 하라."
"존명."
사신의 말이 끝나자 무리에 있던 병사 하나가 칼을 뽑고는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병사가 뽑아낸 칼에 실린 검강이 어린 소녀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사신이 쾌감에 가득 찬 웃음을 지었다.
쩍 하는 소리가 광장에 퍼졌다.
그리고 둥그런 머리통이 하늘에서 굴렀다.
자고로 예의 지엄함을 보일 때는 아녀자의 목을 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은 법이다.
사신이 커다란 배를 푸들푸들 흔들며 웃었다.
"끌끌끌끌."
솟아올랐던 머리통이 뗑그렁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뗑그렁?
"어?"
사신은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웬걸, 바닥에서 구르는 머리통은 소녀가 아니라 병사였던 것이다.
그리고 소녀의 앞에는 백발을 흩날리는 검은 코트 차림의 남자가 새하얀 나뭇가지를 들고 있었다.
놈이 가지에 묻은 피를 바닥에 쫙 흩뿌리며 말했다.
"예를 모르는 건 네놈들이지. 여자애한테 다짜고짜 칼부림이라니."
그놈의 낮은 목소리에 순간 정신이 든 사신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무엄하... 이놈! 무엄하다! 감히! 지존이신 황제의 군대에게 칼을 빼다니! 네놈이 정녕 죽고 싶은 게로구나!"
잔뜩 흥분한 사신의 입에서 침거품이 주르르 흘렀다.
사신이 빼액 소리를 질렀다.
"공물이고 뭐고 다 소용없다! 여기 이놈들! 이놈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려라! 건물 하나하나 모두 불태우고! 개미 새끼 한 마리까지 다 죽여서! 여기에 이놈들이 살았다는 흔적을 없애버려라!"
사신은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지만 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흥."
놈은 콧방귀를 끼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사신의 곁에 다가온 시종들이 말했다.
"고놈 참 잘생기긴 했네."
"잘생겼으면 뭐 해, 정신이 나갔는데? 뻣뻣한 남자는 매력이 없어. 저놈 빨리 없애버려요."
그래, 더 볼 것도 없다.
"뭐 하는 거냐! 궁수! 궁수들은 화전을 준비하라!"
그때 놈이 손을 들었다.
"잠깐."
그 말 한마디에 광장의 수많은 군중들, 그리고 병사들까지도 고개를 돌려 놈을 쳐다보았다.
"그것이 황제의 온화함인가?"
"뭐? 뭐라고?"
"무릎을 꿇지 않았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의 목을 치려고 드는 게 황제의 온화함이냐고 물었다."
저놈이 지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뭐라는 게냐! 네놈이, 황제의 병사를 시해한 죄는 황제에게 칼을 빼든 것과 같다! 그런 놈들에게 온화라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리냐!"
놈이 사신의 말을 듣고는 픽 웃으며 말했다.
"내려와서 공물을 받아라."
"뭐?"
아니, 저놈이 지금 제정신인가?
존귀하신 황제의 이름값이 바닥에 떨어졌는데 고작 그깟 공물을 가지고 이 상황을 해결하겠다고?
"네놈이 미쳤구나! 그깟 공물이 무슨 대수란 말이냐! 여봐라! 궁수들은 화전을 준비하지 않고 무엇을 하느냐!"
그때였다.
"당췌 말이 통하질 않는군."
그 누구도 알아차릴 새가 없었다.
어느새 놈이 사신의 곁에 서 있던 것이다.
놈이 나뭇가지를 사신의 목덜미에 대고 말했다.
겉보기엔 그냥 나뭇가지였지만 그 안으로 강렬한 기가 흐르고 있는 걸 사신은 느낄 수 있었다.
놈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물을 받으라고 했다."
"흐... 흐으...."
목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이제 황제의 뒷배고 뭐고 없었다.
여기서 더 자존심을 부렸다간 목이 달아나버릴 판이었다.
"아... 알았다. 일단, 일단 이것부터 거둬라."
"말이 짧군."
"거... 거둬주십시오."
가지에서 순식간에 기가 빠져나갔다.
놈이 가지를 거두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사신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 허억, 허억."
사신은 손을 들려 누각을 노리고 있던 궁수들을 제지했다.
이대로 나가면 돌이킬 수 없다.
대국의 자존심이고 뭐고 목숨이 더 중요하다.
놈이 주저앉은 사신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는 품에서 단검을 하나 꺼내 사신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이것이 무엇인고?'
사신이 휘둥그런 눈으로 그걸 들여다보았다.
손바닥만 한 길이의 단검에는 칼날의 홈을 따라 새빨간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척 보아도 예사 물건은 아니었다.
"어... 으, 이게 무엇입니까?"
"'박피 단검'이라는 물건이지."
"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건...."
"이게 끝이다."
"예?"
사신은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싶어 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놈이 귀신 같은 얼굴로 사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놈이 냉랭하게 말했다.
"다시 말해줄까? 이게 끝이라고 했다. 어서 황성에 통을 넣어라. 물건의 가치를 판단해달라고."
꿀꺽, 사신이 침을 삼켰다.
이걸... 고작 이걸 공물이라고 받았다고 통을 넣으라고?
그랬다간 황제에게서 불벼락 같은 호령을 받게 될 건데?
그때 놈이 말했다.
"뭐하나. 어서 연통을 넣지 않고."
그래, 좋다.
나중에 불호령을 받더라도 일단 지금은 살아야 될 것 아닌가.
"뱀 단지... 뱀 단지를 가져와라."
"예? 예, 예."
깜짝 놀란 시녀들이 누각 한 구석에서 커다란 단지를 가져다 사신의 옆에 가져왔다.
"그... 래, 황성에 연통을 넣겠소. 물건... 물건을 주시오."
사신이 사내에게 넘겨받은 단검을 바닥에 놓고, 뱀 단지에서 뱀 몇 마리를 꺼내 단검 위에 던졌다.
새까만 독사들이 꾸물거리고 단검 위를 기어 다니며 황성으로 기별을 넣고 있었다.
'젠장, 위대하신 황제의 사절이...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고작 저거 하나 공물이라고 받아서 연통을 넣고 있는 꼴이라니... 아아, 도대체 무슨 얼굴로 황제를 본단 말인가?'
그때 뱀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뭐, 뭐야?"
사신이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흰머리의 사내는 뱀들의 움직임을 내려다보며 씩 웃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