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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130화 (130/230)

제130화. 황제에게 바치는 조공 (1)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저녁이었다.

그때 상원은 문혁과 창훈, 혜경과 함께 서울역 광장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혜경이 구운 빵으로 저녁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스크린에 나온 남자가 비단 두루마리를 쫙 펴고 읽기 시작했다.

"만물 중의 지존이신 황제의 탄신일이 스무날 앞으로 다가왔다. 이에 자애로우신 황제께서는 너희 오랑캐들에게도 우리 제국의 한없이 온화한 빛을 기꺼이 하사하겠다 하였으니, 너희는 의관을 정제하고 황제의 초청을 기다리도록 하라."

남자가 두루마리를 접었다.

창훈이 빵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저거 지금 자기 생일파티에 초대한다는 거죠?"

끄덕.

"그냥 그렇게 말하면 될 거 참 말 비비 꼬아서 하네요."

"수많은 황제들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이 세계의 황제라고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습니다."

문혁이 안경을 올려 쓰고 대답했다.

그때 스크린 속의 남자가 말했다.

"아, 너희 오랑캐들이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황제께서 너희에게 초청을 내리심을 약속하셨으니, 너희도 그에 상응하는 성의를 보여야 할 것이다. 그 정도의 법도는 아무리 너희 같은 오랑캐라도 알 것이라 믿는다. 열흘 뒤 너희가 묵는 빈처에 갈 것이니, 너희 오랑캐들은 의관을 정제하고 준비하도록 하라."

무표정한 얼굴로 냉랭하게 말한 남자가 일어서서 스크린 밖으로 사라졌다.

이어서 스크린이 꺼지고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24번째 시험 '황제에게 바치는 공물'을 시작합니다.]

[황제의 사신이 성역에 도착하기 전까지 황제에게 바칠 공물을 마련해야 합니다.]

[사신은 지금부터 열흘 뒤 성역에 도착합니다.]

[공물이 사신의 마음에 들면 연회에 초청받을 수 있습니다.]

[공물이 사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신은 그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사신 도착까지 남은 시각: 9일 23시간 59분]

메시지를 확인한 상원이 무심하게 시스템 창을 닫았다.

어떤 공물을 바치면 되는지 이미 알고 있는 상원에게, '황제에게 바치는 공물'은 그렇게 어려운 시험이 아니었다.

그리고 공물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상원은 손에 든 바게트 빵을 입으로 가져갔다.

바삭한 바게트 껍질이 입속에서 바삭 부서졌다.

하지만 다른 수험자들은 상원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런 힌트도 없이 다짜고짜 공물을 준비하라는 시험이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창훈이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 그러니까 이거 지금 황제라는 분이 생일파티를 하는데, 선물이 뭔지 봐서 초대하겠다. 그리고 선물이 마음에 안 들면 책임을 묻겠다? 이 말인가요?"

"맞습니다."

상원이 빵을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문혁이 말꼬리를 흐렸다.

"책임을 묻는다는 건."

"마음에 안 들면 공격하겠다는 얘기입니다."

혜경이 열을 내며 말했다.

"아니, 뭐 그딴 게 다 있어요? 자기가 뭐 좋아하는지는 하나도 알려 주지도 않고, 그래 놓고 준비해 둔 선물이 마음에 안 들면 공격하겠다고요? 뭐 그런...."

"승천 시험 자체가 그렇지 않습니까."

상원의 말에 혜경이 입을 닫았다.

문혁과 창훈도 굳은 얼굴로 상원을 보았다.

상원이 읊조리듯 말했다.

"우리가 이 시험에 든 것... 그것부터가 그냥 새하늘 주인의 마음대로 아니었습니까."

문혁이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고, 짜증 내는 얼굴로 욕하는 혜경의 어깨를 창훈이 다독였다.

"그 황제란 사람도 속이 아주 배배 꼬인 사람인가 보군요."

"그렇지요."

창훈의 말에 대답하며, 상원은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중원의 황제.

움직이는 것마저 쉽지 않아 보이는 커다란 덩치, 그리고 두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찐 얼굴에 오만과 탐욕이 그득그득 차 들어있던 남자.

성품이 잔혹하기로는 외신들마저도 혀를 내두를 정도라서 그를 조종했던 흑천교주 해원향마저도 경계하고 멀리했던 사람.

그런데 강하기는 또 더럽게 강해서, 수험자 몇십쯤은 손쉽게 도륙 냈었다.

그 얼굴을 생각하니 전생에 겪었던 곤혹이 스쳐 지나갔다.

불타는 대궐 한가운데 서서 수험자들을 찢어발기던 그 위용이 눈에 선했다.

상원이 혀를 찼다.

"쯧."

문혁이 말했다.

"흠, 어떤 게 그 황제란 자의 마음에 들지는 알 수가 없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일단은 최대한 값나가는 것들로 준비해 둔다. 그런 뒤에 사신의 판단을 기다린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겠군요."

상원이 문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혜경이 물었다.

"그런데 뭐가 그 사람들 마음에 드는지도 모른다면서요? 일단 비싼 거면 다 되는 거예요?"

"그렇지도 않지요."

상원이 대답했다.

창훈이 말했다.

"그렇다고 선물을 제대로 준비해 놓지 않으면 칼부림을 하겠다고요? 하, 세상에. 원래 이 시험판 자체가 더럽게 돌아가는 건 알았지만... 이건 너무한데요."

"어쩔 수 없지요."

상원이 바게트를 찢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오물, 오물.

잘 구운 빵에서 향긋한 곡물 냄새와 함께 단맛이 났다.

혜경이 말했다.

"상원 씨는 열 받지도 않아요? 이런 걸 보고 어떻게 그렇게 태평해요?"

상원이 빵을 먹다 말고 씩씩거리는 혜경을 보았다.

혜경의 반응이 너무나 인간적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시험을 치렀던 전생의 서울역 수험자들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시험판에 던져진 수험자들은 철저한 을이다.

제시되는 시험은 반드시 따라야 하는 목표이며, 수험자가 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은 이 시험판 전체를 관통하는 규율이다.

수험자들이 이렇게 시험에 의문을 가지고 대든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혜경이 말했다.

"왜요? 뭐 묻었어요?"

창훈이 혜경을 안으며 과장된 어투로 말했다.

"안 됩니다 상원 씨. 제가 상원 씨 참 좋아하긴 하지만 우리 아내는 안 됩니다."

"그치 여보? 내가 좀 한 예쁨 하지?"

"그럼 그럼."

문혁이 부부를 보며 어색하게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구 참, 저도 빨리 결혼해야지 안 되겠습니다 이거."

그 말에 창훈과 혜경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 뭐에요 문혁 씨? 진아 씨랑 벌써 거기까지 갔어요?"

"이 사람 봐 이 사람 봐. 공부랑 운동밖에 모르는 쑥맥인 줄 알았더니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어, 네? 어, 어, 아니, 그게...."

문혁이 허둥대는 사이 마실 걸 들고 온 진아가 돗자리에 앉았다.

"네? 왜 제 이름이 갑자기...."

"아? 그거 알았어요 진아 씨? 문혁 씨 곧 결혼한대요."

"네?"

혜경의 말에 반문하는 진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밑도 끝도 없는 농담에 반응하는 것 치곤 꽤 진지했다.

어?

어쩐지 이 사람들 자주 붙어 다니더니 설마 진짜로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됐나?

상원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진아를 보는데, 창훈이 빵 한 조각을 쭉 찢어 먹으며 말했다.

"그게요, 그 결혼한다는 상대가 글쎄...."

"그만요! 그만, 그만."

문혁이 창훈에게 달려들어 입을 막았고, 그 통에 돗자리 가운데 있던 빵 바구니가 뒤집어지며 빵들이 우루루 바닥에 쏟아졌다.

혜경이 깔깔 웃으며 핀잔 같지 않은 핀잔을 했다.

"뭐야, 문혁 씨. 이거 내가 얼마나 열심히 구웠는데, 이게 뭐예요."

"아 죄송합니다. 그게 저도 모르게 그만."

"어휴, 그러니까 조심해야죠. 사랑받는 남편이 되려면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다고요. 그렇지 않아요 진아 씨?"

"네?"

"아 좀!"

진아가 얼떨떨하게 말했고, 평소 짜증 내는 일이라곤 없는 문혁이 소리를 지르며 창훈을 쓰러뜨리듯 매달려 입을 막았다.

이게, 이게 어떻게 멸망한 세계의 분위기란 말인가.

깔깔대는 부부와 함께 상원도 웃었다.

"하하, 하하하."

이렇게 웃어본 게 언제였더라.

엄마가 죽기 전이었던 것 같다.

그게 몇 년 전이지.

삼십 년은 됐나.

그 긴 세월 동안 해보지 않았던 일이 있었다.

상원은 농담이라는 걸 해볼 생각을 했다.

상원이 빵을 턱 내려놓고 말했다.

"두 분 결혼하시면 사회는 제가 보겠습니다."

평소 농담이라고는 하지 않는 상원이 지나치게 진지하게 말해서 그랬을까?

다른 네 사람이 순간 얼빠진 얼굴로 상원을 보았다.

가장 먼저 대답한 건 진아였다.

"아, 무, 무슨...! 무슨 말씀이세요 그게?"

혜경이 얼빠진 얼굴로 말했다.

"야... 상원 씨 진짜 완전 로봇인 줄 알았는데. 공격력 장난 아니네요? 이렇게 훅 들어올 줄 몰랐네."

"그러게."

그리고 문혁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벌게져서 상원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상원이 덧붙였다.

"청첩장 나오면 꼭 주시고요."

진아는 허둥대고, 문혁은 뻐끔거리고, 부부는 깔깔대고 웃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상원도 웃었다.

이번 생은 특별했다.

상원에겐 이렇게 친한 동료들이 있었고, 지치면 돌아올 곳이 있었다.

이 행복을 지킬 것이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무력하게 잃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 * *

열흘은 빠르게 지났다.

공물을 준비하느라 분주했을 다른 성역들과는 달리, 서울역은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공물 준비는 자신에게 일임하라는 상원의 말 덕분이었다.

상원은 그들이라면 반드시 얻고 싶은 공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전생엔 그걸 손에 넣을 수 없었지만, 이번 생엔 그걸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그들이 서울역에 도착한 건 이른 아침이었다.

서울역 광장은 사신단을 구경하려는 수험자들로 꽉 차 있었다.

상원은 다른 수험자들과는 달리 서울역의 옥상, 명동으로 이어지는 길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먼저 뿌우우 하는 나팔 소리가 아직 서늘한 초여름 아침의 공기를 뚫고 널따란 서울역 광장에 울려 퍼졌다.

이어서 도로를 뒤덮고 서울역을 향해 행진하는 일군의 무리가 보였다.

저들이 바로 황제의 사절단이었다.

오와 열을 꽉 맞춘 대오는 사절단이라기보다는 군부대에 가까웠다.

대오의 맨 앞에는 번쩍거리는 금빛 무구로 중무장한 기병들이 행진하고 있었고, 뒤이어 커다란 깃발을 기수들과 보병들이 줄을 지어 따라왔다.

공물을 준비하지 않은 책임을 묻겠다는 건 저 병력으로 성역을 쓸어버리겠다는 뜻이었다.

규모가 작은 성역들은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병력이었다.

그렇게 중무장한 병력들의 뒤쪽에 사신이 있었다.

코끼리보다 훨씬 거대한 악어의 등 위에는 누각이라도 불러도 좋을 만큼 거대한 구조물이 올라가 있었다.

누각 가운데 앉아 교태를 부리는 시종들을 옆에 끼고 거만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늙은이, 그가 바로 사신이었다.

새까만 비단옷 차림의 사신은 연신 실실거리며 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사신단이 일 킬로미터 남짓을 오는 데 걸린 시간이 삼십 분.

그동안 서울역에는 나팔 소리 북소리와 함께 그 많은 병력들이 행진하며 내는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느린 동작으로 자기들의 높은 위상을 오랑캐들에게 각인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침내 사신단이 서울역 근처에 다다랐다.

"나도 슬슬 내려가 볼까."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편 상원이 광장을 향해 내려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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