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생명의 나무 (4)
배 나온 아저씨마냥 벤치에 철퍼덕 앉은 다람쥐가 말했다.
"잘 지냈어?"
상원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잘 지냈지요. 영감님은 어떠셨습니까?"
다람쥐가 에효 하고 한숨을 쉬었다.
"뭐, 그렇지. 늘 그래. 청소부는 맨날 뒤에 따라다니구 말이야. 조금만 방심하면 그냥 고깃덩어리가 돼버릴 것 같다니까."
다람쥐가 배를 슥슥 긁었다.
"나도 그렇지만, 자네 처지가 더 문제지. 얼마 전에 애꾸 까마귀 만났더구만."
상원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그거 어떻게 아셨죠? 차원의 틈새도 볼 수 있으십니까?"
"아니. 차원의 틈새를 들여다볼 수 있는 친구들은 정말 소수라고. 물론 나는 아니고."
"그럼 어떻게...?"
"나는 내가 만드는 모든 기계에 블랙박스를 달아."
그가 상원의 몸뚱어리를 가리키고 한쪽 눈을 찡끗했다.
상원이 살짝 빈정이 상해 비꼬듯이 물었다.
"그럼, 마음만 먹으면 제 일거수일투족을 다 볼 수 있는 겁니까?"
"뭐, 일단 기록 자체는 볼 수 있긴 있지. 그런데 그걸 다 볼 시간은 없어. 중요한 것만 체크하는 거지."
예상 못 했던 건 아니었지만,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상원은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깊숙이 기댔다.
다람쥐가 상원을 올려다보고 말했다.
"어쨌든 조심해. 일곱 별 모으는 거 안 그래도 힘들 건데 까마귀까지 따라다니면... 그거 장난 아냐."
쯧, 상원이 혀를 찼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획을 좀 수정해야 했지요."
다람쥐가 놀란 듯 물었다.
"그래? 계획 수정하면 되는 거야?"
"네."
상원의 단답에 다람쥐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렇다면 된다니 다행이네. 나는 그 몸에다가 뭐 다른 기능이라도 빨리 심어야 되는 거 아닌가 생각했거든. 그래서 짱구를 굴려 봤는데 안 되더라고. 아무래도 20레벨 될 때까지는 어려울 것 같아."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기계장치의 신이 뭔가를 더 챙겨주기를 바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어쩌랴.
청소부를 달고 다니는 처지에 이렇게 간간이 보러 오는 것만 해도 대단한 정성이었다.
그때 불현듯 의문이 스쳤다.
가지고 있는 그 방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분석해봐도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었던 그 문제.
상원이 눈으로 먼 곳을 더듬으면서 입을 열었다.
"영감님, 물어볼 게 있습니다."
"뭔데? 갑자기 그렇게 진지하게 그래?"
상원은 고개를 돌려 다람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제가 잘하는 게 영감님과 대체 무슨 관계입니까? 제가 잘한다고 영감님한테 득이 되는 게 있습니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가진 의문이었다.
승천자가 자신의 격을 올리는 방법은, 수호신으로서 시험에 참여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불신자인 자신을 도와줘서 어디에서 득을 보겠다는 걸까.
다람쥐가 피식 웃었다.
"수험자가 아닌 자네의 승천이라도 나에게 도움이 돼. 왜냐고? 간단하지. 난 시스템을 속일 수 있거든.”
상원은 얼이 빠져 그를 바라보았다.
시스템은 적어도 시험 안에서는 전능했다.
그는 단 한 번도 시스템이 틀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심지어 틀릴 수 있다고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그걸 속일 수 있다니.
“시스템을 속일 수 있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상원은 다급하게 물었다.
“물론 조건이 필요하지. 시스템을 아무 때나 속일 수 있다면 내가 왜 청소부를 피해 달아나고 있겠어?”
다람쥐는 꼬리를 흔들면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시스템은 내 기계와 수험자를 구분하지 못해.”
다람쥐는 코를 찡끗거리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상원은 다람쥐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어쨌든 영감은 상원이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게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거 참, 우리 불신자 선생이 이렇게 이해가 느린 것도 새롭구먼. 왜, 그런 가능성은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나 보지? 하기사 많이 알면 알수록 상상력의 폭은 줄어드는 측면이 있지. 여하튼 그래서 자네가 승천하면 나는 수험자를 승천시킨 셈이 되는 거야. 그것도 불신자를.”
다람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나는 다시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어딜, 말씀이십니까?”
“어디겠나.”
승천자가 오르는 곳.
승천자가 수험자를 승천시켜가며 애타게 바라는 곳.
저 위.
그건 하나밖에 없었다.
권좌다.
이 영감은 권좌에 오르고 싶은 거다.
그런데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뭔가 아주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만 같은 기분이 상원을 감쌌다.
상원은 미간을 찌푸리고 방금 영감이 한 말을 되짚어갔다.
그리고 이내 두 눈을 부릅떴다.
“방금, ‘다시’라고 하셨습니까?”
“호오, 그래도 아예 돌대가리는 아니구만.”
다람쥐가 풍성한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더니 앞발로 턱을 문질렀다.
명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뭔가 고민하고 있는 듯 했다.
“불신자 선생, 자네는 자네가 이 시험의 모든 것을 아는 것 같나?”
상원은 당황했다.
두어 번 입을 열었다가 그대로 닫았다.
시험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에 자존심이 상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상원은 이 시험의 모든 것을 알았다.
첫 시험부터 마지막 시험까지, 그 모든 것이 경전과 노트에 담겨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영감은, 마치 상원이 뭔가 중요한 것을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은가.
'모른다고? 내가? 조상원이?'
다람쥐가 고개를 모로 눕혀 상원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혼란에 빠진 그를 보다 잘 감상하려는 것 같았다.
“가볍게 시작해볼까. 이를테면 이런 주제는 어떤가, 선대 절대자.”
“‘선대’ 절대자라뇨. 절대자가 교체된 적이 있습니까?”
상원은 지금 자신이 듣고 있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노트 어디에도, 절대자가 교체된다는 말은 없었다.
상원이 아는 절대자는 마치 북극성과 같은 것이었다.
다른 모든 것이 뜨고 져도, 항상 그 자리에 붙박여 있는 별, 이 시험의 정점.
“한 번뿐이겠나. 여러 번 바뀌었지. 그리고 자네는 한 명 직접 만나도 봤지.”
“제가 선대 절대자를 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만 제가 만난 승천자라고는.”
경악이 점차 상원의 얼굴에 번져나갔다.
자신이 본체를 본 승천자는....
“당신이군요.”
그가 샐쭉 웃었다.
“빙고.”
다람쥐의 주둥이가 요상하게 찢어졌다. 비웃는 것 같기도, 미소를 짓는 것 같기도, 조금은 슬픈 것 같기도 했다.
“그, 그럼, 선대 절대자는, 당신은, 어떻게 된 겁니까?”
“새로운 절대자가 나타나면 선대 절대자는....”
그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상원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보는 것 같았다.
“버려지지.”
그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상원은 묻지 않고 그가 더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선대 절대자는 권좌에서 내려와서 도로 일개 승천자가 된다네. 일개 승천자만도 못하지, 시험에 참여할 수가 없으니까.”
시험에 참여할 수 없는 승천자.
상원은 조용히 그 말을 다시 한번 입에서 굴려보았다.
“위업을 쌓을 일도, 무언가를 성취할 일도, 강해질 일도 없이 그저 오래도록 존재하는 걸세. 시간의 흐름을 잊고, 변화하지 않고, 투쟁하지 않으면서. 그 피에 굶주린 놈들이 말야. 세간에서는 그걸 영원이라고 부르고 추앙하지. 거대한 위업을 세우고 왕좌에서 고분고분하게 물러나 유물로 남은 그것들을 말야. 끝내는 자기가 무엇이었는지, 살아있는지도 잊고 마는 그 껍데기들을.”
상원은 털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곧 튀어 나갈 것처럼 허벅다리가 팽팽해졌고, 뒷덜미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를 안 이래 처음으로, 상원은 그가 무서웠다.
그는 똑같은 자리에 앉아서, 똑같은 어조로, 똑같은 크기로 말을 하고 있었지만 상원은 알 수 있었다.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살갗을 저릿저릿하게 만드는 힘이 상원을 내리눌렀다.
상원이 숨을 삼키는 순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상원이 알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목구멍을 한껏 긁어서 상한 성대로 말하는 것 같은, 조금은 녹슨 기계장치가 돌아가는 것 같은 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아닐세.”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마치 수십 명의 사람들이 상원 주변을 둘러싸고 동시에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상원은 놀라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이제 승천자는 상원을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버려지지 않아. 나는, 돌아갈걸세. 다시 위업을 쌓아, 그 권좌로, 돌아갈 거야.”
목소리는 이제 너무 커져서 상원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몸을 웅크렸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어디선가 삐이-하는 사이렌 소리가 들렸고,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다람쥐는 처음 말을 시작했을 때처럼, 조용히 앉아 먼 곳을 그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일시에 모든 압박감이 사라졌다. 사방이 고요했다.
상원은 느리게, 조심스럽게 귀에서 손을 뗐다. 평화로운 산들바람만 귓가에 스쳤다.
다람쥐가 까만 눈을 도로록 굴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잘 좀 해봐. 자네도 실패하면, 나도 내가 어떻게 할지 모르겠거든.”
가볍고,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그러나 거기에 속아 넘어갈 정도로 상원이 멍청하지는 않았다.
“자네는 승천하고, 나는 권좌에 올라가고, 누이 좋고 형부도 좋지 않은가. 응? 그게 아닌가?”
다람쥐가 상원의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더니 폴짝하고 벤치에서 뛰어내렸다.
“그래, 이만 인사하자고. 원래 만남은 아쉬울 때 헤어지는 게 최고 아니겠나.”
상원이 뭐라 말 붙일 새도 없이 그는 네발로 풀숲 사이로 종종거리며 뛰어갔다.
그러다 이내 멈칫하더니, 뒤로 돌아 상원을 보았다.
“아 맞다, 그거 말해주려고 왔는데 까먹었구만. 거 시계 있잖아 모래시계.”
상원은 자신의 가슴께를 쥐며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이 썼어. 다음번이 마지막일 거야.”
“예?”
“그러게 좀 작작 쓰지 그랬나? 에잉, 거 그래도 절대자 하시던 양반이 만든 거라 꽤 튼튼한데, 참 아쉽구먼 아쉬워.”
다람쥐는 혀를 끌끌 차더니 다시금 네 발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상원은 말문이 막힌 채로 뛸 때마다 펄럭거리는 다람쥐의 꼬리를 바라보았다.
다람쥐는 곧 사라졌다.
화창한 풀밭과 벤치, 가장 든든했던 보험이 이제 곧 사라질 것이라는 소식과, 사실 저가 이 시험에서 중요한 것들은 하나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그와 함께 남았다.
날씨는 야속하리만치 좋았다.
* * *
그래, 정말 중요한 건 하나도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찝찝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렀고, 어느새 스물네 번째 시험이 선포되는 순간이 왔다.
중국풍 옷차림을 한 남자가 스크린에 나타난 것이다.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을 한 남자가 말했다.
"흠흠, 위대하신 황제의 칙령을 발표한다."
서울역의 수험자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스크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새로운 시험이 또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