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생명의 나무 (3)
뱀 단지들이 격렬하게 흔들리다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터져나갔다.
도자기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이어서 단지 안에 들어있던 새까만 독사들이 꾸물거리며 해원향 쪽으로 기어 오기 시작했다.
그 많은 뱀 단지에 들어있던 독사들이 한 번에 쏟아지니 그 넓은 기도실의 바닥을 모조리 뒤덮을 정도였다.
독사들이 꾸물럭 꾸물럭 움직이며 쉭쉭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가득 채웠다.
웅크리고 엎드린 해원향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토록 강렬한 압박이라니, 도대체 흑천께서 어떤 계시를 내리려는 것인가?
기도실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한참 흔들리더니 곧 진동이 멎었다.
사위가 지나치게 고요했다.
실금을 한 탓에 아랫도리가 축축했다.
해원향은 고개를 들었다가 자기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흡!"
그 수많은 독사들이 모조리, 허옇게 배를 까뒤집고 죽어 있었다.
해원향은 천천히 기도실을 둘러보았다.
모든 뱀 단지가 깨져 있었고, 모든 뱀이 죽어 있었다.
그리고 해원향은 깨달았다.
죽은 뱀들이 글자를 이루고 있다는 걸.
"아."
지금껏 내려졌던 그 어떤 계시보다 장엄한 계시였다.
해원향은 무릎을 꿇고 기어 다니며 계시를 읽기 시작했다.
어떤 글자는 너무 커서 멀찍이 떨어져서 보아야 했고, 또 어떤 글자는 너무 작아서 땅에 코를 박듯 가까이서 보아야 했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동안 뱀들이 토한 체액이 해원향의 무릎을 적셨다.
그리하여 마침내, 해원향은 그 넓은 기도실을 빼곡히 채우고 있던 글자들을 모두 읽었다.
그러고 나서 해원향은 조용히 주저앉아 입을 벌렸다.
"아아."
계시는 짧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기도실에 있는 모든 뱀의 목숨을 앗아가야 할 만큼 무거웠다.
해원향은 계시를 읊조려보았다.
"끝... 이, 왔다."
끝이 왔다.
흑천의 가르침을 받들기 시작한 지 일백 하고 오십 년, 드디어 존귀하신 흑천께서 끝을 말씀하셨다.
해원향은 고개를 들어 햇살이 들어오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알겠나이다, 알겠나이다. 그대의 뜻대로 하소서 흑천이시여."
해원향의 눈가에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 * *
며칠 뒤 이른 저녁, 상원은 만웅과 함께 강상중의 집무실 앞에 서 있었다.
원목으로 된 커다란 집무실 문은 앞에 선 이를 압도하는 성문처럼 보였다.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겠지.
문의 규모부터가, 찾아오는 자를 심리적으로 꺾으려는 강상중의 계산인 것이었다.
물론 그건 상원에겐 해당되지 않는 얘기였다.
만웅이 말했다.
"회장님, 들어갑니다."
상원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당겼다.
꿈쩍도 하지 않을 것만 같던 문이 손쉽게 열렸다.
세 면이 커다란 통유리로 된 집무실 안, 강상중은 등을 돌린 채로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 강상중의 집무실을 찾아왔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상원은 상중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바닥에 깔린 푹신한 카펫 덕에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상원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상중의 곁에 섰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여의도에서 자라났던 세계수는 활동을 멈추고 완전한 고목이 되어 있었다.
이파리가 하도 무성해서 버섯구름처럼 보였던 나무는 이제 가지가 앙상했다.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고 서울 시내에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서울 시내 곳곳에서 성화가 쏘아내는 분홍색 빛줄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 사이 사이로 빛이 들어온 건물들이 보였다.
성화에서 전기를 얻는 법을 발견한 드워프들의 솜씨였다.
멸망 전에 비할 바는 전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람이 사는 도시처럼은 보였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던 전생의 서울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상중이 말했다.
"고맙소."
상원이 고개를 돌려 상중을 내려다보았다.
늙은 그의 옆얼굴이 꽤 단단해 보였다.
"뭐가 말입니까?"
"서울을 지켜준 것 말이오."
상중의 대답에 상원이 피식 웃었다.
'서울을 지켜줘서 고맙다'라.
'서울 육마귀' 중 최악의 존재였던 강상중이 서울에 대해 그런 애착을 가졌을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회장님이 힘써 주신 덕분이지요. 회장님께서 남서쪽을 막아주신 덕에 세계수가 씨앗을 퍼뜨리지 않은 채로 21번 시험을 끝낼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래, 그렇지."
껄껄 웃은 강상중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
"서울은 내 평생의 꿈을 펼쳐 온 곳이오. 아주 소중하지."
그렇게 말하는 강상중의 눈빛이 아득했다.
상원은 살짝의 장난기를 섞어 말했다.
"그래서 21번 시험 때, 여의도의 남서쪽을 막아주셨군요. 아무런 조건 없이."
그 말에 상중이 고개를 돌려 상원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당혹스러운 감정이 스쳤다.
"허? 무슨 소리요...?"
분명히 '생체금속 크리스탈'이라는 물건을 부탁했었는데, 이게 무슨 소리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강상중이 이런 표정을 짓는 걸 볼 줄이야.
상원은 피식 웃고는 지갑에서 준비해 둔 물건을 꺼냈다.
매끈한 회색 금속으로 된 주먹만 한 정팔면체였는데, 꼭짓점마다 붙은 작은 보석이 형광색으로 깜빡였다.
상원이 그걸 상중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회장님. 생체금속 크리스탈."
"허, 허허허."
상중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크리스탈을 받았다.
"깜짝 놀랐지 뭐요. 신의가 있는 분이신 줄 알았는데 그런 식으로 말씀을 하시니."
"이런 거 하나 갖다 드리는 걸 가지고 조건이라고 하지는 않지요. 건물 한 채를 오백 원에 판다, 보통은 그런 걸 기부라고 하지 거래라고 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상원의 대답에 상중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상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원의 눈에는 보였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구한 거지?
그건 분명한 생체금속 크리스탈 진품이었다.
그런데 이걸, 저런 식으로 말할 정도로 쉽게 구했다고?
"이걸... 어떻게 구하셨소?"
상원이 피식 웃으며 팔짱을 끼었다.
"영업비밀입니다."
"허어."
생체금속 크리스탈은 상중의 힘을 극한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그래서 수호신이 그걸 반드시 구해야 한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어떤 상인도 그걸 팔지 않았고, 그 어떤 마물도 그걸 주지 않았다.
강상중은 그 엄청난 정보력으로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보았겠지만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생체금속 크리스탈'은 열두 개의 아이템을 조합해야만 나오는 물건이었는데, 그 조합식을 아무나 알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고작해야 영령인 '마천루 건설자'가 알 수 있는 조합식이 아니었다.
전생의 강상중도 시험에서 탈락하는 그 순간까지 저 아이템을 손에 넣지 못했다.
반면, 노트에서 조합식을 보았던 상원은 너무나도 손쉽게 크리스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상중이 크리스탈을 보며 말했다.
"그래요, 어쨌든... 대단하군."
상원은 알 수 있었다.
상중의 눈은 크리스탈을 보고 있었지만, 그의 온 신경은 상원에게 쏠려 있다는 걸.
상중은 자신과 상원 사이의 아득한 격차를 피부로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생체금속 크리스탈'을 통해 성령급으로 힘을 끌어올린다고 해도, 절대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
상중이 입술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언제 얼굴을 굳혔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상원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고맙소, 조상원 선생. 협조할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시오."
상원도 웃으며 상중의 손을 잡았다.
"네, 회장님."
상원의 손을 잡은 상중의 눈매가 유순했다.
물론 상원은 그 눈매가 상중의 실제 성격을 대변해주지는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강상중은 그가 쌓아왔던 마천루들만큼이나 높은 자존심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 자존심을 거짓말처럼 꺾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유연함이 이 사람을 이 자리까지 데려왔을 것이다.
상원이 말했다.
"회장님의 도움이 필요한 때가 오면, 만웅이를 통해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리하시지요. 어려워 마시고 언제든지 연락 주시오."
상원이 돌아서서 방 밖으로 걸어가는데, 상중이 상원의 곁에서 같이 걸었다.
배웅을 하는 건가?
이 사람이?
문 앞에 서자 상중이 직접 문을 열었다.
상원이 문을 나서며 말했다.
"굳이 배웅해주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회장님."
"그래, 알겠소. 멀리는 나가지 않으리다."
문손잡이를 잡은 상중이 덧붙였다.
"하시는 일 잘 되기를 바라오."
상원은 끄덕임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문이 닫혔다.
문밖에 서 있던 만웅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회장님이 문까지 오시다니,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세상 이 꼴 나고 나서는 처음인 것 같은데."
상원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냐."
"예, 그렇수다 형님."
상원은 만웅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지갑에서 새까만 소라껍질을 꺼내 만웅에게 내밀었다.
"받아라."
만웅이 받으며 말했다.
"어... 이거, 전음 소라기. 고치셨구만요 형님."
"그래, 필요한 일 있으면 연락하마. 그전에는 회장님 잘 모시고 있어라."
"네, 네."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는데 만웅이 함께 걸으며 물었다.
"별일 없으시지요 형님? 아픈 덴 없으시죠?"
"없다."
꼭대기 층에 대기하고 있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뒤를 돌아보니 만웅이 아쉬운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간다."
"예 형님."
상원은 조금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몸 조심해라."
살짝 놀란 만웅의 얼굴 위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또 꽤 오래도록 보지 못할 얼굴이었다.
* * *
상원은 서울역 광장의 벤치에 앉아 상태창을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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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체 관리 시스템]
접근이 허가된 정보만 표시됩니다.
레벨 14 (21%)
성능: 괴력 65, 용력 75, 술력 65
스킬: 요새 수호자의 시선(3), 하늘의 불씨(3), 지하의 문(2), 동굴적 감각, 원혼 군주의 절규, 좀비 소환 (더 보기) (복구 중)
모래시계 충전 시간: 1분 48초
강신회로: 태초의 대족장
달성 업적: 네번째 문의 봉인자, 신성제국의 구원자
일곱 별의 왕관 진척도: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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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망을 잡고 얻은 경험치가 상당한 덕에 레벨은 어느새 14까지 올라 있었다.
스킬 메모리에는 수많은 스킬들이 복구돼 있었지만 아직도 복구가 끝나지 않았는지 복구 중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상원은 지난번 수복실에 있는 동안 기계장치의 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다음 기능을 탑재하려면 20레벨은 돼야 한다.'
20레벨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추세라면 네 번째 별에 도달하기 전 새 기능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기능이 뭔진 모르겠지만, 지금 계산보다 훨씬 쉽게 네 번째 별을 얻을 수 있겠지.
그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야 불신자 선생."
고개를 돌리니, 다람쥐 하나가 벤치 끝에 앉아 상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람쥐의 등에 박힌 커다란 태엽이 빙글빙글 돌았다.
상원에게 '신화의 몸'을 선물해준 승천자, '기계장치의 신'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