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생명의 나무 (2)
지하 공방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드워프들과 수험자들이 부산스레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는 모습은 여전했다.
상원은 수많은 작업대와 화로들을 가로질러 공방의 중앙으로 향했다.
거기엔 다른 작업대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작업대가 있었고, 거기 매달리듯 앉아 바쁘게 두 손을 놀리는 드워프가 있었다.
'에론 클라드'였다.
상원이 작업대 곁에 서서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에론."
상원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에론은 변함없이 눈이 튀어나올 듯한 표정으로 두 손을 바쁘게 놀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설계도 같은 걸 그리고 있었다.
여기서 뭘 설계할 게 더 있나?
아니, 작업을 쉬면 에론 클라드가 아니지.
참 여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상원은 주먹을 쥐어 책상을 똑똑 두드렸다.
"헛!"
화들짝 놀라며 상체를 세운 에론이 상원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빠진 듯한 표정은 곧 환한 함박웃음으로 바뀌었다.
커다란 의자에서 뛰어내려 상원에게 달려온 에론이 상원의 두 손을 포개 잡았다.
"세상에, 돌아오셨군요 용사님!"
"네, 무탈히 돌아왔습니다."
에론은 잠깐 울음기 섞인 얼굴로 상원을 올려다보았다.
"보고 싶었습니다."
"저도 보고 싶었어요."
"하하, 참."
슬며시 눈가를 닦은 에론이 말했다.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먼저 공방 확장 상황부터 말씀드릴게요. 21번 시험 시작하게 전에 오셨던 게 마지막이었죠?"
그래, 21번 시험.
차원문의 목적지를 바꾸는 '도약계 변형장치' 제작을 주문하러 왔던 게 마지막이었다.
"네, 그랬었죠."
에론이 공방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그사이에 새로 만든 것들이 많아요. 들으시면 아마 깜짝 놀라실 거예요. 우선 저쪽에 아다만티움 작업용 화로 세 개를 추가로 설치했어요. 무기와 주괴의 생산 효율성이 20% 정도 올랐어요. 그리고...."
에론이 신나서 말을 이었다.
상원은 생각했다.
'이 사람은 여전하구나.'
신나서 한참 말하던 에론이 상원을 보고 물었다.
"아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빨리도 물어보는군.
상원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격리실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두 눈을 크게 뜬 에론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격리실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거기서만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있으니까요."
"아, 그렇군요. 네, 네. 이쪽으로 오셔요 용사님."
에론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시뻘건 불길을 내뿜는 용광로들과 드워프들이 한참 작업 중인 모루들을 지나, 에론은 공방 구석에 있는 방에 다다랐다.
열 평 정도 될 듯한 방 안에는 불이 꺼진 작업대와 망치며 정 같은 갖가지 작업 도구들이 늘어서 있었다.
락스 비슷한 냄새가 방 밖까지 풍겨져 나왔다.
여기가 바로 특별한 작업을 할 때 쓰는 격리실이었다.
에론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만든 지 얼마 안 된 시설이라 약품 냄새가 아직 덜 빠졌어요."
상원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격리는 확실히 되는 거죠?"
"네. 독가스를 풀어도 괜찮습니다."
에론의 대답이 자신만만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차폐 수위를 최대한으로 올려 주세요."
상원의 말에 에론이 벙찐 얼굴로 물었다.
"어... 네? 용사님, 뭘 하시려는 건데요?"
"독가스를 풀 겁니다. 하늘악어의 마취 가스 같은 건 상대도 안 되게 센 걸로요."
에론이 넋 나간 얼굴로 상원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아니, 독가스를 풀어도 괜찮은 건 맞는... 에? 아니. 저 안에서 독가스를 푼다고요? 용사님, 그... 제정신... 으로 하는 말이 맞지요?"
"그럼요. 걱정 마세요, 저는 아무 이상 없으니까. 설마 저한테까지 위험한 걸 하겠다고 할까요?"
"네... 네. 용사님 말씀이니까 믿기는 합니다만...."
에론의 반응도 이해는 됐다.
격리실은 안과 밖을 완벽하게 분리해주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독가스를 푼다니 제정신인 걸까?
물론 상원은 아주 제정신이었다.
그리고 지금 할 작업은 반드시 격리실에서 진행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서울역의 수험자들이 모조리 몰살당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 얘기는 굳이 에론에게 하지 않았다.
"걱정 마세요 에론. 무사히 나올 테니까."
에론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격리 작업실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불현듯 생각나는 한 가지가 있었다.
"아, 에론. 방호복을 준비해주세요."
"아, 네, 네. 그래도 방호복은 있으셔야겠죠?"
"그럼요."
멀쩡한 옷을 날려 먹을 수는 없었으니까.
* * *
방호복으로 갈아입은 상원이 작업실문을 닫았다.
상원은 작업실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널따란 작업대엔 정이며 끌에 비커 같은 수많은 도구들이 널려 있었다.
벽에 달린 실린더 안에서는 투명한 액체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는데, 바로 공기 정화 필터였다.
'완벽하군.'
작업실엔 '박피 단검'을 만들기 위한 모든 재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상원은 머릿속으로 작업 순서를 되뇌었다.
어려운 건 없었다.
'좋아, 시작하자.'
작업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상원이 지갑에서 '구두망의 내단'을 꺼냈다.
영롱한 에메랄드빛 구슬이 묵직했다.
구슬을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상원은 하도 커서 바가지에 가까운 비커를 몸 앞으로 가져왔다.
이어서 상원은 무지막지한 악력으로 구두망의 내단을 쥐어짜듯 움켜쥐었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내단 표면에 금이 갔다.
승천 시험을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귀한 물건이, 상원의 손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하지만 상원은 그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이걸 부수지 않으면 승천은 꿈도 꿀 수 없으니까.
이어서 내단 안에 들어있던 비취색 액체가 비커 안으로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취색 액체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지만, 보기와는 달리 한 방울로도 서울역의 모든 승천자를 탈락시킬 수 있는 맹독 중의 맹독이었다.
아무리 독에 능통한 수험자라 할지라도 이 맹독을 이런 식으로 다룰 수는 없었다.
상원이 구두망의 내단을 이런 식으로 다룰 수 있는 건 상원에겐 구두망의 독 자체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독액이 비커 바닥에 흥건하게 고였고 내단의 부서진 표면이 그 위로 툭툭 떨어졌다.
이어서 상원은 지갑에서 귀물 '벙어리 여인의 은장도'를 꺼냈다.
벙어리 여인의 한 서린 원혼이 깃들었다는 전승을 가진 이 손바닥만 한 은장도는, 마력을 불어넣으면 어검술을 부리듯 조종할 수 있는 물건이었기에 귀물치고는 상당히 값이 나가는 편이었다.
상원은 비커와 은장도를 모루 위에 올려놓고는 비커에서 독액을 한 움큼 퍼서 은장도 위에 뿌렸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독액이 닿은 곳이 시꺼멓게 부식되었다.
이어서 집게로 은장도 손잡이를 집어 시뻘건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 속에 집어넣었다.
잠시 후 은장도를 꺼내 보니 부식된 흔적은 온데간데 없고, 얇은 녹색 막이 은장도를 둘러싸고 있었다.
또 한 번, 상원은 독액을 집어 은장도에 뿌리고 집게로 용광로에 집어넣었다.
다시, 그리고 다시.
그럴수록 은장도 표면의 막은 점차 짙은 녹색을 띠었다.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기를 몇십 번, 마침내 은장도의 녹색 표면에 뱀비늘 모양의 금이 갔다.
"좋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상원은 비커에 담긴 독액 속에 은장도를 던져 넣었다.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비취색 독액이 은장도를 삼켰다.
조금 후 보글보글 기포가 올라오면서 허연 연기와 함께 지독한 뱀 비린내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기포가 점점 강해지더니, 독액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팟 하고 비커 바깥으로 독액이 튀었다.
그리고 한순간, 비취색 독액이 피처럼 새빨갛게 변했다.
이제 막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온 신선한 피 같았다.
그와 동시에 작업실의 전등이 격렬하게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전등이 반짝거릴 때마다 벽을 타고 시뻘건 피가 왈칵 왈칵 흘러내리는 게 마치 벽이 피를 흘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난데없이 뱀이 쉭쉭거리는 소리가 났다.
쉬이이이익!
전등이 점멸하는 간격이 점차 짧아지면서 홍수라도 난 것처럼 피가 바닥에 고이기 시작했다.
피비린내와 뱀 비린내가 코를 가득 메웠다.
전등이 깜빡이는 와중에 그 어둠 속에서 커다란 뱀의 눈동자가 얼핏 보인 것도 같았다.
뱀이 단말마를 질렀다.
샤아아아악!
지독한 독기와 흘러넘치는 피.
그러다 갑자기, 모든 것이 끝났다.
전구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벽을 타고 흘렀던 피는 온데간데 없었고, 작업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졌다.
용광로의 불꽃이 조용히 이글거리고 있었다.
비커 안에는 독액은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은장도 한 자루가 남아 있었다.
상원은 은장도를 들어 칼날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칼날의 섬세한 물결무늬를 따라 시뻘건 빛이 흐르고 있었다.
상원은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마력을 살짝 불어넣어 보았다.
칼날에서부터 10cm 남짓 새빨간 검기가 솟아올랐다.
검기는 겉으로 보기엔 유려하고 깔끔했지만, 그 안으로 무시무시한 독기가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걸 상원은 알고 있었다.
은장도가 어서 상원의 손을 벗어나 날아가고 싶은지 격렬하게 떨었다.
'성공이다.'
상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구두망의 내단'과 '벙어리 여인의 은장도'를 합성하는 작업이 성공한 것이다.
상원이 단검을 보고 말했다.
"'박피 단검', 이렇게 생긴 물건이었군."
등급조차 부여되지 않은 은장도, 노트에는 그 이름이 '박피 단검'이라 쓰여 있었다.
이것이 바로 흑천교주 해원향의 숨통을 끊을 칼이었다.
* * *
그 시각, 중원의 중심부.
거대한 도시의 한가운데를 차지한 화려한 황성 위로 나무가 자라나고 있었다.
황성의 바깥에서부터 자라난 여러 갈래의 줄기는 황성 위에서 하나로 합쳐져서 하늘을 향해 끝도 없이 자라났다.
굵은 줄기의 윗부분에서는 수없는 가지들이 사방으로 뻗어나갔고, 그 빽빽한 가지들이 얽히고설키며 미로처럼 복잡한 공간을 만들었다.
그 공간의 가운데 해원향이 흑천의 말씀을 듣는 기도실이 있었다.
기도실은 널따란 동굴처럼 생긴 방이었는데 천장으로는 햇살이 들어와 너른 방안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둥그런 방의 가장자리를 따라 사람 하나가 통째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항아리들이 늘어서 있었다.
해원향은 기도실의 가운데 앉아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뱀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많은 뱀들이 느릿느릿 기어 다니면서 서로 뭉쳤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는데, 뭉친 모양이 계속 바뀌었다.
해원향은 그 순간마다 나타나는 문자들을 놓치지 않았다.
그 문자들을 빠짐없이 기억했다가, 마치 갑골문을 읽는 제사장처럼 조심스럽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찾아갔다.
해원향이 중얼거렸다.
"구두망이... 죽었다."
해원향이 피식 웃었다.
"못난 노인네."
제자에 대한 열등감에 짓눌려 버둥거리다 저 홀로 마선이 되겠다고 성채에 칩거해버린 못난이.
모든 정이 다 떨어진 줄 알았는데, 막상 부고를 들으니 마음 한구석이 착잡했다.
한때나마 그의 스승이었던 사람 아닌가.
해원향은 잠시,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그녀의 스승이 좋은 곳으로 가기를 빌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놈인가.'
흑천께서 계시를 통해 보여주었던, 흰 머리의 남자.
직접 상대해보니 절대 구두망의 상대가 되지 않을 자였지만, 어쩐지 그자라면 구두망의 숨통을 끊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부서진 광야에서 놈을 만났던 순간이 자연스레 생각났다.
밤의 이빨이 박혔던 곳들이 욱신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그 느낌이 짜릿했다.
'그놈... 산 채로 삼키면, 맛있겠다.'
꿀꺽, 해원향이 침을 삼켰다.
지금껏 무림의 수많은 절세고수들을 집어삼켜 왔지만 그놈만큼 매력적인 놈은 없었다.
그때였다.
무거운 기운이 온 몸을 짓눌렀다.
갑작스러운 압박감에 해원향이 신음을 흘렸다.
"으윽!"
이건 필시 흑천의 새로운 계시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계시가 해원향을 짓누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