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생명의 나무 (1)
덥고 습한 여름 바람에 머리칼이 흩날렸다.
서울의 높은 스카이라인 위로 빨갛게 노을이 지고 있었다.
밤의 가장자리로 익숙한 별들이 떴다.
여기가 상원의 근거지, 성역 서울역이었다.
실로 오랜만의 귀환이었다.
부서진 광야에서 밤의 가면을 얻고, 피를 먹는 세계수 안에서 흑풍회의 성채로 가는 차원문을 탔다가, 차원문 안에서 몇 날 며칠을 지내고, 흑풍회의 성채에서 바빌론 길드와 함께 흑풍회장 구두망을 상대했다.
그 사이 서울역은 완연한 여름을 맞이하고 있었다.
매미가 우는 소리가 들렸고, 광장 한 편 분수대에선 젊은 수험자들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분수대?'
아아, 드워프들이 저것도 고쳤군.
성역에 분수라니.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조합이었는데, 막상 보니 그 모습이 썩 나쁘지 않았다.
성화를 등지고 선 상원 앞으로 젊은 수험자 둘이 깔깔거리며 지나갔다.
"그래서 내가 스킬을 써가지고 3급 머리통을 빡! 쪼갰다니까?"
"야, 웃기지 마. 니가 어떻게 3급을 혼자 잡아?"
허풍을 떠는 남자에게 여자가 핀잔을 주었다.
등에 멘 무기만 아니었다면 평범한 대학생이라고 해도 좋을 모양새였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꼭 맞잡고 있었다.
'연인인가?'
상원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 아포칼립스에 저토록 여유로운 모습이라니.
어색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서울역이 이렇게 평화롭다는 건, 서울역의 지도부가 일을 아주 잘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상원이 며칠 동안 자리를 비워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만큼.
그렇게 애써주고 있는 그 사람들이, 상원은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아마 중앙지휘본부에 모여 있겠지.'
상원은 중앙지휘본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상원은 중앙지휘본부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커다란 책상과 회의 테이블, 전술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은 없었다.
모니터가 켜져 있는 걸로 보아 본부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 컴퓨터가 된다고? 도대체 드워프들은 뭘 어디까지 할 수 있는 거야?'
문을 닫고 나가려는 찰나, 벽에 걸린 전술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서울 전역이 들어있는 지도엔 수많은 X 표시가 그어져 있었다.
'이거... X가 몇 개지?'
X표를 세어 보던 상원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갯수가 상원이 세 번째 모습을 깨어났을 때 보았던 것과 정확하게 같았던 것이다.
그때가 21번째 시험 직전, 지금이 23번째 시험 직후.
세 개의 시험을 거치면서 함락된 성역이 하나도 없었다.
세계 어디를 찾아봐도 이 시점에 성역이 이렇게 많이 생존한 도시는 없을 것이다.
'잘하긴 잘했군.'
순간 뿌듯한 느낌이 들어 상원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끼익 문이 열리며 누군가 상원에게 말을 걸었다.
"어... 대장?"
상원은 뒤를 돌아보았다.
커다랗고 맑은 눈으로 상원을 바라보는 흑인 여성, 샤믹 프란시스코였다.
샤믹이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대장, 대장 맞죠?"
상원이 픽 웃으며 대답했다.
"오랜만입니다 샤믹."
샤믹이 달려와 상원을 안았다.
허리가 부러질 것 같은 느낌에 상원은 헉 하고 신음을 뱉었다.
샤믹이 상원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가슴팍이 약간 축축해졌다.
"어디 갔다 이제 왔어요? 얼마나 걱정했는데."
상원이 널따란 손으로 샤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둥그렇고 조그만 그녀의 머리는 쓰다듬기 꼭 알맞았다.
"미안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사고를 겪었습니다."
샤믹이 고개를 들자,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샤믹이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
"사고? 몸은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괜찮습니다."
"씨이, 맞아요. 대장은 어디 다치거나 그럴 사람이 아니지."
샤믹이 팔을 풀고 눈가를 슥 닦으며 말했다.
상원은 무릎을 숙여 샤믹과 눈높이를 맞추고 말했다.
"고맙습니다, 걱정해줘서."
그 말에 샤믹이 뾰루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무슨 소리예요? 오랫동안 보이지 않으면 걱정되는 게 당연한 거라고요. 고마워하거나 그럴 게 아니에요."
'아, 그런가.'
누군가가 자신을 걱정해주다니,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상원이 무릎을 펴고 물었다.
"그나저나 중앙지휘본부가 비어있다니 의외네요. 다들 어디 가셨나요?"
샤믹이 불현듯 무언가 생각난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상원 씨, 빨리 가요. 우리 지금 저녁 먹을 준비하고 있어요."
샤믹이 상원의 손을 잡아끌었다.
평소 샤믹의 발걸음은 통통 튀는 느낌을 주었는데, 오늘은 무엇이 그렇게 신나는지 아예 다리가 짧은 강아지가 눈밭을 뛰는 것처럼 보였다.
"평소에 식사에 진심인 건 알았는데 오늘은 특별히 더 진심으로 보이네요."
샤믹이 상원의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헤헤, 오늘은 완전 특별 메뉴가 기다리고 있거든요."
"특별 메뉴요?"
뭘까?
어디서 특별히 먹기 좋은 마물이라도 잡아 왔나?
"기대하셔도 좋아요!"
샤믹이 속도를 높이자, 상원은 강아지의 입에 물린 풍선처럼 샤믹을 따라가게 되었다.
비글을 산책시키는 견주들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아니, 그렇게 비유하기엔 샤믹은 너무 큰데.
샤믹에게 끌려가면서 상원은 그런 생각을 했다.
* * *
샤믹이 상원을 이끈 곳은 멸망 이전의 것을 수리해 사용 중인 식당이었다.
진아를 비롯해 섬세한 이들의 손길을 거친 덕에 식당은 나름 깔끔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 역시 멸망 이후의 세계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식당 안에는 서울역의 지도부들이 모여 있었다.
백문혁, 윤진아, 한창훈, 송혜경 그리고 오태성까지.
샤믹이 갑작스레 상원을 이끌고 나타났을 때, 그들은 휘둥그런 눈으로 상원을 쳐다보다가 울고 웃으며 상원을 맞았다.
널따란 식탁의 가운데 자리에 상원을 앉히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도중, 창훈이 주방에서 커다란 쟁반을 들고나오며 말했다.
"자자, 오늘의 메인 메뉴입니다 여러분."
창훈은 쟁반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다란 그릇을 들어 상원의 앞에 놓았다.
"자, 우리 상원 씨 먼저."
눈보다 코가 빨랐다.
진한 육수에 알싸한 향신료가 섞인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거 설마?'
그릇 안에 든 음식은 다름 아닌 쌀국수였다.
아니, 멸망한 세계에 쌀국수라고?
상원은 젓가락을 들어 면발을 집어 보았다.
소고기 기름이 흐르는 면발은 탱글탱글했고, 탄력 있게 흔들리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알맞게 익은 것 같았다.
상원이 잠깐 넋이 나가 있는 사이 창훈은 다른 사람들 앞에도 쌀국수를 턱턱 내려놓았다.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던 혜경까지 자리에 앉자 식사가 시작되었다.
상원은 면을 한 젓가락 들어 입 안에 넣었다.
예상했던 대로 면발이 아주 알맞게 익어 입속에서 탱글거렸다.
젓가락을 내려놓고 국물을 한 입 마셨다.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며 속이 따뜻해졌다.
그래, 어릴 때는 온 가족들이 함께 쌀국수를 먹으러 가곤 했었다.
'쌀국수를 다시 먹다니, 이게 도대체 몇 년 만이지.'
그러자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시험 같은 거 치르지 않고 이대로 지내면 좋겠다고.
별것 아닌 작은 행복을 느끼면서, 그저 이렇게.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상원은 이 사람들을 최후의 전장에 세울 계획이었다.
모든 것이 끝나게 될 그 전장에.
상원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혜경이 말했다.
"마물 고기에서 어쩜 이렇게 감쪽같은 소고기 맛이 나나 모르겠어요. 세상에 심지어 손질하는 법도 비슷해요."
"맛있게 먹으려는데 꼭 재료 얘길 해야 되겠나?"
태성의 말에 혜경이 대답했다.
"죄송해요 어르신. 말씀 안 드렸으면 그냥 감쪽같은 쌀국수였을 텐데."
"원효대사 해골물 같은 거구먼."
태성의 대답에 수험자들이 깔깔 웃었다.
그때 상원이 말했다.
"미안합니다, 여러분."
그 말에 일순간 실내가 조용해졌다.
수험자들이 일제히 상원을 보았다.
두 손을 테이블 아래 깍지 낀 채로, 상원도 수험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백문혁, 영령 <해안선의 귀신>의 화신.
윤진아, 성령 <낙원의 수호자>의 화신.
송혜경, 외신 <검은 숲의 목자>의 화신.
한창훈, 성령 <화산정의 혐오체>의 화신.
오태성, 영령 <청낭의 신의>의 화신.
샤믹 프란시스코, 성령 <가라앉은 거인>의 화신.
이들 하나하나가 주신급에 필적하는 능력자들이었다.
이들은 상원의 계획에 말려들지 않았다면, 모두 무난하게 승천했을 것이다.
"여러분 모두, 승천의 자질이 충분한 사람들입니다. 아마, 저를 만나지 않았다면 보다 쉽게 승천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였다.
샤믹이 젓가락을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저는 못 만났으면 파이에벨 지하 던전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그 말에 사람들이 덧붙였다.
백문혁이 머리를 문지르며 말했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감마 리전 사이보그한테 그대로 벌집이 됐겠죠."
창훈이 턱을 괴고 말했다.
"저희는 상원 씨 없었으면 성화는 구경도 못 해 보고 죽었을 거예요. 저도, 이이도 상원 씨가 살린 거죠."
"맞아, 상원 씨 없었으면 그냥 미친 채로 죽을뻔했지."
태성도 말했다.
"나도 그렇네. 그냥 제물이 돼서 그대로 죽었을 것 아닌가."
진아가 웃으며 말했다.
"저도 그렇고,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상원 씨한테 목숨을 빚진 사람들이네요. 그리고 말이에요, 우리가 아직은 사람인 채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상원 씨 덕분이에요."
샤믹이 다시 덧붙였다.
"그러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마요 대장."
그들의 말을 들은 상원이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깍지 낀 두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라니.
그래, 이들과 함께라면 최후의 전장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어떻게든 끝까지 데려갈 것이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고맙습니다."
목이 메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분위기가 숙연해지고, 샤믹과 진아도 같이 코를 훌쩍였다.
그때 혜경이 상원의 어깨를 짝 때리며 말했다.
"에이 씨, 상원 씨 울어요? 나 상원 씨 우는 거 처음 봐! 바늘로 찔러도 눈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더 사람이."
"그럴 땐 피 한 방울이라고 하지 않아?"
혜경이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에이 자기야, 그런 건 대충 넘어가라 좀."
부부의 대화에 다시 하하 하는 왁자한 웃음이 퍼졌다.
그렇게 또 하나의 여름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상원은 아무도 없는 공터에서 '구두망의 내단‘을 꺼내어 보았다.
보기에는 영롱하기 그지없는 아름다운 보석이었지만, 실은 무시무시한 독기를 품은 물건이었다.
상원도 손에 들고 있기만 해도 저릿해지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이 보주는 구두망의 세 갑자의 공력과 마신의 독기가 똘똘 뭉친 결정체였다.
보통의 수험자라면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죽어버릴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이제 이놈을 가공해야 되겠군."
이놈을 가공해서 나오는 물건이, 세 번째 별을 얻기 위한 열쇠였다.
상원은 보주를 다시 지갑에 넣고 서울역의 지하 공방으로 향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