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흑풍회장 구두망 (3)
꿀꺽, 구두망의 거대한 아가리가 마지막 남은 수험자를 삼켰다.
힘깨나 쓰는 수험자라 그런지 뼈와 살이 다른 버러지들보다 더 달콤했다.
수험자를 삼킨 일곱 번째 머리가 굵직한 트림을 뱉었다.
"그으으윽."
그나저나 뱀이 트림을 하던가?
알 바 아니다.
흑풍회장 구두망, 그는 '오랜 땅의 이무기'로부터 끝없는 힘을 받고 불사의 존재가 되었다.
그 본질은 불사신, 껍데기가 뱀의 형태이든 아니든 큰 상관은 없다.
구두망의 본체인 가운데 머리가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머리끝에서 꼬리 끝까지 1백 미터는 족히 될 듯한 거구는 세공한 에메랄드보다도 아름다운 비늘로 빼곡히 덮여 있었다.
여덟 개의 다른 머리들엔 샛노란 눈이 형형한 빛을 내뿜었다.
껍데기일 뿐이라지만 썩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
구두망이 끌끌거리며 웃었다.
마선(魔仙)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 힘을 쌓아온 세월이 어언 백 년이 넘었다.
'오랜 땅의 이무기'의 가르침을 받들어 세력을 모으고 종교를 세우고 중원과 그 바깥의 세계를 정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에 대한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매진하고 매진해서, 결국 마선의 경지에 다다랐다.
인간의 껍데기를 벗고 위대한 이무기가 된 경지, 불세출의 천재라는 제자도 다다르지 못한 경지에.
'해원향, 그년도 여기엔 다다르지 못했지. 어서 이 모습을 보여줘서 그 계집년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어야 할 텐데.'
해원향,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이름이었다.
아무런 낌새도 없이 교단에 흘러 들어온 그 정체 모를 계집년은, 구두망조차도 상상하지 못했던 속도로 성장해서 어느새 교주 자리를 꿰찼다.
스승인 구두망을 뛰어넘은 건 옛날 옛적의 일이었다.
그 재능이 몸서리치게 질투가 났다.
해원향의 시대가 계속될수록 구두망의 속은 점점 더 꼬여만 갔다.
결국 중원 바깥의 끝없는 광야를 정벌하러 갔다가 큰 부상을 당한 것를 핑계로, 구두망은 자기 성채에 은거해서 기를 축적하는 데 매진했다.
그가 중원의 폭군으로 군림하며 쌓아왔던 수많은 금은보화와 함께.
보물전의 보화는 단순한 보물이 아니었다.
그건 구두망이 중원의 폭군으로 군림했던 그 찬란했던 시절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거기에 손을 대려고 하다니.
'버러지 같은 놈들이 명을 재촉했군.'
구두망이 아홉 개의 머리를 들어 보물전을 샅샅이 훑었다.
보아도 보아도 질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흐, 흐흐흐흐."
보물을 노리던 도둑놈들은 모조리 정리했다.
이제 다시 거처로 돌아가서 끊긴 잠을 청할 것이다.
아직은 마선에 다다르기 위한 ‘탈피’가 완성된 게 아니니까.
그때 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르르르륵."
'뭐지?'
가운데 머리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여섯 번째 머리가 부글거리는 거품을 물고 있었다.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콧구멍에서는 진득한 진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구두망이 혀를 찼다.
‘재생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군!’
여섯 번째 머리는 버러지 같은 놈들과 싸우다가 두 번이나 파괴되었다.
저 머리는 이제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그제야 구두망은 아까 보았던 버러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놈! 그놈 때문이다!'
구두망의 분노에 다른 머리들이 길길이 날뛰며 뜨거운 독불을 내뿜었다.
"쉬이이익!"
성채에 칩거하기로 결정했을 때, 구두망은 단순히 일선에서 물러나기로 마음먹은 게 아니었다.
구두망의 계획은 성채에서 동면에 들어, 지금껏 쌓아온 내공을 바탕으로 이무기로 탈피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무기로 거듭나는 데 필요한 시간이 이십 년.
그 완성이 코앞이었는데, 웬 버러지 같은 놈이 고치를 깨버리는 바람에 탈피를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즉, 지금의 구두망은 완전체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저 여섯 번째 머리도 골골대고 있는 것이었다.
'젠장... 남은 잠을 자야 하겠다.'
구두망은 침소로 돌아갈 심산으로 거대한 몸을 꿈틀했다.
그때였다.
예상하지 못했던 목소리가 구두망의 귓전을 때렸다.
"동작 그만, 구렁이 아저씨."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아홉 개의 머리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구두망의 침소로 통하는 구멍에서 일군의 수험자들이 우루루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무리의 선두에 선 흰 머리의 수험자가 하얀 나뭇가지를 들고 씩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놈이었다.
잠을 자던 구두망의 고치에 마검을 찔러 넣은 그놈.
아홉 개의 머리가 소리를 질렀다.
"샤아아아악!"
구두망이 평생 쌓아 온 세 갑자의 공력이 가득가득 담긴 사자후였다.
인간의 껍데기를 벗지 못한 버러지들이 버틸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역시나, 수험자들 여럿이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 쓰러졌다.
놈의 주변에 있던 다른 수험자들도 꽤나 타격을 받았는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하지만 그놈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구두망은 깨달았다.
이건 사자후를 버티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저놈... 사자후가 통하지를 않는군. 그럴 수가 있나?'
중원의 내로라하는 고수들 중에도 사자후가 아예 통하지 않는 자는 없었는데.
도대체 저놈은 뭐지?
열여덟 개의 눈이 일제히 놈을 쏘아보았다.
놈이 외쳤다.
"흑풍회장 구두망! 당신에게 영생의 끝을 보여주러 왔소!"
개미같이 작은 몸속에 갇힌 인간 주제에 어찌 저리 당당한가?
그 말에 구두망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저게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 영생의 끝이라고? 미친 것이 틀림없구나!
폭발적인 전음에 다른 수험자들이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이제 멀쩡하게 서 있는 수험자는 고작해야 스물 남짓.
저들은 분명히, 방금 전 백 명 넘는 수험자들이 구두망의 독기에 스러진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저놈은 저렇게 당당하다는 말인가?
그때 놈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계란 껍질처럼 밋밋한 표면에 육식동물마냥 커다란 이빨 달린 입 모양 구멍이 뚫린 가면이었다.
그제야 구두망은 놈이 어찌 저리 당당할 수 있는지 감을 잡았다.
저 가면은, 구두망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꼬리 끝에서부터 오소소 소름이 돋았고, 차르륵 하고 비늘이 곤두섰다.
- 네 놈이... 어찌 그걸?
"어때? 온몸의 비늘이 곤두서는 것 같지 않은가, 구렁이 아저씨? 끝없는 광야에 갔던 그때처럼 말이지!"
놈의 말에 여덟 머리가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다.
"캬아아아악!"
그리고 가운데 머리는 떨리는 눈으로 가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가면을 쓴 자를 만났을 때의 기억이 다시금 살아 돌아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신 '오랜 땅의 이무기'의 가르침을 설파하고 다녔던, 해원향의 친위대인 흑풍회.
마신의 힘을 받은 초인이 된 그들에게 중원의 무림인들은 그저 들불 앞의 마른 이파리처럼 쓸려나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중원 바깥은 달랐다.
그중에서도 끝없는 광야에 사는 외눈박이 원숭이들은 차원이 달랐고, 그들을 이끄는 조그만 주술사는 차원이 다르게 강했다.
구두망이 그 무시무시한 해원향의 부름을 무시하고 흑풍회의 성채에 칩거하는 핑계가 되었던 부상이, 바로 저 가면을 쓴 주술사에게 입은 것이었다.
마신의 가르침을 갈고 닦아 마선의 경지에 이르렀는데도, 그때 입은 부상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무수한 밤의 이빨들이 박혔던 상처를 따라 그때 느꼈던 통증들이 되살아오고 있었다.
- 저리 치워라!
구두망의 머리들이 괴성을 지르며 놈을 향해 독불꽃을 내뱉었다.
“크아아악!”
치명적인 독기를 품은 강한 열기가 놈을 집어삼켰다.
분명히 놈은 잿더미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구두망의 기대는 무참히 깨져버리고 말았다.
사자후를 맞았을 때처럼, 놈이 어떤 흔들림도 없이 구두망에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 이럴 수가!
전음에서 구두망의 두려움이 고스란히 느껴져서일까, 놈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 모습이 구두망에게는 해원향만큼이나 두렵게 느껴졌다.
놈이 외쳤다.
“바빌론! 다른 머리들을 부탁합니다!”
“네!”
그 지휘에 따라 다른 수험자들이 제각기 초능력을 부리며 구두망에게 달려들었다.
구두망의 여덟 머리가 짓쳐들어오는 수험자들에게 맞서 분전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가운데 머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놈이 툭 내뱉듯 말했다.
“영생에 다다를 줄 알았겠지. 하지만, 너에게 영생은 없다.”
그리고 놈이 가면을 썼다.
그러자 놈을 중심으로 숨 막힐 듯 새까만 어둠이 까마귀가 날개를 펴듯 펼쳐졌다.
깊은 물에 빠진 것처럼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 안돼!
구두망의 외침이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 * *
바빌론의 길드원들이 구두망과 부딪혔다.
스칼렛의 별의 군대가, 카렌의 안개 화살이 구두망의 머리들에 타격을 입혔다.
구두망의 머리들이 시퍼런 체액을 뱉어내며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악!"
하지만 가운데 머리는 달랐다.
바빌론의 공격은 가운데 머리의 단단한 비늘을 뚫지 못했다.
그건 가운데 머리가 구두망의 힘을 갈무리한 본체로써, 다른 머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전생에 놈을 물리쳤던 '올림포스'의 수험자들도 가운데 머리는 시공간의 틈새에 봉인하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다행히 놈의 탈피가 완성되지 않은 지금은 저 가운데 머리도 죽일 수 있다.
구두망에게는 수십 배의 데미지를 입힐 수 있는 특별한 아이템이 있다면 말이다.
그 아이템이 바로 구두망의 트라우마와 직결된, 상원이 부서진 광야에서 얻은 ‘밤의 가면’이었다.
가면을 쓰자, 가면 안쪽에 묻어 있던 음산한 냉기가 얼굴을 뒤덮었다.
상원의 귀에 시스템 메시지가 들렸다.
[신기 <밤의 가면>을 착용합니다.]
[정령왕 <네 발 달린 밤>의 힘을 전개합니다.]
‘부서진 광야’를 다스리는 세 번째 정령왕 ‘네 발 달린 밤’, 그 끝없는 힘이 상원의 몸을 통해 뻗어나가고 있었다.
상원의 등에서 새의 날개처럼 생긴 네 가닥의 제어봉이 튀어나왔다.
이어서 제어봉으로부터 새까만 안개가 펼쳐졌는데, 그 모습이 마치 까마귀가 날개를 펴는 것 같았다.
부서진 광야의 어둠이었다.
제어봉을 따라서 온몸의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에 상원이 신음을 흘렸다.
"으으윽!"
어디선가 늑대가 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우우우!
힘의 주인, 밤의 정령왕 '네 발 달린 밤'이 우짖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일까?
제어봉을 따라 펼쳐진 새까만 어둠이 먹이를 노리는 문어의 촉수처럼 구두망의 가운데 머리를 향해 뻗어나갔다.
이어서 눈앞이 암전이라도 된 것처럼 깜깜해졌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 새까만 공간 속에서 구두망의 가운데 머리는 또렷하게 보였다.
그리고 가면을 쓰지 않았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가운데 머리와 목을 잔뜩 뒤덮은 짐승의 이빨 자국이었다.
그렇다.
저것이 바로 구두망이 부서진 광야를 침략했다가 입은 상처였다.
새까만 늑대들 수십 마리가 상원의 곁을 지나쳐 구두망에게 달려들었다.
늑대들은 구두망의 가죽에 난 이빨 자국을 정확하게 물었다.
"캬아아악!"
거대한 뱀의 비명이 어둠 속으로 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