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흑풍회장 구두망 (1)
강렬한 기운이 상원의 온몸을 짓눌렀다.
교주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와 같은 종류의,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기운이었다.
몇몇 수험자들이 몸을 벌벌 떨며 말했다.
"마스터... 여긴 못 들어가겠어요."
"이 기운은 너무... 마스터, 이건 안될 것 같아요."
스칼렛이 길드원들을 향해 말했다.
"안될 것 같은 사람들은 여기서 돌아가라. 있어 봐야 개죽음일 거다."
카렌이 덧붙였다.
"돌아가서 힘을 키워요. 다음번에는 더 많은 도움을 주세요."
스칼렛과 카렌의 말에 수험자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돌아서는 그들에게선 죄책감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그만큼 스칼렛과 카렌이 길드를 잘 관리했다는 뜻이었다.
주신급 수험자 스칼렛 이베르손과 카렌 스나이더.
개개인의 힘은 '천둥망치'나 '시공간의 세습자' 같은 괴물들에게는 조금 못 미쳤지만, 그들이 이끄는 길드 '바빌론'은 길드 '발할라'나 '올림포스'에 비교해도 뒤질 게 없었다.
그건 그만큼 그들의 통솔력이 뛰어나다는 증거였다.
이번 생에도 길드 '바빌론'은 잘 성장하고 있었다.
'지혜로운 해결사'를 도발해서 잠깐 살펴본 카렌의 힘도 상당했다.
이 정도면 이들과 함께 '구두망'을 공략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섰다.
상원이 방에 들어서며 말했다.
"이제 구두망을 깨울 겁니다. 정신 단단히 붙들어 매십시오."
그 말에 스칼렛과 카렌이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자기들의 수호신이 주신급이라 해도 지금 상황에서 구두망이라는 괴물을 상대로 맞설 수는 없음을.
애초에 길드 '금자탑'과 '바빌론'이 '흑풍회의 성채'를 공략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은 흑풍회장의 존재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리고 구두망을 공략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수호신은 분명히 경고했다.
그 괴물은 지금 상대할 수 없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상원의 계획에 협조한 건 전적으로 상원을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상원은 그들의 신뢰가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줄 것이다.
어두운 방을 가로질러, 상원은 잠든 구두망의 앞에 도착했다.
표면이 초록색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알 같은 형체가 심장이 박동하듯 꿈틀거렸다.
이게 바로 흑풍회장이 잠들어 있는 고치였다.
상원은 '바위에 박힌 검'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폭풍과 용암의 마력이 서로 부딪히며 새하얀 가지 위로 커다란 칼날의 형태를 만들었다.
이제 구두망을 깨울 것이다.
"하앗!"
힘찬 기합과 함께 상원은 고치에 검을 찔러 넣었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칼날이 고치에 쑥 박혔고, 고치 속을 가득 채웠던 비린내 나는 짙은 초록색 액체가 터져 나와 상원을 덮쳤다.
체액이 점점 빠져나오며 고치가 눈에 띄게 쪼그라들었다.
쉬이이이익!
그와 함께 커다란 뱀이 쉿쉿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고 어디선가 불어온 때아닌 돌풍에 벽에 걸린 횃불들이 격하게 흔들렸다.
카렌이 말했다.
"공포영화 보면 꼭 악령 같은 거 나오기 전에 이런 연출 하던데요."
"악령이면 다행이지요. 저건 그것보다 더한 겁니다."
대답한 상원이 고치를 노려보았다.
고치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계속 쪼그라들다 사람 하나 크기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새하얀 손이 껍질을 뚫고 튀어나왔다.
이어서 손의 주인이 알껍질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키가 2미터는 훌쩍 넘을 것 같은, 곱상한 얼굴을 한 장발의 남자였다.
문득 노트에 쓰여 있던 문장이 생각났다.
'승천 시험을 통틀어 그보다 더 잘생긴 사람을 찾기는 힘들다.'
그게 상원만의 생각은 아니었는지, 스칼렛과 카렌을 비롯한 바빌론의 길드원들이 오오 하고 감탄사를 뱉었다.
그자가 바로 흑풍회장 구두망이었다.
구두망이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잠에서 깰 때가 아닌데, 누군가 나를 깨웠군."
멍하게 방 저편을 바라보던 구두망이 순간 또렷한 시선으로 상원을 보았다.
"그게 너냐, 버러지."
상원이 대답했다.
"맞소, 흑풍회장 구두망. 도대체 마력을 얼마나 쳐 드셨는지 얼굴이 아주 깔끔해지셨구려. 새로 태어났다 해도 믿겠소."
그 말대로, 흑풍회장은 나이가 백 살을 훌쩍 넘은 노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같은 모습을 보이는 건 마신 '오랜 땅의 이무기'의 마력을 잔뜩 축적했기 때문이었다.
인간 같지 않은 체구는 그 부작용이었고.
오상형과 해원향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오랜 땅의 이무기의 힘은 신체를 변형한다.
어이없다는 듯 피식했던 구두망이 이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웃었다.
"허, 허허, 하하하!"
그리고는 언제 웃었냐는 듯 살벌한 표정으로 상원을 쏘아보았다.
"그딴 말을 지껄이다니. 네놈이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알껍질을 도포처럼 둘러쓴 구두망이 상원의 목을 쥐었다.
"크윽!"
무지막지한 악력에 머리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과연,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이 정도 힘은 있어야 흑천교주의 친위대장이라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자의 본모습을 보려면 성질을 조금 더 돋우어야 한다.
상원이 말했다.
"과연, 흑천의 힘은 대단하군. 하지만 말이오, 그렇게 오래 잠을 잤는데도 당신의 힘은 교주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군."
그 말에 구두망의 표정이 굳었다.
방금 전의 웃음은 온데간데 없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지?"
"교주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했소, 구두망. 청출어람이라는 것도 정도가 있지, 제자한테 밀리니 제자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꼴이라니. 나 같으면 쪽팔려서 접시물에라도 코를 박고 자결하겠소."
그 말에 구두망이 으드득 이를 갈았다.
세상에는 수많은 도제관계가 있고, 개중에는 한쪽이 다른 쪽에 비할 수 없이 뛰어난 경우가 있다.
용제와 오디나스가 그랬던 것처럼, 구두망과 해원향도 그런 관계였다.
그런데 그 관계가 반대였다.
분명히 구두망이 해원향을 가르쳤는데 마신의 힘에 먼저 다가간 건 해원향이었다.
거기에서 구두망이 느낀 열등감과 질투심은 상상을 초월했다.
상원은 그걸 건드린 것이다.
구두망이 노호성을 질렀다.
"이노오오오옴!"
구두망의 얼굴에 뱀 비늘이 솟았고, 입에서 살벌한 독니가 튀어나왔다.
노호성에 담긴 강력한 마력에 바빌론의 수험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스칼렛과 카렌도 벌벌 떨기만 할 뿐이었다.
구두망이 낮게 말했다.
"지껄이는 꼴을 보아하니 실성한 것이 분명하다만은, 그렇다고 봐줄 줄 알았더냐?"
구두망이 왼손을 들어 기를 모으자 밝은 초록색 기공탄이 왼손 끝에 맺혔다.
'신화의 몸'이 아무리 대단한 물건이라도 저걸 맞으면 그대로 머리에 바람구멍이 날 것이다.
스칼렛이 말했다.
"상원 씨... 도대체 어떡하려는 거에요?"
도대체 저 괴물을 이렇게 자극해서 어쩌자는 건지, 그런 생각이 들 것이다.
상원의 다음 차례는 바빌론일테니까.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당연히, 상원은 다음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문제가 아닐 거요, 구두망."
상원이 손가락을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뭔가 이상하지 않소?"
그 말에 구두망도 기공탄을 거두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의 구멍을 따라 새하얀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걸 본 구두망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어... 저게 왜?"
"왜기는, 누가 당신 보물전을 털고 있는 거지. 무기고도, 서가도, 약방도, 모조리 다."
보물전에는 구두망이 흑천교주의 권세를 등에 업고 온 중원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모아 온 수많은 보물들이 있었다.
그 보물전 바로 아래 거처를 만든 구두망은 보물전이 열리면 거처 천장의 채광창이 열리도록 설계를 해두었다.
그런데 구두망이 동면에 드는 바람에 보물전이 수험자들에게 털리는 것도 몰랐고, 동면에서 깨어난 구두망을 상대하는 게 전생의 전개였다.
이번에는 다르다.
'금자탑'이 보물전을 털고 있는 이 순간, 상원이 구두망을 억지로 깨워버린 것이다.
지금 구두망은 동면 도중 깨어난 탓에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그 소중한 보물전이 털리고 있는데 그런 걸 신경 쓰겠는가?
구두망이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안돼! 안된다! 크아아아아악!"
구두망이 상원의 목덜미를 놓자 상원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상원이 외쳤다.
"모두 눈 감고 귀 막고 바닥에 엎드려요!"
바빌론의 길드원들이 상원의 지시에 따라 귀를 막고 엎드렸다.
마찬가지로 귀를 막고 바닥에 엎드린 상원은 살짝 눈을 들어 구두망을 보았다.
방금 전까지 구두망이 있던 자리엔 그가 도포처럼 거치고 있던 알껍질만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끝도 없이 거대한 형체가 굽이굽이 똬리를 틀며 천장을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 * *
그보다 조금 이른 시각, 금자탑의 길드원 '초승달 따오기'가 보물전으로 향하는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길드 금자탑의 '흑풍회의 성채' 공략전은 지금까지는 대성공이었다.
사실 금자탑은 처음부터 성채의 보물전을 독식할 생각이었다.
이 타이밍에 보물전을 독식하면 금자탑은 그 어떤 길드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정점에 올라서게 된다.
그러면 바빌론을 배신한 일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바빌론이 금자탑에 매달리게 될 테니까.
지도부의 작전 설계는 물 샐 틈 없이 탄탄했고, 행동대장 '초승달 따오기'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전을 수행했다.
그 덕에 보물전에 다다를 때까지 손실도 거의 없었고,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맞춘 덕에 바빌론 길드는 배제하고 보물전에 들어올 수 있었다.
뱀 모양의 토용(土偶)들이 길을 막아섰다.
"그어어억!"
하지만 금자탑의 정예 길드원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귀찮군."
초승달 따오기는 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거대한 불꽃을 펼쳐 토용들을 구워버렸다.
성채 공략전에 참여한 금자탑의 정예 수험자들 중, 초승달 따오기는 최강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자였다.
상황에 따라서는 길드장인 '태양매'나 부길드장 '전갈 군신'도 넘어설 정도의 능력자라 보아도 무방했다.
초승달 따오기가 외쳤다.
"조금만 더 가자!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기를 얼마간, 마침내 거대한 황금 문이 나타났다.
그게 '구두망'의 보물전으로 통하는 문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이 많은 황금으로 문을 만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무투파 수험자인 '죽음의 개'가 몸을 풀며 말했다.
"열겠습니다."
죽음의 개가 문을 밀자, 몸을 푼 게 무색하게도 너무나 손쉽게 황금문이 열렸다.
그 안의 광경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각종 금은보화가 쌓여 있을 거라는 상상은 했지만, 문 속의 풍경은 기대 이상이었다.
"세상에... 이거 다 가져가지도 못하겠는데요?"
"이거 봐! 이 칼 적어도 성물급은 되겠어."
길드원들의 외침에 초승달 따오기도 긴장이 풀렸다.
바빌론의 길드원들을 모두 따돌리고 여기에 오기까지, 상황 하나하나를 관리해가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보람이 있었다.
초승달 따오기가 외쳤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이게 모두 우리 거다! 일단은 최대한 값나가는 것들로 골라라!"
그때였다.
쿠구구구
엄청난 굉음과 함께 보물전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