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121화 (121/230)

제121화. 흑풍회의 성채 (4)

스칼렛이 물었다.

"어떻게 할 작정이죠?"

그러자 상원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 남자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런 미소를 지을 리가 없다.

델타 루트에서도 그랬고, 다림델에서도 그랬다.

상원이 대답했다.

"당신들이 모르는 통로가 있습니다. 거기로 가면 됩니다."

그 말에 스칼렛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자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으니까.

단순히 직감의 문제가 아니었다.

'천정의 재판관', 거짓을 꿰뚫는 눈을 가진 그녀의 수호신도 상원의 말이 거짓이라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빌론의 부길드장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카렌이 눈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요?"

그녀의 말에 상원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믿을 수 없겠지요, 카렌 스나이더. 하지만 당신도 알 겁니다. '지혜로운 해결사'가 전지한 건 아니라는 걸."

상원의 대답에 스칼렛이 숨을 들이켰다.

그건 상원이 카렌의 이름을 알았기 때문도, 그녀의 수호신이 '지혜로운 해결사'임을 알았기 때문도 아니었다.

시험을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거대한 길드인 '바벨탑'의 부길드장은 너무나도 유명한 사람이었고, 그녀를 아는 이상 그녀의 수호신을 모를 수는 없었다.

카렌이 놀란 건 그다음 말, '지혜로운 해결사가 전지하지 않다.'는 말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수험자가 지식과 지혜를 긍지로 여기는 주신급 승천자의 면전에다 그런 말을 꺼낸단 말인가.

역시, 카렌의 눈빛이 순식간에 변했다.

평소의 여유롭고 상냥한 그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방금 그 말, 다시 한번 해보시죠."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하는 카렌의 주변에 짙은 안개가 맺히기 시작했다.

'지혜로운 해결사'가 물을 다스리는 힘을 내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상원은 물의 화살에 꿰뚫려 벌집이 되어버릴 것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스칼렛이 개입하려는 찰나, 상원이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그러면서 상원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새하늘에서 가장 상냥한 승천자에게 결례를 범하였음에 사과드립니다."

카렌의 주변에서 안개가 사라질 때까지 상원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스칼렛은 보았다.

무언가 계산이 끝났다는 듯 올라가는 상원의 입꼬리를.

상원은 카렌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보려고 일부러 그녀를 도발한 것이었다.

안개는 금방 사라졌다.

분쟁을 싫어하는 ‘지혜로운 해결사'가 힘을 거둔 것이다.

카렌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앞으로는 입을 조심하세요."

"알겠습니다, 위대한 승천자이시여."

부드럽게 웃어 보인 상원이 이번에는 스칼렛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갑시다 스칼렛. 재수 없는 금자탑 놈들한테 보물전의 아이템을 모조리 넘겨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 맞는 얘기지.

그런데, 이 사람이 그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금자탑 놈들이 먼저 던전에 들어간 건 어떻게 알고 있죠?"

"그놈들한테 뒤통수 맞은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요. 이 던전에 금자탑 놈들이랑 왔다면 자기들끼리 보물전에 먼저 들어가서 문을 닫아버린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죠."

대답하는 상원의 모습이 마치 몇십 년은 산 노인처럼 보였다.

많이 쳐봐야 삼십대 중반처럼 보이는 이 남자가, 어떻게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일까?

상원이 말했다.

"여하튼, 제가 보물전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저와 같이 가시죠."

옆에서 카렌이 거들었다.

"나쁘지 않은 제안 같아요 스칼렛."

저 말엔 부끄러움이 담겨 있었다. 고작 수험자 하나가 사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지엄한 주신이 체통 없이 권능을 발동하려 했다는 데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지혜로운 해결사는 그 이름과는 달리 은근히 감정적인 구석이 있었고 그건 화신 카렌 스나이더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건 그렇고.

과연, 그냥 이득인 제안일까?

수험자 조상원, 이 사람은 자기가 얻을 게 없는 제안을 할 사람이 아닌데?

스칼렛이 물었다.

"그러면, 상원 씨는 뭘 얻죠?"

"저도 보물전의 보물을 얻는 거지요."

"그렇다면 왜 저희와 함께 가는 거지요? 그런 방법을 알고 있다면 아이템을 독식하는 게 당연할 텐데요."

스칼렛에 이어 카렌이 푸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 우리 도움 없이는 보물전을 공략할 수 없는 거군요."

카렌의 말에 상원이 허 웃으며 두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역시, 명민하시기로 소문난 주신 두 분이 함께 계시니 뭘 어떻게 할 수가 없군요. 맞습니다. 여기서 보물전을 공략하려면 여러분들의 도움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상원의 대답에 카렌이 빙긋 웃으며 스칼렛을 보았다.

거대한 길드를 함께 이끌어 온 자매 같은 사이, 말로 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는 바로 알 수 있다.

스칼렛도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상원을 향해 말했다.

"좋습니다. 계약의 내용은요?"

스칼렛이 오른손에 힘을 불어넣어 상원을 향해 내밀었다.

시험의 표식이 하얗게 빛났다.

지치지 않는 법률가의 능력 '계약을 꿰뚫는 눈', 계약 조건이 공평한지를 파악하는 능력이었다.

상원이 스칼렛의 손을 맞잡고 대답했다.

"'흑풍회장 구두망'을 함께 처리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보상과 보물전의 보물들은 함께 나누지요. 분배는 제가 7, 바빌론이 3."

그 말에 바빌론의 수험자들로부터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그게 무슨 도둑놈 심보야? 너 혼자 7을 갖겠다고?"

"마스터, 그만둬요! 더 들을 필요도 없어!"

아우성치는 길드원들을 카렌이 진정시켰다.

"모두 그만."

그 한 마디에 수백 길드원들이 조용해졌다.

카렌은 아는 것이다.

스칼렛의 능력 '계약을 꿰뚫는 눈'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그리고 이 계약을 지켜보는 '천정의 재판관'이 아직도 침묵한다는 건, 상원이 말한 7:3 분배가 합리적이라는 얘기였다.

도대체 이 남자는, 정체가 무엇이길래 바빌론이라는 거대 길드와 수익을 7:3으로 분배하는 계약을 단신으로 체결한단 말인가?

꿀꺽, 스칼렛이 침을 삼켰다.

이 남자, 대단한 괴물이군.

한동안 빛나던 스칼렛의 손등에서 빛이 꺼졌다.

계약 검토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그래, 이 정도면 됐다.

스칼렛이 상원의 손을 놓았다.

"그렇게 합시다, 수험자 조상원."

상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계약을 꿰뚫는 눈' 같은 스킬이 있으니 진행이 편하군요. 다른 데랑 이런 계약을 했다간 입씨름이 끝이 없었을 텐데."

상원의 말에 스칼렛도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대단한 분이군요. 당신 정체가 뭐예요?"

"그냥 수험자입니다."

상원이 스칼렛의 손을 놓고 방 중앙으로 걸어갔다.

돌로 된 방바닥에는 기하학적 무늬들이 소용돌이처럼 퍼져 있었는데, 방 정중앙에 그 소용돌이의 중심이 있었다.

그 지점으로 걸어간 상원이 말했다.

"다들, '검은 바람 독샘'을 주시겠어요?"

검은 바람 독샘은 마물 '변이한 흑풍회원'들을 잡으면 나오는 아이템으로, 시장 거래가가 상당히 높았다.

보통 수험자들이 흑풍회의 성채에 오는 이유가 '검은 바람 독샘'을 얻기 위해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는데, 저 남자는 지금 뻔뻔스러운 얼굴로 그걸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사람은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검은 바람 독샘을 요구할 사람은 아니었다.

반드시 계획이 있을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요구에 길드원들이 쭈뼛거리는 사이, 스칼렛이 가장 먼저 품에서 독샘을 꺼내 상원에게 넘겼다.

"여기요."

검은 바람 독샘은 계란 하나 정도 크기의 새까만 주머니였다.

독샘을 받아든 상원이 말했다.

"하나로는 부족합니다. 여러분들께서 가진 걸 모두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카렌이 자기 독샘을 상원에게 주었다.

길드장과 부길드장이 아이템을 넘기니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어느새 상원의 앞에는 수십 개의 독샘이 쌓여 있었다.

상원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이제 보물전으로 가는 길을 열겠습니다."

그다음 상원이 벌인 일은 스칼렛조차도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상원이 독샘을 밟아서 터뜨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니 무슨 미친...!"

스칼렛이 자기도 모르게 소리칠 정도였는데 다른 길드원들은 오죽했을까?

그렇게 고성과 쌍욕이 오가는 가운데 상원은 묵묵하게 독샘을 밟아서 터뜨리는 데만 열중했다.

그렇게 모든 독샘을 밟아 터뜨리고 나자 독샘에서 흘러나온 끈적끈적한 독액이 상원 발밑의 문양을 가득 채웠다가 바닥의 홈을 따라 쏜살같은 속도로 방 가장자리로 흩어졌다.

뒤이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방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그 소리와 함께 방바닥이 갈라졌다.

이게, 그 보물전으로 통하는 다른 문인가?

카렌이 얼빠진 얼굴로 말했다.

"이럴 수가."

스칼렛은 카렌이 받은 충격을 이해했다.

어느 던전이나 비밀통로는 있게 마련이다.

문제는 '지혜로운 해결사'도 알지 못하는 비밀통로를 저 수수께끼의 남자가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주신도 모르는 지식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는 것인가?

"당신... 수호신이 누구죠?"

"알 것 없습니다."

카렌의 말에 대답한 상원이 바닥을 향해 훌쩍 몸을 날렸다.

역시나, 종잡을 수 없는 남자다.

"우리도 빨리 갑시다."

길드원들에게 명령을 내린 스칼렛이 상원이 뛰어든 구멍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저 남자를 따라가면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 있다.

보물전의 보물들도 그것에 비하면 조악한 장난감에 불과하다.

스칼렛의 온몸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 * *

상원은 앞을 가로막은 '변이된 흑풍회원'의 명치에 바위에 박힌 검을 꽂았다.

그러자 흑풍회원이 끼에에엑 하는 소리를 내며 검은 피를 왈칵 토해냈다.

온몸에 초록 비늘이 덮히고 눈이 샛노랗게 변한 무림인은, 이제 도저히 인간이라고 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변이해 있었다.

이게 바로 힘에 취해 마신 '오랜 땅의 이무기'의 힘을 무턱대고 받아들인 결과였고, 상원에겐 그런 자들을 위한 연민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상원은 가지에 묻은 검은 피를 털어내고 앞을 보았다.

긴 복도를 지나 드디어 상원은 '회장의 묘소'에 다다라 있었다.

뒤를 따른 스칼렛이 말했다.

"여기가 거기군요. 흑풍회장이 잠들어 있다는."

"그렇습니다."

흑풍회는 중원을 정복한 '흑천교'의 교주 해원향이 이끄는 친위부대였다.

마신의 힘을 깨달은 해원향이 가장 처음 마신의 힘을 하사한 상대가 이들이었다.

힘을 받은 흑풍회원들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변이해서 반인반사(半人半巳)의 괴물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 힘을 가장 많이 받은 흑풍회장 구두망은 어떤 괴물이 되어 있겠는가?

카렌이 말했다.

"끔찍한 일입니다."

"안에는 더 끔찍한 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상원은 앞을 가로막은 높다란 돌문을 살짝 밀었다.

그러자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커다란 방이 나타났다.

널따란 방 안으로 초록색 횃불이 이글거리고 있었고, 방 한가운데 커다란 초록색 비늘 덩어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저것이 바로 잠든 흑풍회장, 구두망이었다.

상원이 말했다.

"잘 봐요 스칼렛. '금자탑' 놈들이 당신들의 뒷통수를 친 걸 두고두고 후회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상원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방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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