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흑풍회의 성채 (3)
알레이다가 웃으며 말했다.
"불신자, 똑똑한 줄은 알았지만 너무 똑똑해. 시험판에서는 똑똑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데 말이야. 그렇게 똑똑하면 이목을 끌게 된다고."
이어서 알레이다가 새까만 선글라스를 꺼내서 쓰더니, 품에서 은색 막대를 꺼냈다.
수험자의 기억을 지우는 도구인 <뉴럴라이저>였다.
알레이다는 상원의 기억을 지우려는 것이었다.
"불신자, 당신은 시공간의 틈새에서 조류에 휘말려 길을 잃어버린 거야. 워프라는 게 항상 그런 위험성이 있는 거지, 안 그래?"
번쩍, 뉴럴라이저에서 강한 섬광이 터졌다.
뉴럴라이저가 '기억 제거' 스킬을 쓴 것이다.
보통의 수험자는 그 빛을 보면 기억을 잃어버리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상원은 그렇지 않다.
불신자에게는 스킬이 통하지 않으니까.
회중시계는 차원의 시간을 멈추는 것이기 때문에 상원도 벗어날 수 없었지만, 뉴럴라이저는 아니다.
그리고 이걸로 확실해졌다.
도대체 그 어떤 기관원이 뉴럴라이저를 들고 다니면서 수험자의 기억을 지우고 다닌다는 말인가.
그렇다는 건 저자의 정체가 따로 있다는 소리다.
승천 시험의 세계에서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보는 데 선공만큼 좋은 건 없다.
알레이다를 향해 날 듯이 달려든 상원이 그녀의 안면을 향해 마력을 불어넣은 가지를 찔러 넣었다.
슉!
가지는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저 멀리 날아간 알레이다가 제 본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알레이다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기관원을 공격하는 건 중죄다, 불신자."
상원도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당신이 기관원일 때 얘기고."
상원은 모습을 바꾼 알레이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금발은 새까만 흑발로 바뀌어 있었고, 세 겹의 고리가 사라진 대신 새까만 날개가 튀어나와 있었다.
안대가 사라져서 드러난 한쪽 눈 또한 흰자위 없이 새까맸다.
전체적으로 벌거벗은 타락 천사의 모습이었다.
상원은 그녀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한쪽 눈이 새까만 타락 천사, 저 모습을 한 존재는 승천 시험을 통틀어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바로 권좌에 앉은 이 <외눈 현자>를 보좌해서 세상을 돌아다니는 <생각과 기억의 까마귀>.
권좌에 앉았기 때문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외눈 현자를 대신해서 온갖 더러운 일을 하고 다니는 해결사 같은 존재였다.
상원이 외쳤다.
"당신의 존재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어르신께서 이 미물에 대해 그렇게 신경을 써주신다니 영광이오."
알레이다가 대답했다.
"끌끌, 혓바닥이 길구나 불신자."
알레이다가 오른손을 옆으로 뻗자 그녀의 손에 검은 창이 나타났다.
자기 주인의 신기 <흔들리는 창>을 본딴 물건으로, 상원의 심장쯤은 언제든지 꿰뚫어버릴 수 있었다.
저벅저벅 상원에게 다가온 알레이다가 상원의 목덜미에 창날을 들이댔다.
알레이다가 말했다.
"그 수많은 승천자들이 왜 당신을 그렇게 싫어하는지 직접 만나보니 알겠군. 뻣뻣해도 너무 뻣뻣하잖아, 부러뜨리고 싶게."
창날을 따라 흐르는 서늘한 냉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신기 '흔들리는 창'의 복사본.
신화의 몸이 아무리 튼튼하다 해도 이걸 맞고 무사할 수는 없다.
다른 수험자들이라면 오줌을 지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상원은 알고 있었다.
알레이다가 이 창을 쓸 수는 없다는 걸.
"어디, 부러뜨려 보시오. 하지만 당신의 주인이 권좌의 카르마를 감당할 용의까지 있을까? 이런 식으로 수험자를 묻어버리면 그 반발이 엄청날 텐데?"
그 말에 알레이다가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 말대로다.
승천자들의 정점에 있는 자리인 권좌는 시험을 지배할 권한을 주지만 동시에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자리였다.
왜냐하면 권좌는 승천 시험을 둘러싼 카르마의 제약을 가장 크게 받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권좌에 앉은 자는 시험에 들어서기 전까지 시험의 거의 모든 면을 설계할 수 있지만, 일단 시험이 시작되면 사실상 식물로 전락하게 된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알레이다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무엄하게 그딴 소리를."
"그렇게 아니꼬우면 주인님이 직접 오시라고 하던지."
상원은 알레이다의 창날을 밀어냈다.
순간 팔 힘이 빠진 것인지 창날은 손쉽게 밀려났다.
상원이 내뱉듯 말했다.
"너도 말이야. 명색이 절대자의 블랙 요원인데 수험자 하나 견제한다고 차원의 틈새나 돌아다니는 꼴이 영 말이 아니네. 그렇다고 시험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자니 카르마가 영 무섭지?"
으드득, 알레이다가 이를 갈았다.
"네놈...!"
"뭐, 그래. 절대자께서 나를 아니꼽게 보고 계신다는 건 잘 알겠어. 앞으로 유의할게. 가급적이면 다시는 보지 말자고."
상원은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뒤에서 퍼드득 하고 수많은 새 떼가 한 번에 날갯짓을 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잔뜩 기분이 상한 알레이다가 차원의 틈새를 빠져나가는 소리였다.
상원은 한숨을 뱉었다.
"후우."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짐짓 호기롭게 상대하고 보냈지만, 그래도 명색이 절대자의 뒷일을 처리해주는 블랙 요원이었다.
그런 자가 상원 앞에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상원이 절대자의 견제 대상이 됐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는 건 상원이 머릿속에 세워둔 계획, '일곱 별의 왕관'을 완성해서 승천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소리였다.
일곱 별의 왕관을 완성하는 난이도를 고려했을 때, 절대자의 견제까지 받는 상황이라면 그걸 달성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으니까.
머리가 무거웠다.
아니다, 생각을 정리하자.
답은 반드시 있다.
상원은 큰 숨을 들이쉬었다.
"쓰읍."
그때 상원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일곱 별의 왕관을 이루는 업적들은 대부분 '몇 번 시험 안에 무엇을 하시오'라는 구조로 되어 있다.
즉, 일곱 별을 순서대로 모아야 할 필요도, 50개의 시험을 차례대로 치러야 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하늘에 오르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상원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서, 기억의 궁전에 들어섰다.
상원의 머릿속에 있는 그 공간엔 32권의 경전과 198권의 노트, 그리고 그 노트들을 보면서 머릿속에 그려두었던 공략법들이 빠짐없이 정리되어 있었다.
경전과 노트를 다시 정리하고 지금까지 만들어두었던 공략법을 재검토하면서, 상원은 새로운 가능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차원의 경계 속에서, 상원은 몇 날 며칠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상원은 찾아냈다.
절대자의 견제를 받으면서도 하늘에 오를 수 있는, 오로지 단 하나의 방법을.
상원은 몸을 일으켰다.
"좋아, 가자."
일단은 세 번째 별은 그대로 얻어야 한다.
그러려면 당초 세웠던 계획대로 흑풍회의 성채에 가야 했다.
25번 시험에 다다르기 전에 해원향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거기 있었으니까.
상원은 천천히 차원문을 향해 걸어갔다.
차원문 너머에는 상원의 첫 번째 목적지 '흑풍회의 성채'가 있었다.
* * *
한편 상원이 흑풍회의 성채로 통하는 차원문을 건너는 그 시각, 흑풍회의 성채에서는 수험자들의 공략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상원이 차원의 틈새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 차원문 밖에선 이미 23번 시험이 끝난 참이었다.
24번 시험이 시작할 때까지는 시간이 상당히 남아 있었고, 그 사이 수험자들이 구성한 '길드'들이 코인과 신앙, 그리고 아이템을 얻기 위해 수많은 던전들을 공략하고 있었다.
'흑풍회의 성채' 또한 그런 던전 중 하나였고, 여기엔 주신급 수험자 '태양매'가 수장인 길드 '금자탑'과 스칼렛 이베르손이 수장인 길드 '바빌론'이 참여하고 있었다.
'흑풍회의 산채' 공략전은 분명히 금자탑과 바빌론의 합동 작전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흑풍회의 성채 중심에 있는 보물전을 앞에 두고 금자탑이 바빌론을 배신한 것이다.
바빌론이 마물을 처리하느라 발이 묶여 있는 사이, 발 빠르게 움직인 금자탑의 수험자들은 자기들끼리만 보물전에 들어가서 보물전의 문을 닫아버렸다.
바빌론의 길드장 스칼렛 이베르손이 보물전의 문을 두드리며 격한 소리를 질렀다.
"젠장! 태양매! 이따위로 나오다니!"
스칼렛이 앙칼진 비명을 질렀지만 공허한 메아리가 방 안을 떠돌 뿐이었다.
바빌론의 다른 길드원들 또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부길드장, 주신 '지혜로운 해결사'의 화신인 카렌 스나이더였다.
"침착해요, 스칼렛. 보물전의 문이 닫혔다면 다시 열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일단 물러납시다."
카렌의 말에 스칼렛이 소리를 질렀다.
"여기까지 오면서 무슨 고생을 했는데, 그냥 물러나자고?"
바빌론이 아무리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대형 길드라고 해도, '흑풍회의 성채'씩이나 되는 대형 레이드 던전을 공략하는 건 상당한 준비를 요하는 일이었다.
공략을 준비하느라 들인 코인의 양만 해도 어마어마했고, 수많은 마물과 함정들을 뚫고 보물전까지 오느라 수많은 길드원들이 희생되었다.
게다가 다른 던전들과는 다르게 길드장과 부길드장이 직접 참여한 레이드인데, 이대로 물러나야 한다니.
카렌은 스칼렛의 짜증이 익숙하다는 듯 부드럽게 말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스칼렛. 이 던전의 구조는 길드장인 당신이 더 잘 알잖아요. 일단은 이대로 물러나죠. 금자탑 길드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갈지는 조금 더 여유로운 상태에서 생각합시다."
철두철미했지만 다혈질적인 스칼렛과 달리 카렌은 느긋하고 안정적인 성격이었고, 일이 막힐 때 듣는 카렌의 조언은 스칼렛의 마음에 여유를 주었다.
천천히 생각해보니 카렌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물러나야 할 때였다.
후우, 한숨을 쉰 스칼렛이 돌아서서 길드원들을 향해 말했다.
"그래요, 여러분. 지금은 물러납시다. 다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일단 물러나서 휴식을 취하고 다음 시험에 대비합시다. 그리고 금자탑 놈들에 대한 일은... 절대 잊지 말지요."
짐짓 부드럽게 말했지만 그녀의 눈에는 불똥이 튀고 있었다.
'태양매... 이 기름에 튀겨 죽여도 시원찮을 놈...!'
그때, 누군가 스칼렛의 말을 끊었다.
"잠깐만요 스칼렛! 정말 이대로 물러날 겁니까?"
널따란 돌방의 반대쪽 문으로 누군가 들어오고 있었다.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당당한 걸음걸이.
치밀어오는 햇살을 등진 채 걸어오는 그 모습이 마치 후광을 등에 진 메시아 같았다.
당황한 길드원들이 웅성거렸다.
"어... 당신, 누구야?"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혼자서 그 많은 함정을 뚫고?"
스칼렛이 미간을 찡그렸다.
분명히 어디선가 들은 목소리였다.
게다가 말도 안 되는 말을 당연한 것처럼 하는 저 당찬 목소리.
아, 설마.
"조상원?"
스칼렛의 말에 남자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오랜만입니다, 스칼렛 이베르손."
맞다, 조상원이었다.
생김새는 다림델에서 보았던 것과도 또 달라져 있었지만, 저 남자 특유의 분위기는 조금도 바뀐 데가 없었다.
상원의 대답에 스칼렛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반갑습니다 상원 씨."
이제 됐다.
저 남자라면 이 난관을 넘어설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