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119화 (119/230)

제119화. 흑풍회의 성채 (2)

에론이 배낭을 풀면서 말했다.

"도약계 변형장치입니다. 드디어 써볼 때가 왔네요."

배낭에 든 물건은 그녀의 몸통만큼이나 커다란 모니터와 키보드, 그리고 말뚝처럼 생긴 부품들이었다.

에론이 차원문 근처에 말뚝 세 개를 연달아 꽂고 키보드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손으로는 낼 수 없는, 숙련된 드워프만이 할 수 있는 속도였다.

모니터에는 인간의 눈으로는 쫓아가기조차 힘든 속도로 수많은 수식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에론은 그 속도에 맞춰 명령어를 입력하면서 차원문의 목적지를 바꾸었다.

에론이 진땀을 흘리면서 말했다.

"아시겠지만, 차원문의 목적지를 바꾸는 건 쉽지 않아요. 차원문의 목적지가 사람이 도약할 수 있을 만큼 유의미하게 바뀌는 건 정말로 찰나입니다."

그 말은 곧 '흑풍회의 성채'로 갈 수 있는 수험자는 단 한 명, 상원뿐이라는 얘기였다.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다른 수험자들도 마른침을 삼키면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러기를 얼마간, 마침내 차원문이 비추는 광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나무들이 울창한 정글, 그곳이 바로 해원향의 친위대인 '흑풍회'의 본거지였다.

그때였다.

수많은 마물들이 차원문을 향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뭇가지 사이로 바늘 구렁이며 사괴왕 같은 커다란 뱀들이 꿈틀거리며 기어 나오고 있었다.

일행들이 들어왔던 통로로는 날카로운 발톱을 세운 늪지 늑대인간들이 컹컹거리며 몰려들었다.

차원문에 간섭하는 걸 방해하려는 것이다.

‘젠장, 쉴 틈을 주지 않는군.’

"다들 에론을 보호합니다! 조금만 버텨요!"

소리친 상원이 통로를 향해 '요새 수호자의 시선'을 사용했다.

[스킬 '요새 수호자의 시선'을 사용합니다.]

[스킬에 맞추어 의체를 최적화합니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고글이 펼쳐졌다.

[타겟: 72]

지이잉!

굉음과 함께 날아간 청록색 광선이 늑대인간 무리를 집어삼켰다.

그 한 방에 바글거리던 늑대인간들이 정리되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바늘 구렁이들이 대바늘을 날린 것이다.

수험자들은 몰라도 에론은 저걸 맞으면 꼼짝없이 황천행이다.

"샤믹!"

"옛썰!"

거인화한 샤믹이 에론을 감싸자 무수한 대바늘이 튕겨져 나갔다.

그다음은 난전이었다.

마물들은 '요새 수호자의 시선'같은 큰 스킬은 쓸 기회를 주지 않고 일행들을 몰아붙였다.

서울역의 수험자들은 그 긴 세계수 통로를 뚫고 올라오느라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더군다나 이놈들은 '오랜 땅의 이무기' 계열 마물들의 전반적인 능력치를 올려주는 세계수의 버프까지 받고 있었기에 싸움은 더욱 어려웠다.

이대로 버티기만 해선 승산이 없었다.

상원은 빨리 흑풍회의 성채로 향하고 나머지 인원들은 퇴각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때 에론이 외쳤다.

"상원 씨! 지금이요! 빨리!"

차원문을 보니, 과연 흑풍회의 성채가 나타나 있었다.

"고맙습니다 에론!"

재빨리 대답한 상원은 차원문을 향해 뛰어들었다.

곧 주변이 암전이라도 된 것처럼 새까매졌다.

* * *

저 멀리 빛나는 차원문이 보였다.

바로 '흑풍회의 성채'로 향하는 차원문의 출구였다.

전생의 진행에 비추어 보았을 때, 다른 수험자들이 흑풍회의 성채에 오는 건 23번에서 24번 시험 사이일 것이다.

반면 상원은 21번 시험이 채 시작하기도 전인 지금 흑풍회의 성채로 향하고 있었다.

성채로 가는 목적이 세 번째 별을 얻기 위해서만인 건 아니었다.

흑풍회의 성채에 있는 수많은 보물들, 이대로라면 그걸 독식할 수 있다.

'좋다! 서두르자.'

상원은 흑풍회의 성채를 향해 달려갔다.

그때 누군가 상원을 불렀다.

"수험자 조상원."

상원은 순간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누가 차원의 사이에서 상원을 부른단 말인가?

설마 '지하의 수호자'가 여기까지 손을 뻗은 것인가?

상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젠장, 빨리 나가야 한다.'

출구를 향해 달리려는데 덜컥 발이 멈췄다.

"이런...!"

그리고 상원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새하얀 그리스식 토가를 걸친 여인이었는데 머리에는 빛나는 고리가 세 개 걸려 있었다.

상당한 미인이었는데,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리고 있었다.

'그런데 기관원이 눈 한쪽만 가리고 다닌다고...?'

두 눈을 가리고 다니는 기관원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한쪽 눈만 가린 기관원에 대한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어쨌든 빛의 고리가 세 쌍, 그건 그녀의 계급이 집행관이라는 뜻이었다.

상원이 '끝없는 지하'에 보냈던 집행사 엘가, 그리고 그녀와 함께 왔던 감찰사보다도 높은 계급이었다.

‘그런데 집행사도 아니고 집행관급이 일개 수험자 앞에 직접 나타난단 말인가?’

상원이 미간을 찡그렸다.

집행관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말했다.

"수험자 조상원, 반갑습니다. 저는 집행관 니도 알레이다입니다."

"만나 뵙게 되니 영광입니다 집행관님."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기관원이 수험자 앞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게 좋은 일 때문일 리가 없는데, 세상 어떤 수험자가 요원 만나는 걸 달가워한다는 말인가?

'그나저나 시험이 끝날 때까지 기관원 한 번 만날 일이 없는 게 보통인데... 21번 전에 셋이나 만나다니 참 재수도 없군.'

집행관 알레이다가 천천히 상원을 향해 다가왔다.

"수험자 조상원, 제가 어떤 일로 그대를 만난 건지 알겠습니까?"

"알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짐작 가는 데는 있었다.

우선 상원이 사용했던 수많은 마물의 스킬들.

고작 2급 마물 지하 마녀의 스킬 '지하의 문'을 쓰는 데도 마인으로 몰려서 퇴장당할 뻔했는데, 그걸로도 모자라 5급 스킬 '요새 수호자의 시선'까지 쓰고 있었다.

게다가 마신 '태초의 대족장'의 힘까지 써대니 좋게 보일 리가 있나.

하지만 알레이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수험자 조상원, 당신 때문에 저희가 어떤 곤란을 겪었는지 알고 있습니까?"

"곤란이요?"

"아나르에서는 대단한 일을 했더군요."

아, 설마.

알레이다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오디나스를 퇴장시킨 것, 그래서 저희가 겪은 곤란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시험 전체의 궤도가 헝클어졌지요."

그래, 맞다.

두 번째 별을 얻기 위해서, 상원은 원래 30번 시험의 보스로 나왔어야 할 대강령술사 '오디나스 바스칸딘'을 15번 시험에서 죽여버렸다.

그래서 그 앞뒤의 시험을 부랴부랴 갖다 붙이고 개연성을 맞추다 보니 원래대로라면 21번 시험에는 나타나지 않았을 세계수가 떡하니 여의도에 나타난 것이다.

알레이다가 말했다.

"당신을 그대로 두면 또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상원이 대답했다.

"제가 부정한 방법을 썼습니까? 모두가 시험 안에서 허락된 일일 텐데요?"

상원의 물음에 알레이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부정한 방법... 수천 가지가 있다는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군요. 그렇지요, 섣불리 움직였다간 저도 전 집행사 엘가 같은 꼴이 되겠지요."

알레이다의 말에 오랜만에 엘가라는 존재가 생각났다.

엘가, 서울 담당 집행사였던 그녀는 조상원을 제거하기 위해 갖은 수를 썼지만 결국 섣부르게 상원을 마인으로 몰려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가고 말았다.

그 결과 집행사 권한을 박탈당하고 마물로 타락할 뻔했던 그녀를 구해준 게 상원이었다.

마신 '세상 끝의 불꽃'의 힘이 미치지 않는 '끝없는 지하'로 보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의 눈에는 기관을 향한 무시무시한 증오심이 서려 있었다.

어쨌든.

'그런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하다니, 참 짜증 나는군.'

상원도 미소를 띠고 말했다.

"그렇군요, 존경하는 집행관님. 집행관씩이나 되시는 분이 그렇게 경거망동하시면 안 되겠지요.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거지요?"

알레이다의 외눈이 상원을 꿰뚫어 보았다.

"이렇게 할 겁니다, 수험자 조상원."

알레이다가 품에서 조그만 은색 회중시계를 꺼냈다.

덮개 아래 시곗바늘이 멈춰 있었다.

시계를 본 상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 설마!'

알레이다의 손에 있는 물건은 바로 '집행관의 회중시계'였다.

보잘것없는 회중시계처럼만 보이는 저 물건을 다루려면 집행관급은 돼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수험자의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도구였기 때문이었다.

알레이다가 말했다.

"당신 때문에 흐트러진 시험의 시나리오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일단 당신을 시험에서 배제해야겠습니다."

이어서 집행관이 처분을 선포했다.

"집행관 니도 알레이다, 기관의 이름을 빌어 즉결 처분합니다. 수험자 조상원의 시간을 멈춥니다."

찰칵 소리와 함께 회중시계의 덮개가 닫혔다.

'시간 정지 처분을 이런 식으로 내린다고...?'

상원이 으드득 이를 갈았다.

"이의 있소 집행관! 정당한 사유가 없는 처분은 받아들일 수 없소! 게다가 시간 정지라니, 납득 가능한 처분 사유를 밝히시오!"

그 말에 집행관이 피식 웃었다.

"받아들이고 말고는 수험자 당신의 마음입니다만, 그 마음이 어떠하든 흐른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요."

이미 시간은 흘렀다는 소리다.

처분은 내려졌으니 되돌릴 수 없다는 것.

깜깜한 차원문 속에 있어서 주변에 비교할 대상이 없으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순간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아무리 기관이 시험을 관리하는 권한이 있다 해도, 이런 식으로 처분을 남발할 수는 없는 법이다.

상원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집행관, 이 처분은 분명 합당하지 않소. 이건 분명히 권한 남용이오. 반드시, 그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거요."

그렇다.

정당한 사유 없이 처분을 내렸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설령 그 지위가 집행관이라고 해도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런데 대답하는 알레이다의 태도는 지극히 태평했다.

"걱정해주시는 건가요, 수험자님? 참 고맙군요."

알레이다의 외눈이 싱긋 웃었다.

'제길...!'

그래, 지금 여기서 알레이다를 붙잡고 입씨름을 해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

중요한 건 차원문 속에서 시간을 지체했다는 것.

한시라도 빨리 흑풍회의 성채로 가야 했다.

차원문의 출구를 향해 뛰는데, 갑자기 찝찝한 느낌이 상원을 강타했다.

생각해보니 이상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책임에 살고 책임에 죽는 기관원이... 이딴 식으로 처분을 내린다고? 게다가 차원문을 오가는 수험자를 붙잡고?'

차원과 차원 사이를 잇는 차원문은 불안정한 곳이다.

육도 영도 없는 정신체인 기관원은 자칫하다간 그 불안정성에 휘말려 존재 자체가 사라져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차원문 사이에 나타나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상원은 뛰다 말고 알레이다를 돌아보았다.

알레이다는 여전히 상원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상원은 천천히 알레이다를 향해 걸어갔다.

알레이다가 말했다.

"무슨 일이죠 수험자? 아직 할 말이 남았나요?"

상원이 나직이 말했다.

"당신 기관원이 아니군."

그 말에 알레이다가 지금껏 보인 적 없는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지었다.

입 끝이 귀까지 찢어진 얼굴로 알레이다가 외눈을 반짝였다.

"당신, 누구야?"

알레이다가 끌끌 대며 대답했다.

"눈치도 더럽게 빠르군, 불신자.“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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