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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118화 (118/230)

제118화. 흑풍회의 성채 (1)

상원은 끙 소리를 내며 상체를 세웠다.

진아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상원 씨, 괜찮죠? 안색이 안 좋아요."

"괜찮습니다."

덤덤하게 대답하긴 했지만 괜찮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마신 '지하의 수호자'에게 쫓겼던 생각을 하니 간담이 서늘해졌다.

벌레떼가 붕붕거리는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것 같았다.

게다가 해원향을 만났을 때는 꼼짝 없이 죽을 뻔했다.

세 번째 별의 달성 조건은 '생명의 나무에서 해원향을 죽이는 것'이다.

번호로 치면 스물다섯 번째 시험 전.

시나리오가 바뀌어서 세 번째 별의 달성 난이도가 급락했다고는 해도 해원향과 맞서야 한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니 '일곱 별의 왕관'의 턱없는 난이도가 다시금 느껴졌다.

문혁이 상원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요.”

상원은 문혁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주위를 둘러보니 낯익은 풍경이 펼쳐졌다.

일행들이 있는 곳은 터널처럼 생긴 공간이었는데, 높이만 해도 족히 20미터는 될 것 같았다.

붉은색 벽은 맥박을 따라 고동치는 혈관처럼 꿈틀거렸는데, 그 안으로 희미한 형광빛을 내뿜는 관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관이 내뿜는 빛은 복도를 다 비출 정도로 밝았다.

그래, 전생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곳이다.

세계수 줄기 통로.

벽 너머 관 속을 흐르는 건 세계수가 ‘오래된 늪지’로부터 받아오는 에너지다.

에너지의 밝기를 보아하니 ‘중원’으로 가는 차원문이 멀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상원은 수험자들의 얼굴을 보았다.

모두들 지친 표정이었다.

하나하나가 극상위권에 속하는 수험자들이었지만, 21번 시험에도 다다르지 못한 상황에서 4등급이 포함된 마물 다수를 상대하는 건 버거웠던 것이다.

그렇게 수험자들의 얼굴을 보는데 낯선 물건이 눈에 띄었다.

가로세로 1미터 정도 되는 돗자리처럼 생겼는데 그 위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에론 클라드가 말했다.

“용사님을 불러온 물건입니다. 카스파 공간계 방정식을 역으로 풀면 잔류차원자의 위상 편차를 유효근사치까지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메타 차원이 점멸하는 동안 나타나는 잔류차원자를….”

도대체 누가 저 여자를 말리나.

상원이 나직히 말했다.

“에론.”

“네…?”

“고맙습니다.”

“네? 아… 아, 네.”

상원의 말에 당황한 에론이 대답했다.

상원은 다른 수험자들을 보았다.

상원 하나만 믿고 여기까지 따라와 준 사람들이었다.

누군가가 불신자를 믿고 따른다니, 전생에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게 새삼 고마웠다.

상원이 말했다.

“문혁 씨, 중책을 맡겨서 미안하고 잘해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진아 씨도, 그리고 낙원의 수문장께도 항상 고맙고 미안합니다. 샤믹은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너무 고생이 많습니다.”

수험자들이 대답했다.

“과찬이십니다. 장군님께서 도와주셔서 그렇지요.”

“네 상원 씨. 수문장께서는 독생자의 건에 대해선 묻지 않겠다고 하시네요.”

“뭘요 대장. 다 좋아서 하는 일인 걸요.”

그래, 이런 사람들이지.

상원이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창훈 씨도 혜경 씨도 고맙습니다.”

창훈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우면 나중에 밥이나 한 끼 사십쇼.”

혜경은 ‘검은 숲의 목자’의 힘을 너무 끌어다 썼는지 제정신이 아닌 모양새였다.

“배고프다… 밥 먹을래.”

창훈이 칭얼거리는 혜경을 다독이며 말했다.

“이따가 혜경이 정신 차리면 다시 말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창훈의 말에 대답한 상원이 일행들의 선두에 섰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갑시다.”

상원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진아가 물었다.

“아 참, 상원 씨 용건은 잘 해결됐나요?”

“예, 문제없이.”

상원은 ‘밤의 주술사’로부터 얻은 신기 ‘밤의 가면’을 꺼내 보았다.

고작 가면일 뿐인데도 그 안에 턱없는 양의 마력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진아가 가면을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너무 불길한 기운이 느껴져요.”

그럴 것이다.

이 가면에 흐르는 어둠의 기운은 윤진아와는 상극이니까.

“상원 씨, 그 물건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윤진아의 말이 맞다.

이건 함부로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이걸 쓸 곳은 ‘흑풍 회장’을 만났을 때 한 번, 단 한 번이다.

흑풍 회장 ‘구두망’.

해원향 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강자, 그 역시도 시험 중반대에 있는 수험자들이 이길 수 있는 자는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밤의 가면’을 준비한 것이다.

쉽게 오지 않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예, 알고 있습니다.”

상원은 굳은 표정으로 가면을 집어넣었다.

그때 낯익은 소리가 들렸다.

“쉬이이익.”

분명히 뱀 소리였지만 워낙 낮고 둔중해서 거대한 괴물이 으르렁거리는 소리 같았다.

익히 아는 소리, 바로 4급 마물 ‘사괴왕’의 소리였다.

뒤이어 복도 저 멀리 천장에서 거대한 형체가 꿈틀거리며 기어오는 게 보였다.

‘사괴왕’이었다.

몸길이가 수십 미터는 족히 될 듯한 거대한 구렁이처럼 생겼는데, 옆구리에 악어처럼 생긴 다리들이 주렁주렁 붙어 있었다.

창훈이 너스레를 떨었다.

“사족이란 말이 있는데, 저놈 옆구리에 달린 게 바로 사족이군요.”

짐짓 쾌활하게 말하는 창훈이었지만 4급 마물의 무시무시한 기세를 무시할 순 없었는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문혁이 말했다.

“저놈이 그놈이군요.”

“네, 조심하십시오.”

문혁이 허리춤에서 재빨리 활을 뽑아 화살을 날렸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화살이 놈의 콧잔등에 푹 박혔지만 놈은 기세는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다.

창훈이 말했다.

“이런, 화만 더 돋운 것 같은데요.”

“화살 정도로는 어렵지요.”

상원이 ‘바위에 박힌 검’을 뽑아들었다.

비록 해원향의 솜털도 건드리지 못했지만, 저 뱀은 해원향이 아니다.

그때 에론이 말했다.

“요… 용사님! 뒤에도, 뒤에도 와요!”

뒤를 돌아보니, 저쪽 멀리서도 시꺼먼 형체가 구불구불 기어오고 있었다.

‘맞아, 사괴왕 놈들은 무리를 지어 생활하며 협동에도 능하지.’

진아가 말했다.

“상원씨, 어떡하죠?”

어떡하긴.

답은 하나뿐이다.

“여러분들은 뒤를 맡으십시오. 저놈은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덤덤한 상원의 말에 진아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상원 씨! 아무리 상원 씨가 강해도 저런 걸 혼자 어떻게…!”

문혁이 진아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진아 씨. 상원 씨 말을 듣지요.”

그러면서 문혁은 상원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역시, 백문혁은 냉철하다.

3번 시험에서 상처 입은 소녀를 구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했던 백문혁은 이제 웬만한 위기 상황에서도 냉철함을 잃지 않는 좋은 지휘관이 되어 있었다.

문혁이 말했다.

“샤믹, 대오의 최전방을 맡깁니다. 샤믹이 목표물과 조우해서 ‘석화의 눈빛’을 쓰고 나면 혜경 씨를 투입합니다. 진아 씨가 엄호해주시고, 창훈씨는 엄호보다는 석화 해제에 집중해주세요.”

문혁의 지휘에 다른 수험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좋다, 저 수험자들이 이 정도 조직력으로 움직이면 사괴왕 하나 상대하는 것 정도는 무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일을 한다.’

상원은 기사단의 준마를 불러내 올라탔다.

“하앗!”

기합과 함께 등자를 박차자 준마가 바람처럼 통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상원은 바위에 박힌 검에 마력을 불어넣어 긴 창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었다.

날카로운 창끝이 놈의 미간을 겨냥했다.

“쉬이이이익!”

사괴왕이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뿜으며 두 눈을 번쩍였다.

놈이 자신의 장기 ‘석화의 시선’을 사용한 것이다.

보통 수험자들이라면 저 시선을 맞자마자 몸이 돌처럼 굳어 그대로 놈의 한 끼 식사 거리로 전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신자’ 조상원에게는 그 어떤 스킬도 통하지 않으니까.

사괴왕, 겉으로 보기엔 그냥 큰 뱀이지만 놈의 지능은 상당하다.

놈의 눈동자가 당황한 듯 흔들리는 건 그 때문이었다.

그 사이 상원은 놈의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스아아악!”

놈이 소리를 지르며 입을 쩍 벌렸다.

놈의 입속에는 회칼마냥 커다랗고 날카로운 이빨들이 줄줄이 박혀 있었다.

그걸 그대로 상원에게 박을 심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명백한 오판이었다.

오히려 상원에게 약점을 노출한 꼴이었기 때문이었다.

“잘가라.”

마력을 불어넣자 빛나는 창이 쑥 늘어나서 그대로 놈의 목구멍을 꿰뚫었다.

사괴왕이 웬만한 스킬은 모두 튕겨낸다지만 상원의 신체 능력에 준마의 속도까지 더한 기술로부터 목구멍을 보호할 순 없었다.

‘고급 마물들의 머리를 수없이 꿰뚫었다. 네놈의 목구멍 하나를 못 뚫을까.’

잠시 후, 푸슉 하는 소리와 함께 새까만 체액이 꿀렁 꿀렁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크에에에에엑!”

놈이 커다란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발광을 했지만 소용없었다.

상원은 한번 물면 끝까지 놓지 않는다는 자세로 그 어떤 스킬도 없이 50개의 시험을 홀로 뚫었다.

상원은 마력을 검의 모양으로 바꾸어 놈의 목구멍에 더 깊이 찔러 넣었다.

능력치가 용력과 괴력 중심으로 바뀐 게 검을 붙잡고 매달려 있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그러자 놈의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하아압!”

힘찬 기합과 함께 검을 휘두르자 놈의 목이 뎅겅 잘려 나갔다.

놈의 몸은 목이 잘려 나간 후로도 한동안 꿈틀거렸지만 점차 그 움직임이 멎었다.

시스템 메시지가 들렸다.

[마물 ‘사괴왕’을 물리쳤습니다.]

[3천 코인을 지급합니다.]

상원은 가지에 불어넣었던 마력을 거두며 생각했다.

‘그래, 이거다.’

‘바위에 박힌 검’은 전생에 시험 중후반부를 함께 보냈던 무기다.

그걸 휘두르며 느꼈던 감각이 되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사괴왕’의 사체도 간만이군.’

상원은 사괴왕의 사체를 브라이싱크론 지갑에 집어넣었다.

이제 지갑을 통해 연결된 성전상인 록시가 사괴왕의 사체를 가공해 줄 것이다.

다른 수험자들은 잘 싸우고 있으려나.

“크아아악!”

상원이 뒤를 돌아보는 그 순간, 혜경이 사괴왕의 목을 찢고 튀어나왔다.

다른 수험자들이 합을 맞추어 사괴왕이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아 두고, 그 사이 혜경이 사괴왕에게 결정타를 입힌 것이다.

그래, 이 정도면 시험이 끝날 때까지 뒤를 맡길 수 있는 전력이다.

“고생하셨습니다.”

다른 수험자들을 격려한 문혁이 상원과 눈을 마주쳤다.

“좋습니다, 이 기세 그대로 돌파합시다.”

상원은 바위에 박힌 검을 뽑아 들고 앞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이제 ‘중원’으로 가는 차원문이 코앞이었다.

* * *

그렇게 긴 통로를 지나, 상원은 마침내 중원으로 가는 차원문에 도착했다.

그곳은 사방과 천장까지 나뭇가지로 뒤덮인 거대한 방이었다.

아니, 말이 방이지 그 넓이가 축구장 몇 개는 들어갈 만큼 넓었다.

창훈이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거… 설마 나뭇가지 사이에 있는 공간이에요? 이야, 스케일 어마어마하네.”

“맞습니다.”

창훈의 말에 답한 상원이 방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방 중앙에 낯선 물체가 있었다.

형태는 전신거울 같았는데 웬만한 건물만큼이나 거대해 보였다.

그 너머로 또 다른 세계의 풍경이 보였다.

중국풍의 널따란 도시였는데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고 그 사이로 여의도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마계의 식물들이 불쑥불쑥 자라나고 있었다.

저곳이 바로 중원, 저 세계의 끝에 세 번째 별의 목표인 흑천 교주 해원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들의 앞에 있는 게 상원의 중간 목표, ‘중원’으로 통하는 차원문이었다.

“에론, 부탁합니다.”

상원의 말에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에론이 차원문 앞으로 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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