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광야의 밤 (4)
어둠에 이빨이 있다면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어두운 허공에서 나타난 무수한 입들이 해원향의 몸을 물어뜯었다.
해원향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주신급들의 신기로도 어지간해서는 상처 입지 않는 방어력을 가진 해원향이 충격을 입고 있었다.
마신을 만난 것도 아닌데 이런 수모를 겪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러니 해원향의 저 처절한 비명엔 신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 충격도 담겨 있을 것이다.
무려 한 세계를 모조리 삼켰던 정령왕의 힘이다.
제아무리 잘난 해원향이라고 무사할 리 없었다.
밤의 주술사가 중얼거렸다.
"뱀의 종 주제에."
커다란 머리통에 새하얀 이빨을 드러낸 주술사가 상원을 향해 다가왔다.
- 나무의 자식. 네놈만 여기 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게다.
뭐라고?
상원이 피식 웃었다.
"정말로, 내가 여기 오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시오?"
가면을 쓴 주술사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정신 차리시오. 새하늘 주인은 이런 변방쯤은 언제든 들어와서 짓밟아버릴 수 있소."
주술사의 노호성이 들렸다.
-고얀!
주술사의 분노에 애꿎은 해원향이 피를 보았다.
수십 개의 입들이 더 나타나 해원향을 물어뜯은 것이다.
해원향이 비명을 질렀다.
"끄... 끄아아아악!"
하지만 해원향이라고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해원향이 처절한 비명과 함께 사지와 꼬리를 마구 휘두르자 그녀를 물고 있던 이빨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다음 드러난 그녀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머리는 마구 헝클어졌고 아름다운 비단옷은 넝마에 가까워졌으며 온몸에는 선혈이 낭자했다.
해원향이 상원을 쏘아보며 말했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살기 어린 표정이었다.
"오늘 이 수모는 절대 잊지 않으마."
밤의 주술사가 툭 내뱉었다.
"명도 질기구나, 뱀의 종아."
"흥. 당신도 똑똑히 기억해두겠다. 잡귀의 끄나풀 주제에."
"이년이!"
주술사가 노호성을 지르자 허공에 거대한 육식동물의 입이 나타났다.
그래, 저게 해와 달을 집어삼켰다는 짐승의 입이다.
산이라도 삼켜버릴 것 같은 거대한 입이 해원향을 집어삼키려고 들었다.
삼켜지기 직전, 해원향이 발을 굴렀다.
"흥!"
그러자 땅바닥에서 솟아난 거대한 덩굴들이 순식간에 해원향을 둘러쌌다.
쩍!
육식공룡이 희생양을 집어삼키듯, 허공의 입이 덩굴을 집어삼켰다.
그다음 순간, 해원향은 사라져 있었다.
그녀의 본거지, 중원에 있는 ‘생명의 나무’로 돌아간 것이다.
불청객이 사라진 자리에 밤의 사도들이 새하얗고 살찐 몸을 드러냈다.
주술사가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허어."
상원은 똑바로 일어서서 주술사를 내려다보았다.
"바깥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외면하고, 거기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는 당신들만의 질서에만 매달려 숨어있다니. 부끄러운 줄 아시오."
주저앉은 주술사가 상원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 약조... 약조가 있어.
태초의 대족장이 이들의 몫까지 대속하기로 했던 그 약조를 말하는 것이군.
이제 와서 약조에 매달리는 꼴이라.
도대체 이 자는 어디까지 저급해질 생각인가.
상원이 툭 던지듯 말했다.
"대속의 약조는 그런 식으로 내던져 놓고, 새하늘 주인은 그 약조를 지키리라 믿소?"
주술사의 탄식이 들렸다.
- 허.
밤의 주술사는 그 약조를 믿었을까?
그럴 리가 없다.
단지 새하늘 시험의 세계에 얽혀 들어가는 게 두려워 그 약조가 거짓임을 회피하고 있었을 뿐.
이들도 이제 이 안온한 세계의 변방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뿐.
그때였다.
주술사가 가면을 벗었다.
새하얀 머리통 한가운데 달린 커다란 외눈이 상원을 올려다보았다.
자그마한 주술사가 상원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상원이 여기에 온 목적, 흑풍회장을 상대하려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물건, '밤의 가면'이었다.
- 여기 있네.
주술사 곁에 나타난 사도들이 말했다.
"나무의 자식아, 가면을 받아라."
"가면을 받아라."
"가면을 받아라."
상원이 대답했다.
"좋다."
상원은 가면을 받자 가면의 크기가 상원의 얼굴에 맞게 줄어들었다.
두 눈구멍과 육식동물의 입 같은 입 구멍이 뚫린 가면은 도대체 이게 어딜 봐서 신기인가 싶을 정도로 낡고 꾀죄죄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신기 '밤의 가면'을 획득하였습니다.]
횡재였다.
상원은 가면을 브라이싱크론 지갑에 집어넣었다.
밤의 가면을 이렇게 쉽게 얻다니.
해원향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밤의 주술사가 제시하는 '주술사 증명'을 마치기 위해 진땀을 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해원향은 정말로 멋진 타이밍에 여기에 온 것이다.
그녀의 출현은 이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직면하게 하는 충격요법이었다.
해원향이 여기 오지 않았다면 '밤의 가면'을 얻는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을 텐데.
해원향은 본의 아니게 예언의 실현에 도움을 준 것이다.
'이런 걸 더러 자기실현적 예언이라고 하던가.'
상원이 피식 웃었다.
주술사가 말했다.
- 그래, 너의 말이 맞다. 우리도 이제 여기서 나갈 때가 됐지.
주술사가 뒤를 돌더니 허공에 대고 큰절을 했다.
그러자 허공에서 거대한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르르르릉...."
순간 온몸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이것이 바로 돌로라크의 세 번째 정령왕, '네 발 달린 밤'의 육성이었다.
살다 살다 이걸 육성으로 들어볼 줄이야.
상원이 침을 꿀꺽 삼켰다.
주술사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밤이시여, 밤이시여. 그대의 자손들은 이제 낮으로 돌아가나이다. 조상들의 언에 따라 깊은 밤의 얼굴은 낮으로부터 찾아온 이에게 맡기나이다."
"맡기나이다."
"맡기나이다."
밤의 사도들이 같이 큰절을 하며 말했다.
이어서 어둠 속에서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분명 발소리는 아미르고가 있는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그다음 순간, 상원은 보았다.
지평선 저 끝에서 넘실거리던 빛나는 햇살이 밤에 밀려 사라지는 것을.
세계의 변방으로 숨어버렸던 밤의 정령왕이 다시 그가 있어야 할 세계의 중심으로 복귀한 것이다.
이제 돌로라크에도 밤이 찾아올 것이다.
- 그대, 나무의 자식이여. 이제 어찌할 텐가?
"돌아가야지요.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 돌아가는 길은 아는가?
"알고 있습니다."
상원은 전음 소라기를 꺼내 들었다.
소라기를 든 사람끼리 소통하게 해주는 물건으로, 차원도 뛰어넘어 소통할 수 있다.
반대쪽 소라기는 에론 클라드에게 맡겨두었다.
상원은 에론을 불렀다.
- 에론 클라드, 들립니까?
잠시 후 정신없는 목소리가 상원의 골을 울렸다.
- 엄마야, 살려줘! 으아아악! 샤믹 조심해요! 문혁 씨... 세상에, 세상에!
상원이 피식 웃었다.
에론이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걸 보니 서울역의 정예 수험자들은 세계수의 통로를 잘 올라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상원이 다시 한번 전음을 넣었다.
- 에론, 자 침착하시고요. 이제 저를 그곳으로 불러 주십시오.
- 에... 어, 용사님 목소리가... 용사님? 용사님? 무사해요?
상원이 씩 웃었다.
- 네 무사합니다.
- 좋아요 지금 당장 부를게요. 메타 차원을 경유해야 하니까 주변이 조금 바뀔 거에요. 상원 씨를 찾는 신호가 갈 테니까 늦지 말고 받으세요.
- 알겠습니다.
툭, 전음 소라기의 통신이 끊겼다.
에론이 소환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주술사가 말했다.
- 자네, 신비한 물건을 가지고 있군. 그것도 새하늘 시험의 물건인가?
"그렇소."
- 흐흐, 나중에 하나 생기면 나 좀 주시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상원은 지갑에서 여분의 소라기를 꺼내 주술사의 손에 올려주었다.
"언젠가 이 소리기가 울릴 겁니다. 그때는... 응답을 바랍니다."
'지금처럼 비겁하지는 않길 바랍니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삐져나온 걸 꾹 눌렀다.
- 그래 그러도록 하지.
주술사가 장난감을 보는 어린아이처럼 소라기를 보며 흐흐 웃었다.
그때 사위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메타 차원으로의 전이가 시작된 것이었다.
상원은 주술사에게 작별 인사를 남겼다.
"인연이 닿거든 또 봅시다."
- 그래, 그러세.
주술사의 전음이 끝남과 동시에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메타 차원이 상원을 감싸고 있었다.
* * *
노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메타 차원은 지구를 비롯한 수많은 차원들 사이에 있는 차원이다. 메타 차원을 경유하면 수많은 차원들을 여행할 수 있지만, 메타 차원과 특정 차원 간의 차원문은 순간적으로만 나타난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니까, 잠깐 나타나는 출구를 제대로 찾지 못하면 메타 차원 사이를 떠도는 망령이 돼버린단 얘기다.
어두운 밤이었고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사아악 불어온 밤바람에 공터의 수풀이 흔들렸다.
여기가 메타 차원이라고?
상원은 자기도 모르게 욕을 뱉었다.
메타 차원의 모습이 너무나도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염병할."
노트에는 메타 차원이 어떻게 생겼는지 쓰여 있지 않았다.
수많은 반딧불들이 비추고 있는 낡은 예배당.
상원이 서 있는 곳은 다름 아닌 '하늘방'이었다.
어릴 때 누나와 같이 왔던 곳이 메타 차원이었던 건가?
아니, 그건 아직 알 수 없다.
일단 출구를 찾는 데 집중해야 한다.
에론 클라드가 신호를 줄 것이다.
그때 어디선가 상원을 찾는 전화벨이 울렸다.
뚜르르르-.
아, 저게 에론 클라드가 주는 신호다.
그런데 하늘방에 전화기가 있었나?
“젠장, 설마.”
생각났다.
하늘방에서 전화가 있는 방이라곤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하늘방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원장실.
예배당 문에 손을 댔을 때 심장이 미친 듯 고동치기 시작했다.
이 문을 열면, 대들보에 시체가 잔뜩 매달려 있는 꼴이 펼쳐져 있지 않을까.
뚜르르르
다시 한번 전화벨이 울렸다.
늦으면 안 된다.
잘못하면 메타 차원을 떠도는 망령이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 가자."
상원은 숨을 후웁 들이쉬고 낡은 예배당의 문을 열었다.
삐걱하는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렸다.
다행히도 상원이 걱정했던 풍경은 펼쳐지지 않았다.
단지 널따란 예배당이 있을 뿐이었다.
원장실은 맨 끝 방이었다.
상원은 전화기가 울리는 원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였다.
정말로 듣고 싶지 않던 목소리가 들렸다.
"상원아."
목 뒤에 털이 쭈뼛 섰다.
노트에는 이런 문장도 있었다.
[메타 차원을 오가는 존재가 수험자만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메타 차원에 마신이 있다니.
이건 분명 마신 '지하의 수호자'다.
지금껏 그녀에게 너무 많이 노출되었다.
여기서 뒤를 돌아보면 정말로 끝이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그래, 뛰어야 한다.
잠시 숨을 고른 상원은 원장실을 향해 냅다 뛰기 시작했다.
"조상원!"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는 처음에는 누나의 목소리였다가 곧 수천 마리 벌레떼가 붕붕거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등 뒤에서 벌레떼가 지분거리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 왔다.
한 걸음이라도 늦었다간 꼼짝없이 잡힌다.
그러면 메타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귀신이 되는 것이다.
상원은 바람처럼 달려서 원장실로 뛰어들었다.
온통 무채색인 방의 가장 안쪽, 책상 위에 덜렁 올라와 있는 새빨간 전화기가 울리고 있었다.
뚜르르르
상원은 수화기를 뽑아 들었다.
그러자 전화기가 상원을 쑥 빨아들였다.
"크아아아악!"
방금 전까지 상원이 서 있던 곳에서 무시무시한 비명 소리와 함께 벌레떼가 날아드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이젠 메타 차원도 마음대로 못 다니겠군.'
쿠당탕탕!
다음 순간, 상원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방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수험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원 씨, 괜찮아요?"
"대장, 대장!"
서울역의 정예 수험자들과 에론 클라드가 상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몰려온 안도감에 상원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