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116화 (116/230)

제116화. 광야의 밤 (3)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의 끝, 부서진 광야의 변방으로 숨은 밤이 거기에 있었다.

'주술사의 인장'을 받아오지 않았다면 아무리 말을 달렸어도 밤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지평선을 향해 말을 달리자 밤의 경계면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늦은 오후에서 황혼에 이르는 단계 없이, 경계면을 기준으로 대낮이 순식간에 한밤으로 바뀌고 있었다.

상원은 밤 속으로 뛰어들었다.

광야의 뜨거운 공기는 순식간에 살을 에는 추위로 바뀌었다.

말을 돌려보내고 차가운 밤의 광야를 걷기 시작했다.

'네 발 달린 밤'을 따라 세계의 변방으로 도망친 그의 추종자들은 준마의 발걸음을 따라잡지 못하니까.

그들의 모습을 보지 못할 수도 있었기에 '동굴적 감각'도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총한 별빛에 사위는 충분히 분간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사박사박 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상원의 곁에서 누군가 함께 걷고 있었다.

고개를 돌렸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새하얀 살덩어리였다.

어찌나 하얀지 밤의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리자 그것의 전체적인 형상이 보였다.

고릴라가 초고도비만이 된다면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둥글둥글한 비만체가 어기적어기적 걸을 때마다 새하얀 살이 출렁거렸다.

키가 6미터에 달하는 거구가 움직이는데도 발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정령을 받드는 '금강족'들 중 밤의 정령왕인 '네 발 달린 밤'을 따라 세계의 변방으로 도망친 추종자들, 이들이 바로 '밤의 사도'들이었다.

밤의 사도가 무심히 말했다.

"햇살이 느껴지는군."

"느껴지는군."

"느껴지는군."

사도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건가?

아니, 아니었다.

나란히 걷는 그들 곁으로 어느새 별빛과는 다른 수많은 빛덩이들이 떠 있었다.

새빨갛고 동그란 빛덩어리들, 그건 다름 아닌 사도들의 눈이었다.

상원의 곁에서 걷던 사도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둥그런 얼굴 한가운데 새빨갛고 동그란 외눈이 박혀 이글거리고 있었다.

"너는 낮으로부터 왔는가?"

"낮으로부터 왔는가?"

"낮으로부터 왔는가?"

주변에 있던 다른 사도들이 이어서 말했다.

꿀꺽, 상원은 침을 삼켰다.

노트에서만 보았을 뿐, 밤의 사도들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 모습을 충분히 상상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상당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하나하나의 추정 등급은 6등급, 게다가 다수.

섣부르게 움직였다간 여기서 쥐도 새도 모르게 탈락하는 수가 있었다.

상원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 왜인가?

이번에는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상원을 바라보던 사도들의 눈빛이 모조리 꺼졌고 상원의 곁에 있던 사도도 조용히 사라졌다.

그 대신 아주 낮은 곳에서 작고 동그란 불빛이 나타났다.

상원은 그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눈빛의 주인도 새하얀 외눈 금강족이었는데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겨우 상원의 허리춤에나 올까 말까 한 꼬마였다.

몸에 비해 머리는 유달리 컸고 온몸에 쭈글쭈글한 주름이 져 외계인처럼 보였다.

이 자가 바로 '네 발 달린 밤'으로부터 신내림을 받은 '밤의 주술사'다.

상원은 신중하게 말했다.

"대속의 조건을 이행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상원의 말에 화답하듯 수많은 속삭임이 들렸다.

"대속의 조건..."

"대속의 조건..."

주술사가 입을 열어 잔뜩 쉰 목소리로 외치자 속삭임이 끊겼다.

"물럿거라!"

이후 한동안 주술사는 말이 없었다.

시간이 없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침묵하겠다는 건가?

그렇다고 대속의 조건 하나만 믿고 섣불리 입을 여는 것도 위험한데.

머릿속에서 복잡한 계산이 돌아가는데 주술사가 먼저 전음을 보냈다.

- 너는 나무의 자식이구나.

"그렇소."

주술사가 상원에게 슬금슬금 다가와 손을 높이 뻗어 상원의 얼굴을 만졌다.

가늘고 차가운 손가락이 대주술사에게 받은 '주술사의 인장'을 만지고 있었다.

- 메드냅, 정령님들과 종들 사이의 질서까지 깨더니 나무의 자식에게 인장이라. 갈 데까지 갔군.

주술사의 전음에서 비웃음이 느껴졌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꼬장꼬장하기는.'

그러는 당신들은 그렇게 잘나서 시험에 대응하는 건 낮의 존재들에게 맡겨두고 세상의 변방으로 도망쳤소,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걸 꾹꾹 눌렀다.

- 우리는 가지 않겠소. 정령님들과의 질서를 저버린 주술사와의 약속은, 약속이라 부를 만한 것이 아니오.

"뭐요?"

- 게다가 여기 온 자네를, 우리는 주술사로 인정할 수 없소. 정령님들과의 질서를 깬 자가 내리는 인장을 인장이라 할 수 있다는 말이오?

순간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허."

밤의 주술사가 순순히 '밤의 가면'을 줄 확률이 반반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여기서 바로 가면을 받으면 운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 자들이 원하는 '주술사 증명'이라는 복잡한 과업을 치러야 했다.

주술사 증명을 거치는 동선도 염두에 두긴 했지만, 세계수 안에서 혈전을 치르고 있을 서울역의 수험자들을 생각하면 동선이 지나치게 촉박했다.

젠장, 그래.

'기왕 주술사 증명을 해야 한다면 빨리하자.'

그때였다.

솟구치는 짜증을 억누르며 입을 여는 순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마력이 상원의 온몸을 짓눌렀다.

"!!"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드러지는 교태와 무시무시한 권위가 동시에 담긴 목소리, 바로 흑천 교주 해원향의 목소리였다.

"흑천께서 말씀하신 불신자가 바로 당신이로군요."

뒤를 돌아보니 정말로 흑천 교주 해원향이 서 있었다.

3미터에 달하는 거구를 덮은 새까만 비단옷엔 뱀 비늘 모양의 금색 자수가 오밀조밀하게 새겨져 있었고, 그 비단옷으로도 풍만한 몸매는 가려지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모습은 똑똑하게 보였는데, 그건 그녀가 광야의 어둠을 밀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 정말로 틀림없는 흑천교주 해원향이었다.

'도대체 저 여자가 왜 지금 여기에 나타난 거지?'

해원향이 커다란 발을 내딛자 밤 전체가 통째로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해원향이 말했다.

"흑천의 가르침을 펼치는 데 당신이 크나큰 걸림돌이 될 거란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거 좋은 말을 하러 온 건 아니군.

지금 여기, 돌로라크의 변방은 엄밀하게 말하면 마신의 영토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다른 마신 '오랜 땅의 이무기'를 섬기는 해원향이 저런 식으로 여기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젠장, 그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어야 했는데.'

이제 밤의 사도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상원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그렇다고 이 먼 곳까지 교주께서 직접 납십니까?"

"싹을 미리 자르기 위해서라고 해두지요."

그때 주술사가 외쳤다.

"삿된 뱀의 종이 여기에는 어인 일이냐!"

그 말에 해원향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얼굴에는 뱀 비늘이 돋아올랐고 세로로 날카로워진 눈동자에선 냉랭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깔깔깔깔, 귀신이나 떠받드는 놈들 주제에!"

다섯 마신들 간의 사이는 그렇게 좋지 않다.

서로가 서로의 세계를 파괴했던 사이이니 그럴 수밖에.

"이런 무엄한!"

주술사의 외침과 동시에 해원향의 주변에 나타난 밤의 사도들이 그녀를 향해 묵직한 몽둥이를 휘둘렀다.

상원의 눈으로도 따라잡기 어려울 만큼 빠른 동작이었다.

하지만, 해원향은 그 정도 수준을 뛰어넘은 괴물이었다.

퍽!

해원향의 꽁무니에서 나타난 꼬리가 순식간에 사도 셋의 머리를 꿰뚫어버렸다.

"그어어어억."

커다란 육신들이 쿵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6등급 셋을 저렇게 보내버리는 무력이라니.

시험 최후반부에 다다른 주신급 승천자들도 버거워하는 괴물이 해원향이었다.

고작 6등급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주술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 이런!"

"귀신 섬기는 원숭이들은 가만히 계십시오. 그대들한테 볼일이 있는 게 아니니."

해원향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아름다운 얼굴에 싱글거리는 미소를 머금고 상원에게 저벅저벅 다가왔다.

상원의 머릿속이 빠르게 굴렀다.

정면 승부?

전혀 승산이 없다.

회귀해서 1분 전으로 돌아가는 건?

그때도 세계의 변방에 있는 이상 해원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면 '끝없는 지하'로라도 도망쳐야 하나?

아니, 그건 늑대 피하겠다고 호랑이굴로 들어가는 꼴인데?

'꼬여도 단단히 꼬였군.'

그때였다.

청록색 비늘에 뒤덮인 해원향의 꼬리가 상원의 머리통을 꿰뚫어버릴 기세로 날아왔다.

다행히도 급습에 대비는 하고 있던 차였다.

상원은 있는 힘껏 옆으로 몸을 날렸고, 해원향의 꼬리는 방금 전까지 상원이 서 있던 허공을 꿰뚫었다.

해원향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어머나, 피해버렸네요."

'안 되겠다. 일단 시간이라도 벌어야겠어.'

상원이 '바위에 박힌 검'을 양손에 단단히 쥐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강신회로에 담겨 있던 두 정령왕의 마력이 바위에 박힌 검에 흘러 들어가며 그 이름에 걸맞은 양손 검의 모습을 이루었다.

번개와 용암을 동시에 두른 양손 검, 웬만한 마물은 일격에 보내버릴 수 있지만 상대는 해원향이다.

"잔재주가 많군요, 불신자."

해원향이 꼬리를 쏘았다.

몸을 날려 피했다간 그대로 꼬챙이가 되어버릴 것이다.

어떻게든 간에 흘려내는 수밖에 없다.

50번 시험에 다다르도록 상원을 지켜주었던 검술이 본능적으로 발동됐다.

상원은 해원향의 꼬리를 대검으로 아슬아슬 빗겨냈다.

단지 빗겨냈을 뿐인데도 두 팔이 부서질 것 같은 어마어마한 충격이 느껴졌다.

그래도 이것으로 한 합은 벌었다.

상원은 젖 먹던 힘을 다해 지면을 박찼다.

해원향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졌고, 상원은 해원향의 새하얀 목을 향해 대검을 찔러넣었다.

하지만 해원향이 고운 손가락으로 대검을 잡았다.

"애쓰는군요."

콰지직!

'바위에 박힌 검'에 불어 넣었던 마력이 깨져 나가며 상원은 털썩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해원향이 커다란 발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다음 생에는 흑천의 가르침 속에서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회귀 시간은 1분이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야 하나?

그렇다면 세 번째 별은 어떻게 하지?

젠장, 플랜 비로 가야겠군.

그때였다.

해원향이 내몰고 있던 변방의 어둠이 순식간에 해원향을 뒤덮었다.

그다음 순간, 어둠 속에서 나타난 무수한 이빨들이 해원향의 온몸을 물어뜯었다.

"으아아아아악!"

해원향이 비명을 질렀다.

아, 어둠의 이빨!

상원은 고개를 돌려 주술사를 쳐다보았다.

주술사의 얼굴에는 새빨간 눈 대신 새하얀 이빨이 드러나 있었다.

주술사가 '밤의 가면'을 쓴 것이다.

그래, 저 힘이라면 해원향을 물리칠 수 있다.

이 존재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상원이 외쳤다.

"드디어 칩거를 깨실 생각을 하셨군! '네 발 달린 밤'!"

상원의 외침에 화답하듯 해원향 근처로 무수한 이빨들이 끊임없이 생겨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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