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115화 (115/230)

제115화. 광야의 밤 (2)

상원은 바람 속에서 하늘의 정령왕 '깊은 하늘의 괴조'로부터 신내림을 받은 주술사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상원은 돌로라크의 바람이 알려주는 대로 말을 달렸다.

부서진 광야의 건조하고 뜨거운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말을 달리는 동안 광야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잔나비 떼와 둥지를 짓고 있는 성성이 한 쌍을 보았고, 들범 무리를 치는 금강족의 목동도 보았다.

말을 모는 동안 황량한 황무지와 짙푸른 초원이 번갈아 나타났는데, 간혹 투박한 천과 두꺼운 목재로 얼기설기 지은 천막들을 볼 수 있었다.

그게 초원에서 유목 생활을 하는 금강족들의 거처였다.

근육질의 고릴라를 닮은 금강족들은 평균 키가 4미터에 달하는 거구들이었는데, 위협적인 외양과는 달리 이들도 나름의 전통과 문화를 가진 고등 종족이었다.

잔나비는 1급, 들범은 2급, 성성이는 3급 그리고 금강족은 4급.

새하늘 시험 속에서는 급수로 분류되는 마물일 뿐이었으나, 이들에게도 각자의 생활상과 이야기가 있었다.

지구에서는 한낱 마물일 뿐인 이들이 삶을 살아가는 곳, 돌로라크는 그런 땅이었다.

그리고 그 돌로라크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인 '아미르고'에 금강족의 대주술사 '뮈노 메드냅'이 있었다.

그곳이 바로 상원의 목적지였다.

한참 말을 달렸는데도 밤은 찾아오지 않았다.

밤의 정령왕 '네 발 달린 밤'이 새하늘 시험을 거부하고 은둔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끝없는 낮을 달린 끝에, 마침내 상원의 눈앞에 금강족의 최대 도시 '아미르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선 눈에 들어온 건 거대한 산이었다.

그냥 보기에는 높지 않은 동산처럼 보였지만 그건 주변에 비교할 지형지물이 없기에 느껴지는 착시일 뿐, 상원은 사실 그 산이 어마어마하게 높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산 위로는 때아닌 먹구름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니 산을 빙 두른 목책과 불쑥불쑥 솟아오른 탑들이 보였다.

목책은 산과 비교하니 장난감처럼 작아 보였지만 사실은 다림델의 성벽에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만큼 거대했다.

마침내 상원은 목책 앞에 다다랐다.

들범들을 거느린 금강족 전사 둘이 도시로 통하는 입구를 막고 있었다.

상원은 준마를 돌려보내고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지구의 호랑이보다 커다란 들범들이 으르렁거리며 상원을 경계했다.

금강족 전사가 소리쳤다.

"멈춰라."

상원이 다가오는 것을 멀리서부터 알아차렸기 때문인지 그의 말투는 비교적 평이했다.

다른 하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나무의 자식이로군."

나무의 자식, 새하늘 시험의 다른 구성원들이 지구인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었다.

이들은 자기들의 세계에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을 그렇게 경계하지 않았다.

이미 들은 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미르고의 전사들을 만났을 때 해야 할 말은 알고 있었다.

바로 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예언과 관련된 말이었다.

이들 사이에선 언젠가 돌로라크에 나타난 지구인이 하늘과 땅의 주술사를 찾을 것이라는 예언이 전해 내려온다.

"부르심이 있으실 줄로 아오."

그 말에 금강족 전사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가 다시 상원을 보았다.

"하늘과 땅의 주술사를 만나러 왔소."

하늘과 땅의 주술사란 금강족의 대주술사 '뮈노 메드냅'을 뜻했다.

금강족 전사가 상원에게 말했다.

"따라오시오."

등을 홱 돌린 전사가 상원을 보지도 않고 목책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4미터에 달하는 거구가 성큼성큼 걷는 속도는 상당했는데, 굳이 그 뒤를 종종거리며 따라가야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상원이 물었다.

"말을 타도 되겠소?"

"좋으실 대로."

'아미르고' 가운데 있는 산은 금강족의 영산으로, 원래는 아미르고에 들어가려면 탈것을 탈 수 없다.

하지만 대주술사 뮈노 메드냅이 주술사는 평생 하나의 정령에게만 종사해야 한다는 규율을 깨고서 두 정령왕을 동시에 신내림 받은 이후, 돌로라크에서 영험함이란 사라져 버렸다.

다름 아닌 대주술사가 힘을 위해 규율을 깰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겨버렸으니까.

그 일 이후 금강족에게 정령이란 필요할 때 힘을 가져다 쓰는 에너지원처럼 돼버렸다.

'그래, 에너지원에게 영험함을 느끼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그러므로 길을 안내하는 전사를 따라가려거든 탈것을 이용하는 게 좋다.

도시를 지나는 동안 꽤 많은 금강족을 마주쳤는데, 그들은 상원을 흘끗 돌아보았을 뿐 그다지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도시를 지나 영산의 기슭에 다다랐다.

영산은 멀리서는 평탄한 동산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가파르고 험준한 바위산이었다.

금강족 전사가 툭 던지듯 말했다.

"놓치지 말고 잘 따라오시오."

그리고 금강족 전사가 산길을 휘척 휘척 걸어 오르기 시작했다.

금강족의 커다란 거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젠장, 이래서 탈것을 타라 그랬구만.'

멀어지는 금강족 전사를 따라 말을 몰았다.

괴력 60에 용력 70의 능력치로도 도보로는 따라잡기 어려운 속도였지만, 말을 타니 어렵지 않게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한참을 올라간 끝에 상원은 산의 정상에 닿았다.

영산의 정상은 축구장 몇 개를 합친 것만큼 널따란 평지였다.

하늘 위로 꾸물거리는 먹구름이 영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서서히 소용돌이치고 있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 모습이 하늘을 뒤덮은 커다란 괴물처럼 보였다.

그리고 정상의 중앙에 상원이 찾는 사람이 있었다.

다른 금강족들과는 달리 깡마르고 털이 다 빠져버린, 가죽이 쭈글쭈글한 노인.

돌로라크의 대주술사 '뮈노 메드냅'이었다.

누가 그를 보고 두 정령왕의 신내림을 동시에 받은 대주술사라고 생각하겠는가?

하지만 상원은 이미 마신 ‘태초의 대족장’이라는, 그 존재의 진면목을 보았다.

꿀꺽

상원이 마른침을 삼켰다.

금강족 전사가 명상에 잠긴 대주술사에게 말했다.

"나무의 자식을 데려왔습니다."

대주술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사장실에 불려온 사원처럼, 금강족 전사는 한시라도 더 여기 있기 싫다는 듯 냉큼 내려가 버렸다.

상원이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대주술사."

대주술사의 전음이 들렸다.

- 그래, 오랜만이네.

중앙섬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대주술사에서는 끝없는 여유가 느껴졌다.

대주술사에게 다가가자, 그가 가부좌를 풀고 몸을 일으켰다.

볼품없는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형형한 눈빛이 상원을 꿰뚫었다.

더없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상원은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주술사의 인장'을 받으러 왔습니다."

주술사의 인장은 정령을 받드는 주술사가 되었다는 표식이었다.

'밤의 가면'을 얻으려면 그게 반드시 필요했다.

대주술사가 피식 웃었다.

- 맡겨 놓은 거 찾으러 온 사람처럼 말하는군.

"안 주실 이유는 없는 걸로 압니다."

- 새끼 정령 하나랑도 교류하지 않는 자가 주술사의 인장이라니 도둑놈 심보 아닌가?

대주술사의 말대로, '주술사의 인장'을 받으려면 정령의 신내림을 받아야 했다.

상원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정상적인 진행으로 인장을 받으려 했다면 적게 잡아도 몇 주는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상원은 이미 정령과 교류를 한 바 있다.

바로 이 돌로라크의 중앙섬에서 다름 아닌 대주술사로부터 정령의 힘을 복사하지 않았는가.

상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저도 어르신과 같은 정령을 모시고 있습니다만?"

상원이 양팔에 마력을 불어넣자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문신이 빛나기 시작했다.

[강신회로를 개방합니다.]

[마신 '태초의 대족장'의 힘을 전개합니다.]

태초의 대족장의 힘, 실로 오랜만에 불러내는 힘이었다.

육체능력 위주로 의체가 조정된 탓에 힘의 강도는 예전만 못했지만 그 강렬함은 여전했다.

물론 눈앞에 있는 원본에 비하겠냐마는.

대주술사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 도둑놈 심보인 게 아니라 그냥 도둑놈이었구만. 그래도 정령을 모시는 게 맞긴 하니 인장을 드리긴 하지. 이리 오시게.

전음을 마친 대주술사가 땅바닥에서 흙을 한 움큼 쥐더니 하늘에 대고 흩뿌렸다.

흩날린 흙은 대주술사의 몸을 감싼 바람결을 타고 저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대주술사의 손에는 검은색 액체가 남아 있었다.

그것이 바로 '주술사의 인장'을 그릴, 정령의 힘이 담긴 물감이었다.

대주술사에게 다가가자 그가 상원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상원의 얼굴 정도는 한 번에 짓이겨버릴 것 같은 커다랗고 억센 손은 의외로 따뜻하고 상상 이상으로 섬세했다.

대주술사가 입을 열어 남자와 여자와 아이와 노인의 목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지금껏 들었던 어떤 노래와도 비슷하지 않은 노래였다.

"산정 외려 금날에 정령 걸이에 모시니 천하에 지하에 바람에 구름에 천둥에 햇살에 드신 영들에 걸이로 승화할 광야의 자손이 오만 영들을 뵙나이다."

대주술사는 노래를 마치는 동시에 손을 뗐다.

그가 상원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 허허, 잘 그려졌군.

"고맙습니다."

- 고맙긴. 주술사가 인장을 받는다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

그래, 맞는 말이긴 하다.

- 어떻게 가는지는 알겠지?

'네 발 달린 밤'이 있는 밤의 영토로 가는 길을 아는지 묻는 것이다.

물론 알고 있다.

그것도 노트에 쓰여 있었으니까.

"서쪽으로 가면 됩니다. 밤을 따라잡을 때까지."

- 그가 순순히 자네에게 가면을 주겠는가?

"네 발 달린 밤은 대속의 조건을 어기지 않을 겁니다."

새하늘 시험이 돌로라크를 덮쳤을 때 두 정령왕과 대주술사는 새하늘 주인과 타협했고, 그 결과가 바로 수험자가 아닌 마신과 마물이 되어 시험에 차출되는 것이었다.

그래, 어떻게 보면 오십 개의 시험이라는 끝없는 도탄에 빠지는 건 아니었으니 수험자보다는 마물이 되는 게 나은지도 몰랐다.

나머지 정령왕인 '네 발 달린 밤'과 그의 추종자들은 마신도 마물도 되지 않는 대신 세계의 변방으로 도망치는 쪽을 택했다.

물론 새하늘 주인의 손아귀는 그렇게 벗어날 수 있는 정도로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하늘 주인이 더이상 그들에게 손을 대지 않은 건 마신이 된 '태초의 대족장'이 대속을 통해 그들의 짐까지 지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태초의 대족장이 고작 7번 시험 같은 곳까지 모습을 드러내는 이유이기도 했다.

여하튼 태초의 대족장이라고 자선사업가는 아니어서, 네 발 달린 밤에게 조건을 걸었다.

언젠가 금기를 깨고 두 정령을 동시에 받은 주술사가 밤의 영토에 들어가거든 그때는 세계의 중심으로 돌아와야 할 거라고.

대주술사가 빙글 웃으며 말했다.

- 자네도 두 정령왕의 힘을 받은 건 맞지만 말이야, 그 동네 친구들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텐데?

"기본적인 조건은 충족됐습니다. 나머지는 입증하면 됩니다."

- 그 입증 하다가 황천 갈 수도 있어.

"황천은 이미 다녀왔습니다. 어르신 덕분에요."

"하하하하하!"

대주술사의 파안대소에 먹구름이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벼락을 내뿜었고 굉음과 함께 산이 통째로 흔들렸다.

그래, 이 자가 이런 괴물이었지.

- 그래, 행운을 비네.

"고맙습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아예 낄낄대며 웃는 대주술사를 뒤로 하고 상원은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 속도에 좀 놀라기는 했는지 금강족들이 지나치는 상원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쏜살같이 아미르고를 벗어난 상원은 서쪽으로 말을 몰았다.

곧 저 멀리 지평선에 어둠이 걸리기 시작했다.

밤의 영토에 접어든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