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광야의 밤 (1)
다시 서울역의 중앙지휘본부, 상원은 전술지도를 보고 있었다.
그 옆으로 서울역의 최정예인 다섯 수험자, 백문혁, 윤진아, 한창훈, 송혜경, 샤믹 프란시스코가 둘러서 있었다.
상원의 설명을 들은 그들의 표정이 심각했다.
당연할 것이다.
저 지옥 같은 여의도에 단 다섯 명이 들어가야 한다니.
문혁이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니까 시험이 시작하기 두 시간 전에 세계수에 도착해서, 그 안에 있는 통로를 따라 올라가야 한다는 거군요. 그때가 세계수의 차원문이 열리는 영향으로 주변을 지키는 마물들이 약해지는 때이니.”
역시, 백문혁의 요약은 간결했다.
“맞습니다.”
진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태성 어르신을 모셔 가면 안 돼요? 어르신의 치료 능력이면 큰 도움이 될 텐데.”
그것이라면 이미 검토해보았다.
“안 됩니다. 어르신 스스로 석화를 풀 방법이 없어요.
혜경이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아으, 젠장. 조건들이 너무 까다롭다.”
창훈이 웃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이런 데 차출되다니, 강한 것도 죄라면 죄군요.”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말투에선 씁쓸함이 느껴졌다.
그들과는 달리 샤믹은 별달리 긴장한 표정이 아니었다.
“다섯 명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까 저희한테 맡기는 거겠죠. 그렇죠 대장?”
상원을 바라보는 샤믹의 눈에서 무한한 신뢰가 느껴졌다.
상원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다섯에게 지시한 작전은 21번 시험 시작 두 시간 전에 세계수의 줄기를 통해 중원으로 가는 차원문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다섯 명의 전력이라면 그것 자체는 문제 될 게 없었다.
앞을 가로막는 마물들을 처리하고 달리면 되니까.
상원의 대답에 다른 수험자들의 표정이 풀어졌다.
어쨌거나 이들도 상원의 말을 신뢰하는 사람들이었으니 상원의 대답에 안심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상원이 말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조건이 하나 있다는 것.
“사실 통로를 오르는 건 여러분뿐만이 아닙니다. 한 사람을 더 데려가야 합니다.”
문혁이 물었다.
“그게 누구지요?”
“에론 클라드입니다.”
상원의 대답에 수험자들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파이에벨의 중앙마나기관 총관리자였고, 지금은 서울역의 대장장이인 에론 클라드는 전투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최정예 전투원 다섯 명만 움직이는 것도 아슬아슬한데 에론까지 함께 움직이는 건 너무 벅차다고 느껴질 것이다.
혜경이 목소리를 높이고 말했다.
“에론… 은 전투원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저 위험한 델 데려가야 한다고요?”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윤진아가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에론을 보호하면서 움직여야 한다는 거네요.”
끄덕.
“석화는 어떡하죠? 태성 어르신도 못 버티는 걸 에론이 견딜 수가 있어요?”
“있습니다. 드워프는 석화에 내성이 있어요.”
간결한 대답에 창훈이 탄성을 질렀다.
“아하.”
팔짱을 끼고 전술지도를 보던 문혁이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샤믹의 말처럼, 가능한 작전이니까 지시하셨을 겁니다. 에론을 보호하면서 움직일 수 있도록 전술을 짜겠습니다.”
진아가 걱정 어린 말투로 말했다.
“문혁 씨는 방어선 구축도 지휘하셔야 하잖아요.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해안선의 귀신’께서 보우해주시고 계십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 안에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역시 백문혁, 그렇게 믿음직할 수가 없다.
창훈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우리 같이 록시한테 가서 물약이랑 아이템이나 잔뜩 삽시다. 지금까지 모아 놓은 코인이랑 신앙은 여기서 탈탈 털어야 되겠네요.”
혜경이 덧붙였다.
“어우, 또 물약이야? 이렇게 먹어대다가는 아주 약물 중독자 되겠어.”
혜경의 말에 다른 수험자들이 가볍게 웃었다.
마물로 들끓는 이계의 정글에 고작 다섯 명이서 들어가야 한다니, 말이 쉽지 아주 곤란한 작전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별다른 불만 없이 그 작전을 수락했다.
다른 이유 없이, 오로지 상원을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을 보니 지금까지 꽤 잘 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습니다. 쉽지 않을 겁니다만, 이게 최선의 방법입니다.”
상원의 말에 수험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샤믹이 물었다.
“에론한테도 이 작전을 들려줘야죠?”
“네.”
혜경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
“아니… 우리야 상원 씨 믿으니까 순순히 가겠다고 하지만, 에론이 거기를 가겠다고 할까?”
상원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가겠다고 할 겁니다. 분명히.”
* * *
에론 클라드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지… 진짠가요? 진짜로 도약계 변형장치를 써볼 수 있는 거예요?”
에론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녀가 말하는 도약계 변형장치란 특정 차원문의 목적지를 바꿀 수 있는 장치였다.
그 장치를 이용하면 세계수의 차원문을 통해 중원이 아닌, 차원의 틈새에 숨겨진 흑풍회의 성채로 갈 수가 있었다.
상원이 그녀에게 ‘브라이싱크론 지갑’을 맡기면서 제작을 부탁한 물건이었고 이제 막 시제품이 완성된 참이었다.
본인이 만든 시제품을 써볼 거라는 생각에 에론의 얼굴에는 설렘과 기쁨이 넘쳐흘렀다.
그녀의 말을 들은 창훈이 물었다.
“그런데 도약계 변형장치가 뭔데요?”
샤믹이 그딴 건 묻지 말라는 얼굴로 창훈에게 눈치를 주었지만 이미 늦었다.
에론이 폭포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아…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되지? 사실 차원 이동의 도약계를 변형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어요. 그중에 효과가 가장 확실한 게 도약계의 좌표쌍 형성 방식을 상호쌍에서 교차쌍으로 바꾸는 건데, 그렇게 하려면 이게 또 메타 차원을 경유해야 되거든요? 그래서…”
대충 자기가 만든 기계가 엄청나다는 얘기다.
그 얘기를 듣는 창훈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혜경이 상원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 물었다.
“상원 씨는 저거 다 무슨 얘긴지 알아요?”
“그럴 리가요.”
단지 노트에 ‘도약계 변형장치를 이용하면 흑풍회의 성채로 갈 수 있다’고 쓰여 있었을 뿐이다.
그 이면의 원리 같은 건 굳이 알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진아가 에론의 말을 끊고 물었다.
“에론, 에론? 제대로 들은 거 맞죠? 우리랑 같이 저 섬에 들어가야 한다고요.”
에론이 방실방실 웃은 얼굴로 대답했다.
“네, 제대로 들은 것 맞는데요?”
하나도 제대로 안 들었군.
여하튼 이것 하나만 제대로 전달했으면 됐다.
“에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피를 먹는 세계수의 차원문에 가서 도약계를 변형해주시면 됩니다. 변경된 도약계 좌표쌍은 이따가 따로 적어드리겠습니다.”
에론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맡겨만 주세요.”
그래, 흑풍회의 성채에 가는 건 이 정도면 됐고.
그 전에 할 일이 있었다.
바로 밤의 가면을 얻기 위해 광야의 밤에 가는 것.
거기에 가기 위해선 다른 물건이 있어야 한다.
아마 에론이 그것도 만들어 두었겠지.
"에론, 혹시 부탁드렸던 '잔류차원자 추적기'는 다 되었나요?"
짝, 에론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아, 그럼요 그럼요. 거의 다 됐어요 이제 샘플 테스트 한 번 하면 시제품은 완성입니다. 오늘 안엔 끝나요."
다행히도 이번엔 그 누구도 '잔류차원자 추적기'가 무엇인지 에론에게 묻지 않았다.
"좋습니다 에론. 완성되면 기별 부탁드립니다. 바로 써야 할 곳이 있습니다."
좋다, 이 정도면 준비가 끝났다.
* * *
과연, 그날 저녁 '잔류차원자 추적기'가 완성되었다는 에론의 전갈을 받았다.
전갈을 받은 상원은 에론을 데리고 전쟁기념관으로 향했다.
전쟁기념관, 7번 시험을 치를 때 마신 '태초의 대족장'의 영토인 '부서진 광야'로 가는 차원문이 열린 곳이었다.
다시 찾은 전쟁기념관은 여전히 마물로 득시글거렸다.
앞을 가로막은 마물들을 간단히 정리하면서, 상원은 차원문이 열렸던 본관으로 향했다.
본관에는 7번 시험의 목표가 된 성역을 상징하는 토템도, 부서진 광야로 향하는 차원문도 없었다.
그래서 에론을 데려왔다.
에론이 만든 잔류차원자 추적기를 사용하면 부서진 광야로 향하는 차원문을 잠시나마 다시 열 수 있으니까.
잔류차원자 추적기는 상원의 손보다 조금 큰, 납작한 팔각형 기계였다.
에론이 기계를 본관 한가운데 놓고 조작하니, 곧 기계 위로 누르스름한 차원문이 열렸다.
에론이 말했다.
"됐습니다. 돌로라크로 가는 포탈입니다."
돌로라크란 '부서진 광야'의 원래 이름이다.
에론이 그 이름을 아는 건 상원이 가르쳐주었기 때문이었다.
상원이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면서 상원은 만웅에게서 회수했던 전음 소라기 한쪽을 에론에게 주었다.
에론이 세계수 속의 차원문에 다다랐을 때 상원을 부르기 위해서였다.
전음 소라기는 에론의 솜씨로 깔끔하게 수리돼있었다.
에론이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용사님 실력이야 의심하지 않지만... 돌로라크는 워낙 무시무시한 곳입니다. 조심하세요."
물론 그녀는 상원이 이미 돌로라크에서 그 땅의 주인을 만나고 왔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도 걱정해주는 마음은 고마웠다.
"네. 말씀드린 대로, '중원'으로 가는 차원문에 도착하시면 연락 주시면 됩니다. 에론도 몸조심하세요."
"걱정 붙들어 매시죠."
쾌활하게 대답하는 에론을 뒤로 하고 상원은 차원문 속으로 몸을 던졌다.
* * *
[부서진 광야에는 짐승들이 있으매, 창공의 짐승과 대해의 짐승 그리고 심야의 짐승이 가장 강대하더라. - 승천계시록 제25권 제3장 제26절]
상원이 외웠던 새하늘교의 경전과 노트에 의하면, 승천 시험을 떠받치는 다섯 마신에게는 각각의 사연이 있다.
개중 '태초의 대족장'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돌로라크'는 금강족이며 성성이, 잔나비 같은 유인원들과 정령들이 공존하는 차원이었고 그들 사이를 규율하는 나름의 질서가 있었다.
새하늘 시험이 돌로라크를 덮쳤을 때 한 주술사와 두 정령왕이 질서를 깨고 결합해 마신이 되었으며, 새하늘 주인에게 협력하는 것을 대가로 수험자가 되지 않기를 약속받았다.
물론 모든 돌로라크인이 거기에 동의한 건 아니었다.
돌로라크의 세 정령왕 중 마지막인 '네 발 달린 밤'과 그 추종자들은 협력을 거부하고 은둔했다.
상원이 돌로라크에 가는 이유가 바로 그 네 발 달린 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세 번째 별을 얻으려면 흑풍 회장을 상대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네 발 달린 밤'의 힘이 담긴 신기 '밤의 가면'이 필요했으니까.
그러려면 우선 금강족의 대주술사 '뮈노 메드냅'을 만나야 한다.
눈을 뜨자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쨍한 하늘과 싯누런 황야가 끝없이 펼쳐진 땅, 바로 '부서진 광야'였다.
전에 왔을 땐 20층의 흑마술 양초와 어미 문어의 다리를 가지고 중앙섬으로 직행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중앙섬까지 도보로 이동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여의도에서 상원을 기다릴 일행들을 생각하면 일정이 촉박하기 그지없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천리 길도 한달음에 달리는 기사단의 준마가 있으니까.
'깊은 하늘의 괴조'의 힘이 깃든 왼팔을 하늘로 뻗으니 바람을 따라 중앙섬의 기운이 느껴졌다.
"가자."
방향을 잡자마자 준마를 불러내고 박차를 밟았다.
기사단의 준마가 거친 광야를 박차고 바람처럼 내달리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