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콘크리트 마천루 (1)
여의도의 빽빽한 숲속으로 몸을 던지자 순간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가득 밀려와, 상원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헙.”
전생에서도 수도 없이 맡은 냄새인데, 역시나 맡아도 맡아도 적응이 되지 않는 냄새였다.
밤섬에서 그랬던 것처럼 ‘동굴적 감각’이 발동되며 이계의 숲 아래 어둠 속이 훤히 꿰뚫어 보이기 시작했다.
무성하게 자란 기괴한 식물들이 독성을 가득 머금은 포자를 뿜고 그 사이로 수천 마리 벌레떼가 오가는 모습은 밤섬에서 보았던 것과 같았다.
하지만 밤섬과는 다른 점이 있었는데, 여기저기 시체가 널려 있었다는 점이었다.
말을 타고 지나가는 눈으로 보기엔 포자와 덩굴에 뒤덮인 돌덩어리처럼 보였지만 상원의 날카로운 시선은 그것들이 사실은 죽은 지 채 며칠 되지 않은 시체라는 걸 간파했다.
‘피를 먹는 세계수가 자란 이후로 만들어진 시체들이군.’
여의도에 있는 성역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수험자들이었을 것이다.
서강대교와 이어진 의사당대로 위에는 시체가 즐비했고 늪지 늑대인간 같은 마물들이 득시글거렸다.
웬만한 소형차만큼이나 거대한 준마는 마물들의 사이를 사뿐하게 밟으며 의사당대로를 바람처럼 가로질렀다.
늪지 늑대인간들이 으르렁거리며 상원을 뒤쫓았지만 허사였다.
말을 달리며 오른편을 보았다.
상원의 오른쪽에 서 있는 거대한 국회의사당은 이미 이계의 식물들로 뒤덮여 있었고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원래는 여기도 꽤 큰 성역이 있었는데.’
하지만 성역 <국회의사당>은 테라포밍의 영향을 직격으로 받고 삽시간에 멸망해버렸다.
국회의사당의 수험자들 중 어느 누구도, 하루아침에 자라난 ‘피를 먹는 세계수’가 일으킨 테라포밍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기관의 방송사는 여의도의 상공에서 나무를 비추고 있었을 뿐 성역 국회의사당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비춰주지 않았다.
그렇게 국회의사당의 수험자들은 지금까지 그들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와는 하등의 관계없이, 감당할 수 없는 재앙에 직면해 무력하게 죽어갔을 것이다.
불합리해 보여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승천 시험이라는 게 원래 그런 불합리로 가득 차 있으니까.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로지 승천뿐이다.
하늘을 향해 빽빽하게 솟은 나무의 가지를 칭칭 휘감은 바늘 구렁이들이 상원의 목숨을 노리는 건 밤섬이나 여의도나 마찬가지였다.
밤섬에서와 같이 고글을 전개해서 구렁이들을 쓸어버렸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문득 들려온 소리에 상원은 귀를 기울였다.
스르르륵.
마치 커다란 뱀이 움직이는 것 같은 소리였다.
바늘 구렁이들이 내는 것과 비슷한 소리였지만 그보다 훨씬 둔탁하고 컸다.
세계수 근처에서 저런 소리를 내는 놈이라면 하나뿐이다.
4급 마물 <사괴왕>.
웬만한 스킬은 통하지 않는 비늘을 온몸에 두른 데다가 석화 능력이 있는 눈빛으로 수험자들의 몸을 굳게 만드는 지독한 놈이었다.
말을 달리며 세계수 쪽을 보니 거대하고 시커먼 형체가 나뭇가지들을 휘감으며 꿈틀꿈틀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놈의 샛노란 눈이 반짝였다.
상원이 눈썹을 꿈틀했다.
‘저놈이 벌써 나온다고?’
게다가 세계수 근처에 서식하는 사괴왕이 저놈 하나뿐일 거라는 보장도 없다.
무리를 짓는 놈들의 특성상 저놈 말고도 몇 마리가 더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세계수 공략 작전이 예상보다 힘들어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괴왕들을 상대해야 한다면 어중이떠중이들을 데려와 봐야 그들의 밥만 될 뿐이다.
석화 능력을 버티며 싸울 수 있는 소수 정예를 투입해야 했다.
상원의 머릿속에 몇 사람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세계수까지 들어와서 석화를 버티며 싸운다. 우선 샤믹 로드리게스에, 송혜경과 한창훈, 윤진아에 백문혁.'
당장 머릿속에 떠오른 가용 인원은 그 정도였다.
조금 더 생각을 해보았지만 더 투입할 인원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이 21번 시험이 끝날 때까지 버틸 수는 있는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지?
그때 상원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흑풍회 투사들이 나오는 시험은 굳이 끝까지 버텨야 할 필요가 없다.'
흑풍회 투사들이 등장했던 전생의 26번 시험의 내용은 제한 시간 동안 흑풍회로부터 성역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들 성역을 방어하는 데 급급했지만, 사실 그 시험은 흑풍회 투사들이 이 세상으로 건너오는 차원문에 도달하면 끝났다.
다만 전생의 상원은 밀물처럼 몰려오는 흑풍회 투사들을 뚫고 차원문까지 닿을 힘이 없었기에 쉬운 방법으로 시험을 끝내지 못했을 뿐.
이번에는 사정이 다르다.
저 다섯 명이면 어떻게든 세계수 가지 속에 숨겨진 차원문에 닿을 수 있다.
그러면 조합식을 이용해서 상원이 직접 흑풍회의 산채로 향하는 차원문을 건너가면 된다.
물론 그 전에 광야의 밤에 가서 신기 '밤의 가면'을 얻어야 한다.
상원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게 없으면 흑풍회장을 꺾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엄청나게 촉박한 동선이군.'
생각을 마친 상원이 등자를 세게 밟았다.
"쉬이이이익."
사괴왕이 내는 소리가 등 뒤 저편으로 멀어졌다.
어느새 숲의 어둠 저편으로 빛나는 구멍이 보였다.
의사당대로의 끝이었다.
* * *
샛강의 건너편으로도 침식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밤섬만큼 심하진 않았다.
'오래된 늪지'의 침식은 주변에 물이 많을수록 빨리 진행되므로, 샛강의 기슭보다는 밤섬의 침식이 훨씬 빨랐던 것이리라.
이계의 식물들이 뿜어내는 포자들 사이로 말을 달리자 다시 눈에 익은 폐허의 모습이 나타났다.
강어귀의 분위기는 강하고 사나운 마물들이 돌아다니는 점에서는 한강 이북과 비슷했지만 사람이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달랐다.
서울역을 중심으로 한강 북쪽의 연합된 성역들이 운용하는 마물 사냥 파티 같은 건 구성할 여력이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승천 시험이 원래 이렇지.'
사실은 한강 남쪽의 분위기가 전생과 비슷했다.
전생의 서울역은 회귀한 상원이 공들여 키운 지금과는 완전히 딴판이었기에 한강 이북을 통솔할 여력도 리더십도 없었거니와, 다른 성역들도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성역들 간의 단단한 협력 같은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따라서 모든 성역들이 부족한 자원을 가지고 서로 투쟁하는 양상이 벌어진 것이다.
물론 모든 성역들이 그런 아귀다툼의 틈바구니에 떨어진 건 아니었다.
개중에는 특출나게 강한 수험자들이 있어 주변의 성역들을 통솔하기도 했다.
보라매공원의 오상형이나 강남의 유성희, 그리고 지금 상원이 찾아가는 자, 콘크리트 회장 강상중처럼.
그들이 집단을 통솔하는 스타일은 각기 달랐다.
'기어다니는 거수'에게 잡아먹히다시피 한 오상형이 인신공양집단, 사이비 교주였던 유성희가 사이비 종교라면 조폭 출신 건설사 회장이었던 강상중은 조직을 정말로 조직폭력배처럼 운영했다.
준마를 타고 영등포역을 지날 때쯤 상원은 강상중의 영역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했다.
딱 봐도 조폭처럼 보이는 험상궂게 생긴 덩치들이 도로 한 쪽에 몰려 있던 것이다.
아마 강상중이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운영하는 행동대일 것이다.
말을 타고 그대로 지나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저놈들을 족치는 게 강상중을 만나는 데 도움이 될 거란 판단이 섰다.
강상중의 근거지는 대림역이었지만, 그가 지금 대림역에 있을 거란 보장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준마를 살살 몰아 그놈들에게 다가가니 그놈들이 살벌한 눈빛으로 상원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한 놈이 일어서서 말했다.
"어이! 너 뭐냐!"
상원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회장을 만나야겠다."
상원의 대답에 놈들이 일제히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강상중이를 만나야겠다고."
상원은 준마의 소환을 해제하고 '바위에 박힌 검'으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그들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들 중 한 놈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일어서려는데 먼저 일어서있던 놈이 그를 말렸다.
"아니 저런 미친...."
"참아라, 저런 놈들 한두 번 보냐. 어이, 뭐 요새 힘든 일 있는 모양인데 마사지 받고 정신 차릴 거 아니면 그냥 가쇼."
말하는 걸 보아하니 그놈이 대장인 모양이었다.
시비를 당하고도 먼저 달려들지 않는 걸 보니 강상중이 조련은 잘 시킨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저 정도 감정 조절이라니, 그 점에서 저들이 강상중 지근거리의 수하들이란 건 확실해졌다.
다시 한번, 상원이 나직이 말했다.
"강상중이를 만나야겠다니까."
이번에는 행동이 더 빨랐다.
"아니 이런 미친놈이 회장님이 뉘집 개인 줄 아나."
아까 일어서려던 놈이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상원에게 날 듯이 달려왔다.
놈의 주먹에선 시뻘건 오라가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웬만한 수험자는 저 주먹에 맞았다간 무사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긴 그 정도는 해야 강상중의 행동대라고 할 수 있겠지.
물론 그놈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상원은 '바위에 박힌 검'을 살며시 내뻗어 달려드는 놈의 목을 그대로 눌렀다.
겉으로 보기엔 하얀 나뭇가지일 뿐이지만 무려 원탁의 기사단이 통째로 봉인돼있는 고급 성물이다.
울대를 눌린 놈이 컥컥 소리를 내며 목을 쥐고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한 놈이 순식간에 무력화되자 다른 놈들이 순식간에 상원에게 달려들었다.
"이런 젠장!"
"썅!"
그들 모두 한 가닥씩은 하는 놈들이었고, 당연히 상원의 상대는 되지 않았다.
나비가 날아가듯 사뿐한 동작으로 상원은 놈들의 급소에 나무 막대를 살포시 꽂아 눌렀다.
술력을 낮추고 용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의체가 개조된 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나무 막대기에 부하들이 순식간에 제압당해버리자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대장이 침을 꿀꺽 삼켰다.
상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위에 박힌 검으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놈에게 다가갔다.
"잘못 들었나 본데 다시 한번 말해줄까? 니놈의 회장을 만나야겠다고."
"네. 가... 가시죠."
놈이 상원의 위세에 눌려서 주춤 주춤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놈이 엄한 곳으로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상원이 덧붙였다.
"생각 잘해. 머리 잘못 굴렸다간 당신도 부하들 같은 꼴이 될 거야."
"아... 알겠습니다."
"그래. 걸음이 좀 느린데 빨리 걸을 순 없나?"
"네... 넵!"
열심히 다리를 놀리는 사내를 따라 상원이 설렁설렁 뛰기 시작했다.
괴력 60에 용력 70, 설렁설렁 달리는 상원보다 빠른 수험자는 서울 시내에 없다고 봐도 좋았다.
뒤를 돌아본 놈은 도저히 상원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눈을 질끈 감고 달리는 방향을 바꾸었다.
'그래, 이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이지.'
곧 저 멀리 건물들 사이로 기괴하게 솟아오른 마천루가 보였다.
상원은 거기에 강상중이 있음을 직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