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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111화 (111/230)

제111화. 피를 먹는 세계수 (4)

수험자가 꽉 찼던 동부역과는 달리 서부역은 한산했다.

깨진 보도블록을 밟으며 길 건너 폐허가 된 건물들과 아무렇게나 널린 시체들을 보니 절체절명의 아포칼립스에 던져졌다는 게 다시 실감되었다.

그렇다.

폐허와 시체, 체념과 절망, 이게 묵시록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승천 시험의 원래 모습이었다.

수험자들이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농담을 주고받는 서울역은 지극한 예외일 뿐이었다.

서울역도 폐허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상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선 안 되지."

성역 서울역은 상원의 기반이었다.

후반으로 갈수록 세력전 양상을 띠게 되는 승천 시험에서, 세력의 구심점인 서울역을 잃어버리면 '일곱 별의 왕관'을 달성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아직 21번 시험도 시작하기 전인데 피를 먹는 세계수가 여의도에 나타난 건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세계수는 지구를 마신 '오랜 땅의 이무기'의 영토 '오래된 늪지'처럼 테라포밍한다.

세계수를 통해 이 세계에 건너올 흑풍회 투사들이 세계수의 종자를 여의도 밖으로 가지고 나오면 테라포밍은 가속화된다.

그럴수록 서울역의 안위는 위태로워질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흑풍회 투사들이 강을 건너오지 못하도록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이다.

상원이 중얼거렸다.

"남서쪽... 남서쪽이라...."

한강 북쪽에 있는 대부분의 성역들은 서울역의 지휘하에 있다.

반면 남쪽은 다르다.

한강 주변으로 강력한 마물들이 득시글거리는 지금 같은 환경에서는 강을 건너 연락을 주고받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일이다.

한강 이남의 성역들을 지휘한다는 건 어불성설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의도 남서쪽 강변에 방어선을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대림역에 자리 잡은 콘크리트 회장이 일대를 틀어쥐고 있는 게 오히려 다행이다.

강상중만 통하면 일대의 성역들을 움직여서 한강 남서쪽에 방어선을 칠 수 있으니까.

"좋아, 가자."

긴 막대기로 유리를 두드리듯, 상원은 '바위에 박힌 검'을 허공에 살짝 휘둘렀다.

그러자 상원의 뒤에서 저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새까만 준마가 다가오고 있었다.

새까만 마구의 눈구멍에서 불길이 이글거렸다.

바위에 박힌 검으로 불러낸 '원탁의 기사단'의 준마였다.

성물 '바위에 박힌 검'에는 아주 오래된 신화시대에 전설의 땅에서 말을 달리던 원탁의 기사들이 통째로 봉인되어 있었다.

상원이 불러낸 말은 그 기사단의 것이었다.

연옥에서 만난 원탁의 기사단은 '인큐버스의 아들'이 환영술로 불러낸 환영이었지만, 이 말은 실체가 있는 진짜였다.

말의 콧잔등에 손을 대자 말이 푸르릉 하고 불길로 된 콧김을 뿜었다.

상원이 말했다.

"오랜만이다."

그래, 이 말을 타고 승천 시험의 세계를 누볐었다.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너를 기억한다.'

엷게 웃은 상원이 익숙한 동작으로 등자를 밟고 안장에 올라탔다.

시야가 순식간에 높아지며 이대로 달려서 어디에라도 닿을 수 있을 듯한 마음이 차올랐다.

상원이 등자를 박차며 말했다.

"가자. 그때처럼 달려보자."

"푸히히힝!"

힘찬 포효와 함께 전설의 땅을 달리던 거대한 준마가 폐허가 되어버린 아포칼립스의 서울 땅을 밟으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순간 벅차오르는 마음에 상원은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 * *

목적지는 대림역.

상원이 잡은 경로는 공덕에서 마포를 거쳐 서강대교를 지나 여의도를 가로지르는 것이었다.

여의도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여의도 공원에 자라난 '피를 먹는 세계수'가 여의도를 얼마나 테라포밍했는지는 화면만으로는 보이지가 않았다.

테라포밍 상황이 예상했던 것보다 심각하다면 그만큼 방비를 단단히 해야 했다.

그건 흑풍회의 투사들이 더 강한 버프를 받을 거라는 얘기였으니까.

서강대교를 향해 달려가는 동안 폐허가 된 서울의 풍경이 스쳐 갔다.

부서진 아스팔트, 무너진 건물, 곳곳에서 일어난 화재 그리고 몰려다니는 마물들과 싸우는 수험자들.

지옥과도 같은 전생의 풍경 그대로였고 달라진 건 없었다.

강력한 성화로 보호받는 서울역 근처는 사정이 좀 나았다.

서울역에서 멀어질수록 더 강하고 사나운 고등급 마물들이 나타났고, 수험자의 수는 줄어들었다.

기사단의 말은 마물들의 사이를 바람처럼 가르며 나아갔다.

그 강대한 기사단을 태우고 신화의 땅을 질주하던 말이니, 지금 서울에 깔린 마물들이 발로는 따라잡을 재간이 없었다.

기사단의 말을 타니 서울역에서 서강대교에 이르는 거리가 순식간이었다.

한강 근처까지 가니 2등급을 넘어서는 마물들이 득시글거렸고 수험자라고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었다.

그렇게 달린 끝에 상원은 서강대교 초입에 다다랐다.

우선 눈에 들어온 건 여의도를 통째로 점령한 거대한 세계수였다.

여의도 한복판에 원자폭탄이 떨어져서 버섯구름이 솟아난다면 그런 형상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세계수는 그와 같이 가공할 재앙 같은 자태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다음에 들어온 건 서강대교 한가운데 자리 잡은 밤섬이었다.

세계수의 영향력이 벌써 밤섬까지 미쳤는지, 밤섬은 벌써 이 세상의 섬이라고 부를 수 없는 형상으로 변해 있었다.

뱀처럼 구불거리는 가지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키가 30미터는 돼 보이는 거대한 나무들이 하늘 높이 뻗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자라난 나무들이 서강대교 한가운데를 터널처럼 감싸고 있었다.

서강대교를 지나 여의도로 가려면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저 음습한 나무숲을 지나야 하는 것이었다.

저 섬에 서식하는 마물들은 상당히 강하다.

보통 수험자들에게는 저 꼴이 된 서강대교를 단신으로 지나는 일이란 말 그대로 자살행위였다.

하지만 상원에겐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21번째 시험에도 들어서지 않은 지금 타이밍에 밤섬에 있을 만한 마물이라면 끽해봐야 3등급이 고작이었다.

그 정도라면 속도로 찍어 누르면 그만이다.

‘좋다.’

“쓰읍!”

한 번의 숨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공기를 배에 채우고서, 상원은 등자를 힘차게 박찼다.

그러자 기사단의 말이 가공할 포효를 내지르며 쏜살같이 서강대교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밤섬을 뒤덮은 이계의 나무들이 만든 시꺼먼 구멍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상원은 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고 터널 속으로 몸을 던졌다.

순간 곰팡이 냄새를 가득 머금은 이계의 눅눅한 공기가 상원을 덮쳤다.

다섯 번째 시험에서 '오래된 늪지'를 모방한 차원 던전에 다녀온 이후 실로 오랜만에 맡아보는 냄새였다.

기사단의 말이 아스팔트를 박차며 내는 다그닥거리는 소리가 주변을 둘러싼 나무숲에 부딪혀 되돌아와 귓전을 가득 울렸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이 세계의 것이라고는 하기 어려운 커다란 벌레들이 날아다니며 어슴푸레한 빛을 내뿜었다.

'세계수에 의해 완전히 침식당했군.'

공기만으로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때였다.

[의체에 대한 공격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스킬 '동굴적 감각'을 발동합니다.]

동굴적 감각에 의해 주변이 대낮처럼 밝게 보였다.

그러자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나았을 법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진청록색 이끼가 잔뜩 낀 거대한 나무의 껍질에 뱀이라 해도 믿을 만큼 커다란 벌레들이 수천 마리씩 떼지어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뭐, 그 정도쯤이야.

지금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다.

천장을 뒤덮은 나뭇가지들을 휘감고 꿈틀거리고 있는 은색 형체들, 바로 2등급 마물 '바늘 구렁이'들이 상원에게 바늘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있으면 젓가락만 한 바늘들이 상원에게 날아들 테고, 그걸 무시하고 그대로 달렸다간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대바늘이 꽂혀 유령 신세가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답은 저놈들을 먼저 날려버리는 것이다.

다행히도 손상된 스킬 메모리엔 저놈들을 날려버리기 딱 좋은 스킬이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상원은 스킬을 준비했다.

[요새 수호자의 시선(3)을 사용합니다.]

[스킬에 맞추어 의체를 최적화합니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양 귀 앞쪽이 갈라지며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바라보는 풍경의 오른쪽 아래 네모난 창이 떴는데, 귀에서 튀어나온 금속 조각들이 펼쳐지면서 고글이 달린 금속질 가면이 되어 코 위의 얼굴 절반을 가렸다.

의체의 변형된 모양이었다.

귀 앞에서부터 펼쳐진 강철 가면이 얼굴을 덮고 이어서 고글을 통해 새로운 인터페이스가 눈앞에 펼쳐졌다.

새빨간 삼각형들이 나타나 가지를 휘감은 바늘 구렁이들을 정확하게 가리켰다.

[목표물 24개체 확인.]

[스킬을 사용합니다.]

인터페이스 메시지에 이어 한순간 눈앞이 눈부신 청록색으로 물들었다.

전에는 입으로 발사하더니 이번엔 '요새 수호자의 시선'이라는 스킬 이름에 걸맞게 눈으로 발사한 모양이었다.

스킬 메시지가 먼저 떴다.

[목표물 제거 완료.]

시선이 향했던 곳을 따라 하늘이 보였다.

스킬이 하늘을 뒤덮었던 가지들을 모조리 뚫어버린 것이다.

역시 5등급 마물의 주력 스킬에 걸맞은 위용이었다.

그 직후 폐허가 되어버린 서울의 매캐한 공기가 훅 뿜어져 왔다.

밤섬을 통과한 것이다.

2급 마물 24마리를 치워 버린 것도 순식간이었고, 상원이 탄 기사단의 말이 밤섬을 통과한 것도 순식간이었다.

스킬이 밤섬의 마물들을 자극했는지 뒤에서 마물들이 울부짖는 소리와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저것들을 상대하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았으니까.

다시 눈앞에 여의도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상원은 자기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런 젠장."

테라포밍의 진행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빨랐기 때문이었다.

세계수의 굵직한 뿌리가 벌써 강변까지 뻗어 나와 있었고, 건물들의 외벽을 따라 뱀 같은 덩굴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오래된 늪지'의 토양이 썩은 내를 풍기며 다리를 뒤덮기 시작했고 그 위로 기괴한 식물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상원은 판단을 내렸다.

'이 정도면 여의도에 있는 성역들은 애진작에 멸망했겠군. 성역을 거점으로 삼는 건 안 되겠어.'

일이 조금 더 어려워졌다.

애당초에 상원이 생각한 작전은 여의도 안에 1차 방어선을, 강 건너편에 2차 방어선을 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의도가 이 상태라면 1차 방어선을 치는 건 무리다.

작전을 바꿔야 했다.

'방어선은 강 건너편에만 만들고, 정예를 꾸려서 세계수 안에 있는 차원문까지 치고 들어가야겠다.'

이 세계로 건너오는 흑풍회 투사들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세계수의 가지에 둘러싸인 차원문까지 직접 치고 올라가는 방법이었다.

문제는 그러려면 차원문에 이르는 삼엄한 경비를 뚫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차원문 건너편에서 쓸 아이템을 얻기 위해 조금 더 빡빡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선택지는 그것뿐이니까.

상원은 말을 몰고 여의도를 빽빽하게 뒤덮은 이세계의 정글 속으로 뛰어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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