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110화 (110/230)

제110화. 피를 먹는 세계수 (3)

스크린은 하늘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내려다보는 듯한 각도로 거대한 나무를 보여주고 있었다.

바람에 우수수 흔들리는 빼곡한 나뭇잎들 아래로 초록색 줄기가 이어졌다.

나무가 상식을 뛰어넘을 정도로 큰 탓에 여의도의 마천루들이 미니어처처럼 조그맣게 보였다.

여의도 광장 한복판을 떡 점령하고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거대한 나무, 바로 '피를 먹는 세계수'였다.

상원이 중얼거렸다.

"이런."

문혁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저게 스크린에 나타난 게 벌써 이 주째입니다. 처음엔 놀라웠죠. 스크린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 것도 그렇고 스크린에 나타난 게 저런 괴물이라는 것도 그렇고 했지만... 두 주째 저러고만 있으니 다들 신경 끄고 있지요."

문혁의 말마따나 수험자들의 표정은 평온했다.

그런 풍경이라도 늘상 보다 보면 지겨워지지 않겠는가.

더구나 여기 있는 모두가 인류의 9할 9푼이 죽는 광경을 보았던 사람들인데.

게다가 피를 먹는 세계수가 하는 일이라곤 지금 당장은 저런 식으로 위화감을 조성하는 것밖에 없었다.

창훈이 말했다.

"매스미디어 시대의 아포칼립스라는 게 이런 거 아니겠어요. 누가 요즘 같은 세상에 하늘에서 내려와 가지고 봉인 떼고 나팔 불고하겠어요? 기관장 아줌마도 이제 귀찮아서 그런 거 안 하나 보더만."

문혁이 웃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사실 스마트폰이 부서지지 않았으면 저 화면도 스마트폰으로 나오고 있었겠죠?"

그 말에 창훈이 시험의 표식을 보여주었다.

"하하, 우리끼리는 이게 스마트폰 아닙니까?"

창훈의 말마따나 승천 시험의 세계에선 시험의 표식이 스마트폰의 역할을 대신한다.

저걸 통해서 수호신과 소통하고 코인도 저기에 넣어서 다니니까.

시시덕거리는 두 남자와 달리 상원의 표정은 심각했다.

상원이 놀란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스크린이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건... 기관의 방송국이 활동을 시작했단 얘긴데?'

도대체 어떤 누가 저런 걸 찍어서 스크린으로 송출해준단 말인가?

기관이 거느린 방송사뿐이다.

수험자들이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승천 시험의 분위기는, 25번째 시험쯤 가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명성을 날리기 위해 경쟁하는 분위기로 바뀌게 된다.

그때 활동을 시작하는 게 기관의 방송사다.

저렇게 승천 시험에서 해결해야 할 장면들을 비춰주면서, 교묘하게 수험자들의 경쟁 심리와 공명심을 자극한다.

방송사가 피를 먹는 세계수를 비춰주는 건 전생에도 있던 일이니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분명히 지금... 21번 시험이 시작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벌써 저놈들이 활동을 시작했다고?'

아무래도 상원이 시험을 비틀어버린 영향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방송국이 이렇게 이른 타이밍에 활동을 시작한 걸 설명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일곱 별의 왕관'을 향한 상원의 여정이 다른 수험자들에게 알려질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건 당연히 좋지 않은 일이었다.

도대체 어떤 승천자가, 승천하는 데 수호 계약이 반드시 필요한 게 아님을 증명하는 걸 예쁘게 보아준다는 말인가?

'화산정의 혐오체'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수험자 하나하나를 상대하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승천 시험을 치르는 수험자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건 얘기가 다른 문제였다.

상원은 혀를 찼다.

'쯧... 앞으로 좀 사리긴 해야겠군.'

그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얼굴만 한 뿔테안경을 쓴 조그만 여자, 윤진아였다.

"문혁 씨! 창훈 씨!"

그녀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양옆으로 '검은 숲의 목자'의 화신 송혜경과 '가라앉은 거인'의 화신 샤믹 로드리게스가 함께 있었다.

"벌써 점심 먹을 시간이에요."

샤믹의 밝은 얼굴을 보니 적응이 끝난 것 같았고,

"어우 여보, 배고파 죽겠다 빨리 밥 먹자."

혜경은 여전히 먹성이 좋았다.

재잘거리며 다가온 세 여자의 시선이 상원에게 닿았다.

그들 중 가장 먼저 상원을 알아본 건 샤믹이었다.

"어... 어! 용사님! 오랜만이에요!"

샤믹의 말에 진아와 혜경이 얼른 상원에게 달려왔다.

혜경이 상원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맞네, 맞네. 조상원 씨네. 아이고 그 알에서 잠만 쿨쿨 퍼 자다가 영영 안 일어나는 줄 알았지 뭐예요?"

진아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정말, 너무 오랫동안 안 나온 거 아니에요?"

상원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 오래 있을 거라곤 생각을 못 했습니다. 여튼 다들 무사히 잘 계셨군요. 샤믹도 환영합니다. 어떻게, 서울역은 좀 지낼만 하신가요?"

상원의 말에 샤믹이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그럼요. 아주 아주 좋아요. 음식도 맛있고... 무엇보다도 여기는 성화가 정말 어마어마하게 강한 게 안심이 돼요."

그럴 것이다.

지금까지 얼마나 공들여 키운 성화인데, 지금은 지구상의 어딜 가도 저것 같은 성화는 볼 수가 없다.

"맞는 바지가 없긴 한데...."

"이태원 가까우니까 한 번씩 가서 가져오고 그래요."

혜경이 샤믹의 말을 이받았다.

그런 식의 평범한 대화들.

상원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이들은 일상을 이어 가고 있었다.

시험을 치르는 나날을 평범한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듯,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선 어떤 부자연스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저… 만웅이는 어디로 갔습니까?”

문혁이 대답했다.

“회장님이라는 사람을 따라갔습니다. 상원 씨를 보면 신세 진 건 잊지 않겠다고 전해달라 하더군요.”

아아, 그럴 줄 알았다.

아나르에서 강상중을 만났으니 그를 따라갔겠지.

언젠가 또 만날 것이다.

그때였다.

갑자기 전광판의 화면이 회색으로 바뀌면서 잡음이 들렸다.

치이이익!

갑작스런 잡음에 수험자들이 귀를 막았다.

상원은 무슨 일인지 알 것도 같아 유심히 화면을 쳐다보았다.

'이 타이밍에 화면 전환이라.'

지구의 수험자들이 피를 먹는 세계수를 바라보는 이 순간 화면이 전환될 일이라면, 또 다른 보스의 출현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차원 아나르에서 오디나스가 맡았던 역할을 하고 있는 자.

다음 순간 잡음이 멎고 화면이 바뀌었다.

화면에 모습을 드러낸 건 흑단 같은 머리칼에 새하얀 피부를 한 교태 넘치는 인상의 여자였다.

승천 시험을 통틀어서, 하늘에 오르지 못한 자들 중 가장 아름다운 자를 꼽으라면 대부분이 저자를 꼽을 것이다.

화면 속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 제 말씀 좀 들어보십시오."

간드러지는 동시에 알 수 없는 설득력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저는 흑천교주 해원향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께 저희 흑천교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래, 저 여자일 줄 알았다.

흑천교주 해원향.

중원 출신으로 흑천교라는 마교를 일으켜 중원을 통째로 정복해버린 괴물.

세 번째 별의 달성 조건이 바로 ‘생명의 나무’에서 저자를 죽이는 것이다.

상원은 복잡한 감정이 담긴 표정으로 해원향을 쳐다보았다.

해원향의 미모에 수많은 수험자들이 넋을 잃고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한창훈도 그중 하나였다.

“오… 예쁘다.”

“어쭈, 눈 돌아가는 소리 들리지? 죽는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눈이 돌아가기는 무슨요.”

혜경이 두 눈을 시꺼멓게 물들이며 나직이 말하자 창훈이 침을 꿀꺽 삼키며 손사래를 쳤다.

해원향이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이어진 환란에 지치셨을 겁니다.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겼지만 언제까지 그런 일을 겪어야 할지 기약도 없으실 겁니다. 여러분이 왜 그런 도탄에 빠지셨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의 잘못이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이 삿된 가르침을 받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가르치는 자들은 힘이 없습니다. 저희 흑천교의 품으로 오십시오. 흑천님의 힘에는 끝이 없습니다. 불로장생의 가르침이 여기 있습니다."

그 말에 승천자들이 술렁였다.

"삿된.. 가르침? 무슨 말이야? 설마 수호신을 얘기하는 건가?"

“불로장생…? 승천을 시켜준다는 거지?”

“저런 분이 승천시켜준다면 따라가고 싶네.”

해원향의 목소리엔 강한 마력이 담겨 있었다.

그 마력을 가지고 지금까지 승천 시험의 그 누구도 노골적으로 얘기하지 않았던 '수호신의 힘'이라는 주제를 얘기하니 수험자들이 홀리는 게 당연했다.

과연 중원을 집어삼킨 마교의 교주 다운 현란한 솜씨였다.

문혁이 외쳤다.

"다들 정신 차리십시오. 저런 말에 잘못 넘어갔다간 사이비 교주의 꼭두각시 신세를 면치 못할 겁니다."

문혁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수험자들이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진아의 물었다.

“상원 씨, 저 사람도 수험자예요? 아니면 승천자?”

“둘 다 아닙니다. 굳이 따지자면 후자에 가깝기는 합니다만.”

“승천자에 가깝기는 하지만… 흑천교주라는 건 섬기는 우상이 따로 있다는 뜻이지요?”

“예 있지요. ‘오랜 땅의 이무기’라고.”

그 말에 주변에 있던 수험자들의 얼굴이 굳었다.

오랜 땅의 이무기, 승천 시험을 떠받치는 다섯 마신 중 하나.

모든 이무기들이 용이 될 때까지 용이 되지 않고 남기로 한 존재.

그것이 해원향이 이야기하는 '흑천'의 정체였다.

샤믹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저 여자도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적이라는 거군요.”

“맞습니다.”

“강합니까?”

“강합니다. 오디나스는 상대도 안 될 만큼.”

표정이 굳은 건 상원과 문혁의 대화를 들은 다른 수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해원향이 씩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들께 흑천의 가르침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불로장생에 이르는 완전한 힘, 거기에 다다르는 방법은 흑천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뿐임을 부디 여러분들께서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뚝, 화면이 꺼지고 이어서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72시간 뒤, 스물한 번째 시험 <검은 바람>을 시작합니다.]

[성역에서 가장 가까운 세계수로부터 <흑풍회>의 투사들이 성역을 습격합니다.]

[시험 시작까지 남은 시각: 71시간 59분]

검은 바람, 전생에서와 같은 미션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전생에는 <검은 바람>을 치를 때 ‘피를 먹는 세계수’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피를 먹는 세계수는 오랜 땅의 이무기의 힘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므로, 흑풍회 투사들은 그때보다 훨씬 강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흑풍회 투사들은 세계수의 종자를 가지고 건너올 것이다.

흑풍회 역사들이 종자를 심어 세계수가 불어나기 시작하면 그때는 일이 걷잡을 수 없어진다.

그러므로 지금 해야 할 일은 단지 서울역을 지키는 게 아니라, 여의도의 세계수로 가서 흑풍회 투사들이 여의도를 벗어나지 못 하게 하는 일이었다.

상원은 그 내용을 천천히 문혁에게 설명했다.

"알겠습니다. 이거 수성전이 아니라 포위전이군요. 여의도를 포위하려면... 이거, 병력이 좀 많이 필요하겠는데요."

"지도를 보면서 배치를 고민해봅시다."

상원의 말에 문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다시 전술 지도가 있는 중앙지휘본부로 향했다.

* * *

문혁이 전술 지도를 보면서 말했다.

"여의도 북동쪽을 막는 건 문제 없습니다. 주변 성역들이 함께 움직이면 대교 세 개를 막는 건 문제 없어요. 문제는 남서쪽입니다. 여기는 다리도 너무 많은 데다가 우리와 협력이 되는 성역도 적습니다."

그러면서 문혁이 여의도 남서쪽을 가리켰다.

그쪽에는 서울역과 다른 색으로 표시된 성역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중에 유독 커다란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무리의 중심에 있는 성역, 바로 성역 대림역이었다.

상원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눈치챈 문혁이 말했다.

"그쪽에 있는 성역들... 구심점이 따로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도 대림역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세력이 있었다.

대림역에는 바로 그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콘크리트 회장."

상원의 말에 문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우호 관계를 맺어보려고 했지만 자존심이 보통이 아니더군요."

문혁의 말을 들은 상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에 할 일을 정했기 때문이었다.

"강상중을 만나고 오겠습니다. 문혁 씨는 주변 성역들을 독려해서 여의도 북서쪽 강변에 1차, 강 건너 강변으로 2차 방어진을 구축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문혁에게 지시를 내리고 지휘본부 밖으로 나섰다.

사흘이면 강상중으로 하여금 남서쪽 강변에 방어선을 구축하게 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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