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109화 (109/230)

제109화. 피를 먹는 세계수 (2)

벽 한쪽에 걸린 전술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서울역 일대만 담았던 전술지도에는 이제는 서울 전역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건 성역 <서울역>이 서울 시내 대부분의 성역들을 지휘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X 표시는 성화가 꺼진 성역을 뜻했는데, 상원이 예상했던 것보다 많았다.

상원은 전술지도를 보면서 눈쌀을 찌푸렸다.

'X가 너무 많다. 21번째 시험인데 저 정도라고?'

창훈이 말했다.

"상황이 좋지 않았는데 상원 씨가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문혁이 상원을 따라 전술 지도를 보면서 말했다.

"아나르에 가지 않은 수험자들이 느끼기엔 16번째 시험의 난이도가 너무 높았을 겁니다. 직접적으로 저희 도움을 받는 곳은 어떻게 버텨나가고는 있습니다만... 다른 성역들의 상황은 서울역에서 멀어질수록 절망적입니다."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도 했다.

전생에서 16번 시험은 아나르에 가지 않았던 수험자들을 위한 배려 차원에서 그렇게 어렵지 않았는데, 상원 때문에 전체적인 시나리오가 뒤틀려 버린 지금은 16번 시험부터가 그렇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전술지도를 찬찬히 살펴보는데 특이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여의도 위에 그려진 커다란 나무 그림이었다.

설마...?

상원이 물었다.

"저거... 설마 진짜 나무입니까?"

그 나무가 생각하는 그것은 아니길 바랐다.

상원의 물음에 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창원이 질린 듯한 얼굴로 말했다.

"원 참... 승천 시험 치면서 이런 꼴 저런 꼴 봤다지만 그런 건 처음 봤습니다. 세상에 무슨 나무가 빌딩보다 큰지... 63빌딩이 귀여워 보일 지경이더라고요."

문혁이 말을 이었다.

"주변 지물과 비교해 본 결과 높이가 3km도 넘을 것 같았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은 상원이 한숨을 쉬었다.

저들이 말하는 나무는 바로 마신 '오랜 땅의 이무기'가 기르는 '피를 먹는 세계수'로, 이무기가 이 세계에 미치는 힘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승천 시험에 잡아먹힌 세계 중 하나인 '무림'도 그 나무가 나타나면서 쑥대밭이 됐다.

전생에는 33번 시험에서 지구에 나타났던, 그것도 서울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그 나무가 고작 21번 시험에 여의도에 나타난 것이다.

상원이 미간을 찡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시험. 전개가 바뀌었군.'

30번 시험이었던 '저승의 새'를 15번 시험에 갖다 붙였으니 그에 이르는 개연성을 정리하기 위해서 시험을 바꿀 거라는 생각은 했었다.

그런데 피를 먹는 세계수가 지금 여의도에 나타난 건 예상 밖이긴 했다.

승천 시험에 대한 정보를 꼼꼼하게 따져보고 앞으로의 가능성을 점검하던 찰나, 불현듯 든 생각이 있었다.

'아, 잠깐만... 지금 여의도에 세계수가 있다면 25번 시험에 가기 전에 흑풍회장을 만나는 게 가능하다는 건데?'

그렇다면 세 번째 별의 달성 조건인 '생명의 나무에서 흑천 교주를 죽이는 것'의 달성 난이도도 급락한다.

상원의 입꼬리가 슥 올라갔다.

'그래, 기관 놈들. 진행을 억지로 끼워 맞춘 시험이 이런 결과를 낳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을 거다.'

계획의 수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보는 모두 알고 있었으니 변수에 맞춰 최적의 해를 도출하면 그만이다.

이어서 우선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바로 부서진 광야에 가는 일이었다.

에키나르타 최고의 장인 에론 클라드라면 메타 차원을 이용할 준비를 해두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문혁에게 말했다.

"에론 클라드를 만나야 합니다."

문혁이 대답했다.

"찾으실 줄 알았습니다. 에론 클라드는 마트 지하 공방에 있습니다."

이어서 창훈이 말했다.

"어우... 그 드워프 여자분 대단하더라고요. 마트를 탈탈 털어서 이거 저거 가져오더니 지하에 아주 공장을 차렸어요 그냥. 거기서 나오는 물건들이 하나같이 기가 막힙니다. 저희도 그것들 덕 좀 많이 보고 있죠."

창훈의 말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태생부터가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손재주를 가진 드워프였던 데다가 광활한 동시에 섬세하기 그지없는 중앙마나기관을 총관리하던 사람이었으니 그 정도는 쉬울 것이다.

"좋습니다. 슬슬 가보죠."

옷을 다 갖춰 입은 상원이 방을 나섰다.

* * *

문혁의 말처럼 에론 클라드의 공방은 마트 지하에 있었다.

평범한 대형 마트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시뻘건 불길을 내뿜는 수십 개의 화로가 어두운 공간을 비추고 있었고 그 사이로 기름때 묻은 옷을 입은 드워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파이에벨 지하의 중앙마나기관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문혁이 말했다.

"에론 클라드가 여기로 건너오면서 파이에벨의 기술자들뿐만 아니라 프리바론의 대장장이들까지 데려왔습니다."

창훈이 감탄사를 흘리며 말했다.

"믿어지세요? 여기가 원래 마트였다는 게. 그 사람들 그냥 마트였던 이 공간을 이렇게 개조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린 줄 아세요? 사흘이에요. 사흘 밤낮 뚝딱뚝딱 거리더니 이런 걸 만들어냈어요."

고작 이 정도로 놀라다니, 에론 클라드가 다음에 만들 걸 보면 어쩌려고 이러시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치고는 걸걸한 목소리, 에론 클라드였다.

"안녕하세요 문혁 씨. 말씀하셨던 무구들은 내일 자정쯤이면 완성될 것 같습니다. 우리 장인들이 팀워크가 점점 좋아지는 덕에 작업 능률이 올라가고 있어요. 어, 창훈씨도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에론 클라드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다가 상원과 눈을 마주쳤다.

"어... 못 보던 분이시네요. 이분이 누구... 어?"

안경을 고쳐 쓰고 인상을 쓰며 상원을 바라보던 에론이 반색을 하며 외쳤다.

"어! 용사님! 오랜만이에요! 세상에... 드디어 나오셨군요."

달려와서 상원의 손을 잡고 흔드는 에론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했다.

환영받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열렬할 줄은 몰랐다.

상원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연예인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네요."

"연예인이 뭐예요. 카이네딘 제국을 구원하신 분인데."

에론의 말을 들으니 두 번째 별의 이름인 '신성 제국의 구원자'가 생각났다.

전생의 시나리오에선 카이네딘 제국은 멸망했다.

대강령술사 오디나스가 연옥으로 도망친 이후에도 계속해서 언데드를 대륙에 보냈기 때문이다.

아나르에서 진행되는 시험은 15번으로 끝이었기 때문에 그 어떤 수험자도 아나르의 상황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에키나르타 대륙은 버려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생엔 아니었다.

오디나스는 완전히 죽었고, 그러므로 대륙엔 더이상 언데드가 출몰하지 않을 것이다.

파이에벨 시도 블라드 가문도 미스미엘 교단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재건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다.

열다섯 번째 시험에서 오디나스를 완전히 몰아낸 건 에론 같은 아나르인들의 입장에선 '신성제국의 구원'이라 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승천 시험의 세계에 끌려 들어온 이상, 승천하기 전까지는 구원 같은 건 없다.

아나르인들도 그걸 뼈저리게 깨닫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걸 지금 말할 이유는 없지.'

상원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더없이 영광입니다."

상원의 말에 에론이 더없이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눈에 끝없는 신뢰가 보였다.

이제 본론을 꺼낼 차례였다.

"아나르 대륙 최고의 기술자 에론 클라드, 긴히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상원의 말에 에론이 굳은 표정을 지었다.

"말씀만 주세요. 최선을 다할게요."

뭐든지 할 수 있다고는 하지 않는다.

에론 클라드는 그런 말을 섣불리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물론, 이제 승천 시험 중반에 접어든 단계에서 에론 클라드의 실력으로 만들지 못하는 물건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녀라면 이런 것도 가능하다.

"메타 차원을 경유하는 차원문이 필요하다는 말씀은 들으셨을 겁니다."

에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씀은 들었습니다 용사님. 아시겠지만... 메타 차원을 경유하는 차원문은 제작 측면에서는 일반적인 차원문을 만드는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없어요. 단지 메타 차원으로 가는 좌표를 설정하는 게 문제이지요. 정확한 시공간 좌표를 잡아내야 하는데, 메타 차원이 발생하는 차원 간 접촉면 발생이 워낙 희귀한 데다 시간도 짧아서요. 그쯤 되면 불확정성의 영역에 들어서게 되는데...."

에론이 중얼중얼거리는 전문용어의 향연을 듣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메타 차원을 경유하는 차원문을 만드는 데 작용하는 심오한 원리는 알지도 못했을뿐더러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상원은 어떻게 하면 에론 클라드로 하여금 차원문을 만들게 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을 뿐이었다.

상원이 품속에서 브라이싱크론 지갑을 꺼내 에론에게 내밀며 말했다.

"자, 여기 있습니다."

에론이 지갑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게, 뭐 하는 물건이죠?"

"뭐 하는 물건이긴요. 이렇게 쓰는 물건이죠."

대답과 함께 지갑에 손을 집어넣어 성물 '바위에 박힌 검'을 꺼냈다.

전생에 스무 개가 넘는 시험을 함께 해왔던 그 물건을 다시 손에 쥐자 현생에선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단단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에론이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맙소사, 그거 반가상좌표 창출식 제삼형 아공간 송수신기인가요?"

"그런가 봅니다."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에론 클라드쯤 되는 전문가라면 이걸 보고 상원이 원하는 물건을 만들어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노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에론 클라드에게 브라이싱크론 지갑을 맡기면 다음의 장소들로 통하는 차원문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중에 상원이 가야 하는 곳이 있었다.

전쟁기념관에 열려 있는 차원문을 통해서는 갈 수 없는 곳, 바로 '광야의 밤'이었다.

세 번째 별을 얻으려면 거기에 들러서 얻어야 하는 물건이 있었다.

흑풍회장을 상대로 싸우려면 그 정도는 있어야 한다.

에론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용사님... 그거... 그거 제가 좀 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상원이 에론의 손에 지갑을 턱 얹어 주었다.

브라이싱크론 지갑은 지금 당장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다.

일곱 별의 왕관을 얻기 위해 필요한 수많은 물건들이 거기 들어 있었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바위에 박힌 검' 하나뿐이었으니까.

그걸 꺼냈으니 브라이싱크론 지갑은 당분간 에론 클라드에게 맡겨놓아도 괜찮다.

에론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용사님. 완성되는 대로 전갈을 넣겠습니다."

결연한 표정으로 말한 에론이 뒤돌아 공방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대화를 듣던 창훈과 문혁이 말했다.

"와... 세상에, 뭐라고 그러는지 하나도 모르겠네요."

"또 얼마나 기상천외한 걸 만들지 기대됩니다."

상원이 대답했다.

"다 만들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자, 이제 올라갑시다. 다음 일을 해야죠."

작업 지시를 마치고 서울역 광장으로 올라왔다.

수많은 수험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한복판, 시험이 시작된 이후로 한 번도 작동하지 않았던 대형 스크린에서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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