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피를 먹는 세계수 (1)
뭉친 모래가 형상이 되었다가 흩어졌다.
오디나스의 심장을 향해 '뇌신의 파괴자'를 내리찍는 모습,
샤믹에게서 뇌신의 파괴자를 전달받는 모습,
뇌신의 파괴자를 쥐었다가 놓치는 모습,
그리고
철컥, 모래시계가 멈추었다.
눈을 뜨니 창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면 볼수록 그 의체 참 신기하단 말입니다. 어디서 그런 걸 얻었는지. 나중에 기회 되면 좀 들여다봐도 될까요?"
그 말을 듣고 회귀가 성공했음을 깨달은 상원이 피식 웃었다.
"좋으실 대로요. 그 기회가 언제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샤믹이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악!"
뇌신의 파괴자가 내뿜는 벼락 때문이었다.
웬만한 수험자라면 가루가 되어버렸을 테지만 샤믹은 돌이 되어 그 엄청난 고통을 버티고 있었다.
그녀 말고 어떤 수험자가 상원을 위해서 그 고통을 참으며 '뇌신의 파괴자'를 움켜쥔단 말인가?
샤믹을 동료로 삼은 건 참 잘한 선택이었다.
샤믹의 마음은 고마웠지만, '바위에 박힌 검'은 얻었으니 저 망치는 필요 없다.
상원이 말했다.
"샤믹, 됐습니다."
샤믹이 망치를 놓지 않고 대답했다.
"으윽! 괜찮아요 상원 씨. 이 정도는 가뿐해요."
아무래도 본인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상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압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괜찮아요. 다시 계산해보니 꼭 그것까지 필요한 건 아닙니다."
샤믹이 그제야 망치를 놓았다.
그때 상원의 머릿속에 의체 관리 인터페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고: 의체의 손상이 심각합니다. 의체 긴급 수복 절차를 미룰 수 없습니다. 5분 후 긴급 수복 절차에 강제 돌입합니다.]
[강제 돌입까지 남은 시간: 2분 59초.]
그 메시지를 듣고 나니 밀물처럼 밀려오는 통증이 느껴졌다.
상원은 절로 신음을 흘렸다.
"끄으으으윽!"
"괜찮으세요?"
상원은 헐레벌떡 달려오는 샤믹에게 괜찮다는 뜻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래도 태초의 대족장을 만났을 때보다는 나았다.
감각 기능까지 완전히 고장 나버린 건 아니었으니까.
이 정도 통증쯤은 수복실에 들어가서 눈 좀 붙이면 씻은 듯 사라질 것이다.
일단은 그 전에 할 일이 있었다.
상원이 창훈에게 말했다.
"창훈 씨.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죠?"
"마법도시 파이에벨에 가시면 서울역으로 돌아가는 차원문이 열릴 겁니다. 서울역에 돌아갈 때 파이에벨의 중앙마나기관 총관리자 에론 클라드를 만나서 서울역에 데려가십시오. 제 이름을 대면 따라올 겁니다."
창훈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중앙마나기관의 총관리자 에론 클라드. 아하, 대장장이를 데려가는 건가요?"
"맞습니다."
역시 이해가 빠르다.
'일곱 별의 왕관'의 남은 업적을 진행하려면 차원문까지 관리할 줄 아는 솜씨 좋은 대장장이가 있어야 한다.
에론 클라드는 그런 면에서 최적의 선택이었다.
"에론 클라드한테 메타 차원을 경유하는 차원문 구축을 맡길 테니 공부해두라고 전해주십시오. 바로 알아들을 겁니다."
다음 할 일도 다른 차원에 가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에론에게 차원문 구축을 맡겨야 했다.
에론 클라드라면 방금 한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필요한 준비를 해 둘 것이다.
노트에서 보았던 에론 클라드의 능력이라면 그 정도는 충분했다.
창훈이 말했다.
"메타 차원을 경유하는 차원문... 무슨 외계어 같네요. 여튼 알겠습니다. 상원 씨는 계획이 다 있으시군요."
상원이 힘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이 험한 시련을 헤쳐나가려면 계획이 있어야죠."
이어서 샤믹이 쭈뼛거리며 물었다.
"저... 저 서울로 가도 될까요?"
아아, 지구로 돌아갈 때 원래 있었던 우간다 쇼핑센터가 아니라 서울역으로 와도 되냐고 묻는 것이다.
마음먹고 키운 인재라 서울역으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본인이 먼저 묻다니 잘된 일이었다.
상원이 대답했다.
"좋습니다. 환영합니다 샤믹."
이어서 윤진아, 송혜경, 백문혁이 달려왔다.
상원과 고락을 함께해 온 서울역의 수험자들.
상원은 피 섞인 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 눈을 감았다.
이제 더 이상 고통을 견디기 어려웠다.
"이따가 봅시다 창훈 씨. 샤믹도요."
말을 마치자 의체 관리 인터페이스가 말했다.
[긴급 수복 절차에 돌입합니다.]
아아, 이 얼마만의 단잠인가.
상원은 파도처럼 들이치는 졸음에 몸을 맡겼다.
* * *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야 불신자 선생."
경박한 노인의 목소리, 승천자 '기계장치의 신'이었다.
상원은 신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눈앞은 온통 반투명한 초록색 액체로 가득 차 있었다.
포근하고 따뜻했다.
양수에 들어가 있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나타나는 것도 말을 거는 것도 아주 자기 맘대로란 말이지.'
입을 열려고 하는데 무언가가 입을 막고 있었다.
만져 보니 산소마스크 같은 물건이었다.
마스크 사이로 공기 방울 몇 개가 새어 나왔다.
"나는 잘 지냈어. 여전히 청소부한테 쫓기면서 부평초처럼 살고 있지. 사선을 매일매일 넘나들고 있단 말이지. 자네처럼 말이야."
아, 그랬다.
처음에 연구실에서 만났을 때도 그는 청소부에게 쫓기고 있었다.
청소부는 별것 아니어 보이는 이름과는 달리 승천 시험의 오류를 해결하는 존재로, 규칙을 어겼다면 승천자 할애비라도 삭제해버리는 무시무시한 괴물이었다.
그런 걸 뒤에 달고 있는데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하면서까지도 '권좌'에 오르고 싶어 했고.
"아나르에선 아주 엄청난 걸 해냈더구만. 불새가 돼서 대강령술사한테 들이박다니 아주 삼중련 태양계의 우주 전함 같았어. 빠하하하!"
뭐라는 거야.
"아 그거 뭔지 모르나? 흠흠, 뭐 어쨌든. 신화의 몸 그게 엄청 튼튼해 보이지만 사실은 무지무지 섬세한 물건이야. 관리에 신경 좀 써 달라고. 혹시나 해서 강제 수복 기능까지 넣어놓긴 했지만 두 번째 별 얻을 때까지 두 번이나 쓸 거라곤 생각 못 했다 야."
그래 그 말이 맞다.
시험 열 다섯 번을 치르는 동안 굴려 보니 신화의 몸이라고 무적은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태초의 대족장을 직면했다가 기능 대부분이 박살이 나버렸다.
황금시대의 모래시계가 충전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회귀도 못 하고 꼼짝없이 죽을 수도 있었고, 지금처럼 강제 수복 절차에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나저나 새 기능 같은 게 열릴 때가 되지 않았나? 강신회로가 열렸을 때처럼.'
"새 기능... 은 아직이야. 쌈빡한 걸 준비해 놨는데, 아직은 의체 레벨이 너무 낮아. 열리는 새 기능을 적용하려면 의체 레벨이 20은 돼야 해."
귀신인가, 어떻게 하고 싶어 했던 말을 저렇게 정확히 아나.
즛 하고 혀를 차자 공기 방울이 새어 나왔다.
기계장치의 신이 말을 이었다.
"여하튼 그래, 그렇다고. 앞으로는 좀 신경 써서 굴려 줘 불신자 선생. 나중에 봅시다."
무전이 끊기듯 툭 하는 소리와 함께 기계장치의 신이 말을 멈췄다.
긴긴 잠이 다시 덮쳐 왔다.
* * *
다시 잠에서 깬 건 '의체 관리 인터페이스'의 메시지 때문이었다.
[강제 수복 절차가 끝났습니다. 시스템을 재부팅합니다.]
[시스템에 재접속합니다.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접속률 0.0%]
강제 수복 절차에 따라 변형된 의체에 재접속하는 건 두 번째였다.
[접속률 100%. 동기화를 완료했습니다. 시스템을 시작합니다.]
TV가 켜지듯 눈앞이 밝아졌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사방을 둘러싼 금속질의 벽면과 벽 곳곳에 붙어 있는 하얀 조명이었다.
바로 수복실의 벽이었다.
이어서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의 벽이 세로로 갈라졌다.
강제 수복 절차를 처음 겪었을 때와 같은 광경이었다.
다음으로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입니다 상원 씨."
"조금 이따 보자더니 오래도 걸렸네요."
앞서 들린 단단하고 정중한 목소리는 백문혁, 그다음 가볍고 쾌활한 목소리는 한창훈일 것이다.
상원은 빛이 쏟아지는 틈새를 향해 발을 디뎠다.
하체에 근육이 조금 더 붙은 게 느껴졌다.
신화의 몸은 이번에는 어떤 모습으로 변했으려나?
수복실 밖으로 나서자 낯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 벽에 커다란 전술지도가 붙어 있는 사무실, 바로 서울역의 중앙지휘본부였다.
문혁과 창훈이 커다란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상원은 그들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문혁이 물었다.
"기분은 좀 어떻습니까 상원 씨?"
"딱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무뚝뚝한 상원의 대답에 창훈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와, 겉모습만 바뀌었지 영혼은 조상원이네. 환영합니다 상원 씨."
그 말에 문혁도 함께 웃었다.
정든 서울역에서 정든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듣고서야 정말로 두 번째 별을 얻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창훈이 상원을 아래위로 슥 훑어보고 말했다.
"이번 변신은 저번처럼 극적이진 않군요. 근육 좀 붙고 머리 바뀐.. 정도인 것 같네요."
그 말에 머리카락을 만져 보니 처음 신화의 몸보다도 짧았다.
문혁이 덧붙이며 옷가지를 내밀었다.
"아 그리고 키는 좀 줄어든 것 같습니다. 이제는 기성복 기장도 맞겠네요. 준비해 둔 옷이 맞을 것 같아 다행입니다."
처음 형태는 덩치가 워낙 커서, 다음 형태는 호리호리했지만 키가 너무 커서 옷이 맞지 않아 불편한 게 많았다.
창훈과 문혁을 내려다보는 걸로 봐서 지금 몸도 크기는 했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문혁이 준비해 준 옷을 입고 거울을 보았다. 하얗고 짧은 머리카락에 눈매가 조금 더 사나워진 게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을 주었다.
몸에는 단단한 근육이 균형미 있게 붙어 있었다.
다음으로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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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체 관리 시스템]
접근이 허가된 정보만 표시됩니다.
레벨 12 (43%)
성능: 괴력 60, 용력 70, 술력 60
스킬: 요새 수호자의 시선(3), 하늘의 불씨(3), 지하의 문(2), 동굴적 감각, 원혼 군주의 절규, 좀비 소환 (복구 중)
모래시계 충전 시간: 1분 3초
강신회로: 태초의 대족장
달성 업적: 네번째 문의 봉인자, 신성제국의 구원자
일곱 별의 왕관 진척도: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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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치 총합이 5 줄어든 것 이외에 별다른 손해는 없다.
술력에 치중돼있던 능력치가 비교적 고르게 분배돼 있었는데, 앞으로 '바위에 박힌 검'을 사용할 걸 생각하면 적절한 변화였다.
스킬 메모리가 손상돼 저승의 새가 소실됐지만 당분간은 쓰지 않을 테니 상관없다.
총평,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그런데 유독 모래시계 충전 시간이 눈에 들어왔다.
'1분 3초...? 저렇게 많이 찼다고?'
상원이 문혁에게 물었다.
"그런데 문혁 씨, 제가 잠든 지 얼마나 지났습니까?"
상원의 말에 문혁이 손가락을 펴보였다.
"두 달 지났습니다."
아아, 시간이 생각보다 너무 많이 흘러 있었다.
"그럼... 지금이 몇 번째 시험이죠?"
"이제 곧 21번 시험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벌써 21번?'
아아,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