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106화 (106/230)

제106화. 바위에 박힌 검 (2)

창훈이 절박하게 부르짖었다.

“안 돼요! 거기 들어가면 죽어!”

알고 있다.

검은 원은 연옥과 이어진 차원문으로, 살아있는 자는 그 원을 밟는 순간 목숨을 빼앗긴다.

상원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괜찮다.

‘황금시대의 모래시계’의 힘으로 회귀하면 되니까.

모래시계가 시험에서 탈락해도 작동한다는 건 한 번 겪어 보아서 알고 있었다.

모래시계에 비축된 시간은 1분 남짓뿐이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망자들의 시간은 생자들의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흐르기 때문이다.

연옥에서의 며칠도 현세에서는 1초에 불과할 것이다.

검은 원에 발을 딛는 순간 몸에서 무언가가 쑥 하고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어서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시험에서 탈락하였습니다.]

'벌써 세 번째군.'

처음 그 메시지를 보았던 건 전생의 50번 시험에서 떨어지고 나서였다.

그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세 번째 겪어 보니 익숙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세상의 풍경이 정지해 있었다.

상원을 향해 손을 뻗은 창훈과 기진맥진한 샤믹의 모습, 그리고 엉망이 되어버린 신화의 몸이 보였다.

유체가 의체 '신화의 몸'으로부터 빠져나온 것이었다.

신화의 몸은 걸레짝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망가져 있었는데, 특히 ‘뇌신의 파괴자’를 쥐었던 왼팔은 골격이 완전히 부서졌는지 오징어 다리처럼 늘어져 있었다.

연옥에서 돌아온다면 꼼짝없이 회복실에 들어가야 할 판이었다.

'또 시험 몇 개는 건너뛰겠군.'

첫 번째 별을 얻고 나서 회복실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8번부터 10번 시험을 건너뛰었었다.

이번에는 그때만큼 망가진 건 아니니 두 개 정도면 충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 변수는 염두에 두었다.

'저승의 새'로 변신해서 오디나스를 들이받고 나면 그 반발력 때문에 의체가 망가질 건 자명했다.

그래서 '일곱 별의 왕관'을 얻는 여정을 계획할 때 15번에서 20번 시험은 아예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회복실에 들어가서 시험 몇 개 건너뛰어도 상관없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유체의 심장과 의체의 심장과 연결하는 황금색 모래 줄기였다.

공중에 뜬 모래 줄기는 마치 실처럼 보였다.

'그래, 모래시계가 작동하면 유체가 저 실을 따라 의체로 돌아가겠구나!'

상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유체가 된 몸을 내려다보았다.

유체이기에 짙은 회색을 한 손은 신화의 몸과는 달리 작고 거칠었다.

이어서 천천히 눈코입을 매만져 보고 나서, 상원은 유체가 원래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수려한 얼굴과 정한 몸을 한 신화의 몸이 아닌 왜소하고 음울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연옥으로 갈 계획은 세웠지만, 연옥에 갈 때 '신화의 몸'으로 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단지 연옥은 영들의 세계이니 신화의 몸으로는 갈 수 없을 거란 예상만 했을 뿐.

그런데 예상대로 돼버린 것이다.

상원은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그러자 신화의 몸의 인터페이스가 아닌, 아주 오랜만에 보는 불신자 조상원의 상태창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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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원

신력: 괴력0 용력0 술력0

특성: 불신자(개성)

스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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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솔직히 아쉽기는 했다.

앞으로 연옥의 저 거친 광야를 헤매야 하는데, 신화의 몸에 탑재된 '하늘불꽃 드론'을 쓰지 않고 짤막한 두 다리로 돌아다닐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피곤했다.

상원은 좌우로 고갯짓을 하며 생각을 털어냈다.

'아니다. 아니야.'

걷는 일이라면 이골이 났다.

전생에서 50개의 시험을 깰 때도, 다른 수험자들이 요란한 이동 스킬을 쓸 때 자기는 두 다리로 걸어 다녔었다.

그래, 연옥에서 걸어 다니는 것쯤이야.

생각을 마친 상원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공중으로 살짝 뛰었다가 공처럼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첨벙

물에 뛰어들 때 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밀도 높은 물결이 온 몸을 감쌌다.

* * *

가장 먼저 느껴진 건 코를 파고드는 축축한 공기였다.

눈을 떠보니 뿌연 안개가 사방을 감싼 탓에 사위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세 번째 시험에서 서울역 근방을 덮었던 것과 같은 안개였다.

'왔군.'

검은 원을 건너 연옥에 도착한 것이다.

철썩

상원은 어디선가 들리는 물소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안개 속 저 멀리 희미한 형체가 보였다.

곱슬머리를 한 미남자였다.

연옥의 외곽과 본토를 가르는 삼도천의 기슭에 서 있는 남자, 상원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디나스 바스칸딘."

오디나스가 강령술에 심취하기 전 촉망받는 황손이었던 시절의 모습으로 상원을 돌아보았다.

커다란 눈에선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디나스가 무심하게 말했다.

"결국 이렇게 됐군. 여한은 없다."

오디나스가 상원의 심장으로부터 빠져나온 황금빛 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건... 미련이구나. 다 부질없는 것을."

연옥에 오는 이들은 생전의 미련을 버리게 된다.

그게 연옥의 법칙이며, 오디나스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당신의 한은 그리 쉽게 잊히는 것이었소?"

"죽음은 많은 걸 쉽게 만들지."

그래, 상원은 죽지 않았으니 잊을 수도 없었다.

마침내 권좌에 올라 이 시험을 끝장낼 것이다.

철썩

파도가 들이치고 짙은 물냄새가 났다.

이윽고 짙은 안개에 싸인 삼도천 저 멀리 시퍼런 불빛이 희미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불빛의 정체는 찌그덕찌그덕 노 젓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나룻배 사공이 든 등롱이었다.

사공이 등롱을 들자 후드 아래로 새하얀 해골이 비쳐 보였다.

오디나스가 말없이 나룻배에 올라탔다.

이어서 상원이 나룻배를 타려 하는데 사공이 손을 들어 상원을 제지했다.

그는 상원에게서 나온 황금색 모래줄기를 들여다보았다.

상원이 물었다.

"문제가 있소?"

돌아가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위에 박힌 검>을 얻지 못하면 네 번째 별 난이도가 너무 올라가는데.'

상원의 물음은 무시하고 한참 모래 줄기를 들여다보던 사공이 말없이 손을 내렸다.

상원은 슬쩍 사공의 눈치를 보며 나룻배에 올라탔다.

사공은 상원을 제지하지 않았다.

'됐다.'

상원은 푹 한숨을 쉬며 나룻배에 앉았다.

찌그덕 찌그덕

배 좌우에 달린 노가 저절로 움직이면서 나룻배는 긴긴 삼도천을 건너기 시작했다.

모래 줄기가 길게 늘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익숙한 포효가 들렸다.

"쓰오오오오오오!!"

나룻배가 나아가는 방향 저 멀리 희뿌연 하늘에서 거대한 형체가 해면으로 등을 내민 고래처럼 슬쩍 나타났다 사라졌다.

놈이 남긴 시퍼런 안광이 반짝 빛났다.

저놈이 바로 연옥의 하늘을 누비는 대마물, 저승의 새의 원본 명룡이었다.

저 명룡이 고래라면 오디나스나 상원이 변신했던 ‘저승의 새’는 한 마리. 멸치에 불과했다.

오디나스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도 저걸로 변신할 생각은 안했는데 왜 그랬는지 직접 보니 알겠군. 원본을 보니 저걸로 변신해야겠다는 엄두가 도저히 나지 않아."

상원이 아주 오래전부터 오디나스에게 던지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대강령술사 오디나스. 인간이길 포기하고 제국을 마신에게 갖다 바치면서까지 스승을 넘어서고 싶었소?"

"그랬지. 그런데 이제 보니 스승도 제국도 마신도... 아무것도 아니었군."

찰박, 삼도천 수면에서 뼈로 된 물고기가 튀어 올랐다.

오디나스가 말했다.

"그리고 그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수많은 신민들을 버렸군."

오디나스의 볼을 따라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상원이 말했다.

"언젠가 속죄할 때가 올 거요. 그때까지... 당신이 했던 일을 잊지 마시오."

"그래. 그래."

그 뒤로 한참, 말 없는 세 존재를 태운 나룻배가 삼도천의 수면을 흘러갔다.

그러다 마침내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나룻배가 뭍에 닿았다.

상원이 시꺼먼 흙밭 위로 풀썩 발을 디디자 검은 흙먼지가 날렸다.

짙은 안개 사이사이로 폐허가 된 건물들이 거대한 형체를 드리우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이라곤 풀 한 포기 찾을 수 없는 이곳, 여기가 연옥의 본토였다.

의지 없는 얼굴을 한 망자들이 비척대며 걸어 다녔다.

이들도 언젠가 ‘부르심’을 받고 마물이 되어 수험자들 앞에 나타날 것이다.

죽어서까지 연옥을 배회하다 언젠가 '연옥의 폭군'에 의해 재사용되는 것, 그게 시험에 든 이들의 운명이었다.

상원을 뒤따라 내린 오디나스가 말했다.

"잘 가라."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오디나스는 배회하는 망자들의 무리 속에 섞여 어디론가 터덜터덜 걸어가기 시작했다.

오디나스 또한 '부르심'이 있을 때까지 이곳을 배회할 것이다.

멀어져가는 오디나스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상원은 이곳에 온 이유를 상기해냈다.

바로 '인큐버스의 아들'을 찾아가서 '바위에 박힌 검'을 얻는 것이었다.

전생에 그걸 얻은 건 런던에서 28번 시험을 치를 때였다.

15번 시험에서 연옥으로 도망친 오디나스가 26번 시험에서 런던에 다시 나타나면서 그 영향으로 영국 도처에 히든 던전이 만들어졌는데, 개중 하나가 '인큐버스의 아들'이 있는 '행운의 섬'이었다.

거기에서 성물 '바위에 박힌 검'을 얻은 덕에 상원은 50번 시험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이번엔 오디나스가 런던에 나타나지 않을 테니, 상원이 '인큐버스의 아들'이 있는 연옥으로 찾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상원은 눈을 감고 새하늘교 노트에서 보았던 연옥의 지도를 떠올렸다.

지도에서 '인큐버스의 아들'의 위치를 찾은 후 주변의 건물들을 대조해서 현재 위치를 잡았다.

인큐버스의 아들은 아주 먼 곳, 상원의 걸음으로 며칠은 걸어야 다다르는 곳에 있었다.

걷는 일이라면 이골이 난 상원에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상원은 인큐버스의 아들이 있는 곳을 향해 저벅저벅 걷기 시작했다.

* * *

연옥도 시험의 일부이기 때문에 유령들도 상태창의 적용을 받았다.

그 말인 즉 신력도 스킬도 없는 상원은 일반인의 걸음으로 그저 죽어라 걷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끝없이 걷는 나날이 계속됐다.

다행히 유령이 된 덕에 피로도 허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수많은 유령들이 상원 곁을 스쳐 갔지만 그 누구도 상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을 걸었을까, 상원의 눈앞에 커다란 호수가 나타났다.

삼도천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새까만 물이 잔잔한 호수는 바다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광대했다.

사실 상원도 지도를 보지 않았다면 바다라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광활한 수평선 한가운데 손톱만 한 섬이 보였다.

그곳이 바로 '인큐버스의 아들'이 있는 곳, 런던의 히든 던전 '행운의 섬'의 원본인 '사과의 섬'이었다.

어떤 이동 스킬도 없는 상원이 거기에 닿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헤엄치는 것.

상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새까만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시꺼먼 물이 시야를 가렸다.

또 며칠을 헤엄쳐야 할 것이다.

상관없다, 시간은 많으니까.

50개의 시험을 살아내기 위해 익혔던 수영이다.

상원은 팔과 다리를 휘저어 천천히 물살을 가르며 '인큐버스의 아들'이 기다리는 '사과의 섬'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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