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바위에 박힌 검 (1)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다.
신화의 몸이 아무리 튼튼하다 해도 30번 시험의 보스를 일격에 보내버린 반발력까지 견딜 수는 없었다.
의체 관리 인터페이스의 경고가 계속됐다.
[경고: 의체의 손상이 위험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지면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져 왔다.
이대로 추락했다간 그대로 시험에서 탈락할 것이다.
상원은 정신을 다잡고 남은 마력을 왼팔에 쏟아부었다.
왼팔의 문신이 파랗게 빛나기 시작했고, 이어서 주변을 오가는 바람의 결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의 움직이지 않는 왼팔을 간신히 뻗어 바람결을 잡자 빠지직하고 인공 근육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삽시간에 몰려온 고통에 상원은 절로 신음을 흘렸다.
"으으윽!"
잡은 손을 놓아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 속도로 지면에 처박혔다간 그대로 피곤죽이 될 테니까.
상원은 바람이 낙하 속도를 줄여주기를 바라면서 망토를 덮어쓰듯 끌어 잡은 바람을 온몸에 둘렀다.
속도가 줄어들긴 했지만 바라던 만큼은 아니었다.
딱 죽지 않을 만큼, 그 정도.
"젠장."
지면이 상원을 덮쳤다.
쾅!
상원은 정신을 잃었다.
* * *
누군가 상원을 불렀다.
"상원 씨, 상원 씨."
상원은 그 소리에 눈을 떴다.
누군가 상원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는데, 떨어진 충격 때문인지 얼굴이 흐리게 보였다.
정신을 가다듬자 그 사람이 창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아... 아, 창훈 씨."
'원혼 군주의 절규'를 듣고 혼절한 수험자들이 깨지 않은 걸 보니 정신을 잃고 시간이 오래 흐른 것 같지는 않았다.
빨리 오디나스에게 가야 했다.
이렇게 누워 있을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창훈이 물었다.
"좀 괜찮습니까?"
"괜찮아 보이나요?"
창훈이 피식 웃으며 상원을 부축했다.
"아니오,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면 죽을 것 같네요."
상원이 말했다.
"오디나스... 오디나스에게 갑시다."
창훈이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그럽시다."
창훈이 상원보다 훨씬 작은 탓에 상원은 창훈에게 빨래처럼 널린 채로 걸었다.
창훈이 침울한 건 수호신 화산정의 혐오체가 오디나스에게 느끼는 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관계가 파탄 나긴 했지만 어쨌든 대강령술사 오디나스는 용제 비젤 카스파의 수제자였으니까.
상원이 물었다.
"슬픕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창훈의 눈가에 보라색 안광이 스쳤다.
"제자의 죽음은 슬프지 않습니다. 이별은 찰나일 뿐, 언젠가 어디선가 또 다른 모습으로 만나겠지요. 다시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면서... 고통스런 삶을 반복하겠지요. 새하늘 시험에서 죽음이란 거짓이니까... 그게 슬픕니다."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새하늘 시험에서 죽음이란 거짓이다.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면서 고통스런 삶을 반복할 것이다.
그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 승천뿐이다.
마침내 두 남자는 추락한 오디나스 앞에 섰다.
새하얗고 커다란 오디나스의 육체는 형편없이 짓이겨져 있었다.
오디나스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흐... 흐흐... 저승의 새까지 파훼할 줄이야. 이놈의 술법은 끝까지 제대로 되는 게 없군. 어때 불신자, 속이 시원한가?"
상원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별로."
딱히 속이 시원할 이유는 없었다.
오디나스는 승천을 위해 거쳐 가야 할 관문일 뿐이었으니까.
오디나스의 힘없는 눈이 이번에는 한창훈에게 닿았다.
오디나스가 보는 건 창훈의 뒤에 있는 수호신, 자신의 스승 화산정의 혐오체일 것이다.
"당신을 뛰어넘기만을 바랐어. 그래서... 마침내 경지에 다다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위를 보니 남은 건 폐허뿐이군."
오디나스가 피식 웃었다.
"허무해... 하무허다."
다음 순간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오디나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아... 그분! 그분이 부르신다! 주인님... 주인님!"
오디나스가 두 눈을 부릅뜬 채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렸다.
그리고 그 고통과 환희가 뒤섞인 얼굴 그대로 절명했다.
바스칸딘 황가의 마지막 후손, 대륙이 낳은 불세출의 천재, 대제사장인 동시에 대강령술사였던 자의 허망하고 비참한 최후였다.
창훈이 오디나스의 눈을 감겼다.
"언젠가... 또 다시 만나겠지요."
그때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7번 시험의 델타 루트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종류의 메시지였다.
[대강령술사 오디나스로부터 차원 아나르를 지켰습니다. 업적 <신성제국의 구원자>를 달성하였습니다.]
하늘 한가운데 떠 있던 마신의 달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별들이 총총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형형색색의 별들이 알알이 박힌 밤하늘 가운데로 은하가 거대한 몸을 드리우고 있었다.
커다란 빛덩어리 하나가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빛의 군대의 강림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이 찬란한 빛이었다.
[일곱 별의 왕관을 이루는 일곱 별들 중 두 번째 별을 획득하였습니다.]
시스템 메시지를 듣고 상원이 고개를 푹 숙였다.
"허어."
이어서 의체 관리 인터페이스의 메시지가 들리면서 녹색 빛이 상원의 몸을 감쌌다.
[의체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업 효과로 의체가 수복됩니다.]
[의체의 손상이 심각합니다. 의체 긴급 수복 절차에 돌입합니다. 레벨업 효과의 수복 자원을 긴급 수복에 투입합니다. 이 과정에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됩니다.]
안된다.
지금 알에 들어가면 다음 일을 그르친다.
상원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지금은 들어갈 수 없어."
그러자 인터페이스가 대답했다.
[명령 접수. 의체 긴급 수복 절차 진행을 일시 중단합니다.]
상원은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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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체 관리 시스템]
접근이 허가된 정보만 표시됩니다.
의체 긴급 수복 절차에 돌입하여 자원 분배를 조정 중에 있습니다.
표시 가능한 확정 정보만 표시됩니다.
레벨 12 (21%)
성능: 괴력 55, 용력 55, 술력 85
강신회로: 태초의 대족장
달성 업적: 네번째 문의 봉인자, 신성제국의 구원자
일곱 별의 왕관 진척도: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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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체가 엄청난 손상을 받아 심각하게 손상된 탓에, 첫 번째 별을 얻었을 때와 같이 의체 관리 인터페이스가 엉망이었다.
스킬 목록이 표시되지 않는 걸 보니 스킬 메모리가 또 손상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보다 상황은 훨씬 나았다.
적어도 그때처럼 실신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창훈이 상원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보면 볼수록 그 의체 참 신기하단 말입니다. 어디서 그런 걸 얻었는지."
상원이 창훈의 말을 잘랐다.
"이제 다음 일을 해야 할 차례입니다."
오디나스는 오디나스고 이제 다음 일을 할 차례였다.
상원은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오디나스가 여기서 퇴장했으니 전생에서처럼 런던에 나타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디나스가 런던의 망령이란 망령은 죄다 되살린 덕에 만날 수 있었던 <인큐버스의 아들>도 현세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다음 할 일은 명계로 가서 인큐버스의 아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를 만나야 하는 이유는 그가 <네 번째 별>을 얻는 데 꼭 필요한 아이템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연옥에 가는 방법은 무엇인가?
대답은 오디나스의 사체에 있었다.
바로 오디나스의 심장 속에 봉인된 '핵'을 깨는 것이었다.
핵을 깨면 연옥으로 가는 포탈이 열린다.
그런데 오디나스의 심장은 여간 단단한 물건이 아니었다.
마신의 힘이 거기 고스란히 응집돼있으니 당연했다.
오디나스의 핵을 깨부수려면 북문에서 툴리오를 보내버렸던 그 정도의 힘은 있어야 했다.
이번에도 정령왕의 힘을 충돌시킬 것이다.
우선 오른쪽 아래팔에 수납된 '열지의 말뚝'부터 꺼냈다.
[열지의 말뚝을 사출합니다.]
의체 관리 인터페이스의 메시지와 함께 오른쪽 하박이 세로로 갈라지면서 거대한 말뚝이 튀어나왔다.
다음은 왼팔에 있는 '깊은 하늘의 괴조'의 힘을....
'아뿔사!'
왼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력을 불어 넣어 보았지만 왼팔의 문신은 수명이 다한 형광등마냥 힘없이 깜빡였고 마력이 시원스레 흐르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생각지 못한 변수였다.
'어떡한다....'
여기서 오디나스의 핵을 파괴하지 못하면 네 번째 별의 입수 난이도가 급상승한다.
어쩔 수 없나 하는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상원의 눈에 커다란 물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상원이 나직이 말했다.
“그래... 저거면 되겠다!”
머리가 사람 상반신만 해 보이는 무식하게 생긴 거대한 망치, 바로 <천둥망치>의 전용 보구인 신기 <뇌신의 파괴자>였다.
'저거라면 반발력을 낼 만한 힘을 뽑아낼 수 있다.'
망치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간 상원이 자루를 쥐자 엄청난 전류가 상원을 꿰뚫었다.
온몸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크아아아악!"
상원은 자루를 놓았다.
무려 주신 <천둥을 두른 대전사>가 화신에게 하사한 전용 아이템, 몸도 성치 않은 상원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창훈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상원 씨, 그거 만지지 마요. 알잖아요, 잘못하면 정말로 죽어요."
그때 누군가 상원을 불렀다.
"대장, 대장! 괜찮아요?"
고개를 돌려 보니 수험자 샤믹 로드리게스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때 상원의 입꼬리가 슥 올라갔다.
샤믹이라면 망치를 가져올 수 있으니까.
다시 오디나스에게 돌아간 상원이 다급하게 외쳤다.
"샤믹! 저 망치... 저에게 좀 가져다 주시겠습니까?“
"아, 네! 알았어요!"
샤믹은 상원이 죽으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할 사람이었다.
다다다 달려간 샤믹이 망치를 쥐었다.
역시, 망치에서 뻗어 나온 무시무시한 뇌전이 샤믹의 몸을 집어삼켰다.
"꺄아아아악!"
하지만 망치가 두른 뇌전 정도로는 샤믹의 맷집과 재생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망치를 뽑아든 샤믹이 상원에게 다가와 망치를 내밀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고맙습니다,"
상원이 왼손에 마력을 불어넣고 망치 자루를 쥐었다.
망치에 깃든 마력이 상원의 왼팔에 흘러들어왔다.
같은 뇌전이라지만 '깊은 하늘의 괴조'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힘, 그 힘이 상원의 왼팔을 박살내고 있었다.
까드드득, 상원은 이가 부서지도록 턱을 세게 깨물고는 오디나스의 심장 위에 세워둔 열지의 말뚝을 향해 뇌신의 파괴자를 휘둘렀다.
"...빛이 되어라...!"
꽝!
열지의 말뚝과 뇌신의 파괴자가 부딪혔다.
상극인 두 힘이 부딪힌 여파가 상원의 뭄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상원은 피를 토하며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악!"
순간 눈이 멀어버릴 듯 쨍한 섬광이 온 다림델을 집어삼켰다.
잠시 후 섬광이 사라졌다.
오디나스의 시체는 온데간데없고 그 대신 새까만 구멍이 바닥에서 휘휘 회전하면서 점점 커지고 있었다.
저게 바로 연옥으로 통하는 차원문, <검은 원>이었다.
"좋아."
상원은 검은 원을 향해 뛰어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