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저승의 새 (4)
상원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보라색 유성이 가까워질수록 그 모습이 명확하게 보였다.
그것은 보라색 불길에 휩싸인 본드래곤이었다.
상원이 되살렸던 저 본드래곤은 화산정의 혐오체가 하늘에서 떨어질 때 딸려온 그의 육신이었다.
두 번째 별을 얻기 위해 용제를 반드시 되살려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저 육체를 저승의 새가 될 재료로 써야 하니까.
저승의 새가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마력이 담긴 충분한 양의 뼈와 살', 15번 시험에 다다르기 전 구할 수 있는 재료는 혐오체의 육신 단 하나뿐이었다.
본드래곤이 포효하자 무시무시한 울림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오오오오오!"
상원이 화산정의 혐오체에게 말했다.
"고맙소."
화산정의 혐오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시험이 끝나고 나면 그 육신이 사라지게 될 것은 화산정의 혐오체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산정의 혐오체는 순순히 육신을 내주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상원과 함께하는 게 자신이 승천할 가장 효과적인 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산정의 혐오체가 물었다.
"그런데 불신자, 알고 있지? 이거 승률이 그렇게 높지 않은 도박이라는 거."
상원이 혐오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상대는 무려 30번 시험의 보스.
상원이 저승의 새로 변신해서 대적한다 해도 승률은 높지 않았다.
혐오체의 말마따나 승률이 높지 않은 도박.
하지만 그렇게 낮은 승률은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상원은 다음 카드를 준비했다.
상원이 말했다.
"할머님께서는 도박에 실패하고 돌아가는 길도 재미있어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아닙니다."
때마침 나타난 윤진아가 상원에게 말을 걸었다.
"상원 씨."
화산정의 혐오체가 그녀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상원이 준비한 게 무엇인지 간파한 것이었다.
진아가 상원에게 말을 거는 건 주신급들도 버티지 못한 원혼 군주의 절규를 버텼다는 뜻이었다.
그건 그녀의 수호신 '낙원의 수문장'은 성령(聖靈)으로서 오디나스에게 상성 상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상성이, 상원이 준비한 무기였다.
그녀의 등 뒤에서 너울거리는 분홍색 오오라가 그녀가 가진 힘의 크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4번 시험에서, 11번에서 14번 시험에서, 상원은 이 순간을 위해 윤진아를 키워 두었다.
이제 그 결실을 볼 순간이 왔다.
상원이 윤진아의 뒤에 있는 존재에게 말했다.
"낙원의 수문장."
진아가 눈을 깜빡이자 분홍색 불빛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화산정의 혐오체가 그랬던 것처럼 낙원의 수문장도 화신에게 강신한 것이었다.
오로지 자기 화신을 위해서 차원을 건너와서 30번 시험의 보스라는 괴물 앞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화신 윤진아를 극한까지 몰아붙였던 전생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낙원의 수문장이 입을 열었다.
"독생자."
상원은 그 목소리에서 무지막지한 중압감을 느꼈다.
낙원의 수문장이 뿜어내는 기운이 3번 시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해졌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건 상원이 윤진아를 작정하고 밀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승천자가 시험에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의 크기는 화신의 능력에 비례하니까.
이제 상원이 그 힘을 받을 때였다.
고개를 갸웃한 화산정의 혐오체가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아무리 그 몸이 잘났다고 해도 내 힘이랑 저 친구의 힘을 섞을 수는 없어. 힘이 완전히 상극이니까."
혐오체의 말마따나 명속성의 힘과 성속성의 힘은 섞일 수 없는 것이었다.
마신의 힘마저 담을 수 있는 '신화의 몸'이라도 그건 무리였다.
하지만 상원에겐 '신화의 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면서까지 서울역의 '만신전'을 강화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만신전(萬神殿), 그 이름과 같이 수만 승천자들의 힘을 융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다 쓰기 위해서였다.
상원은 두 눈을 감고 차원 너머 서울역에 있는 수많은 승천자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성역 서울역의 수많은 승천자들이 화답하기 시작했다.
'수험자 조상원, 너에게 힘을 허한다.'
'서울역의 만신전이 그대를 가호할 것이오.'
'좋아! 이걸로 밟아버려!'
상원은 눈을 떴다.
그의 몸에서 황금빛 오오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만신전의 힘이 그에게 깃들어 있다는 뜻이었다.
화산정의 혐오체와 낙원의 수문장이 동시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아... 하하! 대단해! 대단해!"
"이런... 이걸 이렇게 쓸 줄은 생각도 못 했군."
승천자들은 만신전의 역할은 승천자와 화신의 사이를 이어주는 창구로만 생각했다.
만신전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지만 정작 그 힘을 쓸 수 없는 불신자 조상원으로서는 만선전을 대하는 승천자와 수험자들의 태도가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본인이 만신전을 쓸 수 있게 되면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활용할 것이라고.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상원이 낙원의 수호자에게 말했다.
"낙원의 수문장, 그대의 권능을 허해주기를 바라오."
낙원의 수문장이 잠시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고는 상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민 손바닥 위에서 분홍색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불신자. 세상을 꿰뚫는 원대한 섭리가 그대와 함께함을 깨닫기를 바라오."
알아버린 건가, 독생자가 아니라는 걸.
생각해보면 낙원의 수문장씩이나 되는 자가 그렇게 어설픈 연기를 간파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순순히 힘을 빌려주는 건가.
'아니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상원은 낙원의 수문장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불꽃이 상원의 손을 타고 전신으로 흘렀다.
의체 관리 인터페이스의 메시지가 들렸다.
[낙원의 수문장이 권능을 양도했습니다. 스킬 '하늘의 불꽃(3)'이 '지천사의 불꽃(3)'으로 상승합니다.]
뒤이어 혐오체의 육신이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다림델 광장에 착륙했다.
상원은 덤프트럭만 한 본드래곤의 두개골을 바라보았다.
화산정의 혐오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드래곤에게 저벅저벅 다가간 상원이 드래곤의 콧잔등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그러자 의체 관리 인터페이스의 메시지가 들렸다.
['저승의 새'를 발동하기 위한 뼈와 살이 준비되었습니다. 변신을 승인합니까?]
"승인.“
[변신 승인. 변신을 시작합니다.]
메시지에 이어 본드래곤이 콧잔등에서부터 조각조각 부서지더니 상원의 몸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만신전의 융화 능력이 보조됩니다. 낙원의 수문장의 권능이 함께합니다.]
부서진 뼈에 분홍색 불꽃이 이글거렸다.
날카로운 뼛조각들이 무지막지한 압력으로 온몸을 짓눌렀다.
그 엄청난 고통에 상원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아악!"
그게 끝이 아니었다.
상원의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경고. 속성이 상반되는 힘이 충돌합니다. 반발력으로 인해 육체 손상이 시작됩니다.]
[경고. 육체 구성이 스킬 사용 조건에 맞지 않습니다. 반발력으로 인해 육체 손상이 시작됩니다.]
둘 다 예상했던 메시지였다.
후자의 경우, 저승의 새가 리치가 된 오디나스의 육체에 맞춰 설계된 스킬인 만큼 '신화의 몸'으로 사용하는 데는 무리가 온다는 뜻이었다.
상원이 일갈했다.
"닥쳐!"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두 번째 별'을 얻기 위한 조건인 '15번 시험에서 오디나스를 퇴출할 것'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이 이것 하나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면 승천은 어림도 없었다.
그 단단한 신화의 몸이 부서질 것 같은 압력을 견디던 어떤 순간, 상원은 뱃속에서부터 강대한 힘이 폭발하는 걸 느꼈다.
눈 부신 빛이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상원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상원은 자신의 육신이 혐오체의 육신을 이루었던 새까맣게 굳은 용암으로 뒤덮인 거대한 새로 변한 걸 느낄 수 있었다.
몸 여기저기 난 균열로부터 선명한 분홍빛 불꽃이 코로나마냥 솟구쳤다.
'깊은 하늘의 괴조'의 외형이 워낙 인상 깊었던 탓인지, 상원의 모습은 새라기보다는 익룡에 가까웠다.
그래도 오디나스의 저승의 새보다는 나았다.
'그래, 저승의 새라 하면 이 정도 위엄은 있어야지.'
상원은 잠시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정사각형으로 생긴, 고대의 성지 다림델이 한눈에 들어왔다.
화산정의 혐오체가 웃는 얼굴로, 낙원의 수문장이 굳은 얼굴로 상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성 여기저기서 익숙한 얼굴들이 연옥불 망령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송혜경, 거인이 된 샤믹, 블라드가의 뱀파이어들 그리고 남문을 틀어막은 거대한 모노리스.
상원은 지상을 향해 긴 포효를 내뱉었다.
[스킬 '원혼 군주의 절규'를 사용합니다.]
['낙원의 수문장'의 권능을 받아 스킬 속성이 명속성에서 성속성으로 변경됩니다.]
뱀파이어들은 버틸 수 있지만 연옥불 망령은 버틸 수 없는 딱 그만큼의 위력이었다.
포효와 함께 분홍색 충격파가 지상을 덮치자 연옥불 망령들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이어서 상원은 황성을 올려다보았다.
저 하늘 위 황성에는 저승의 새로 변한 오디나스가 수십 개의 촉수를 징그럽게 꿈틀거리며 똬리를 틀고 있었다.
오디나스의 수백 개의 눈이 익룡 형태의 뼛조각 속에서 부서져 가는 상원의 몸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불신자... 왜, 이렇게까지.
상원이 내뱉었다.
"오디나스... 너같은 자는 이해할 수 없을 거다. 불꽃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서 같은 길을 걸어가는 마음을."
한편 머릿속에는 경고음이 폭주하고 있었다.
[경고. 의체의 출력이 부족합니다. 의체의 모든 기능을 조정하여 마력 출력을 최대화합니다.]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한 합, 단 한 합에 끝내야 한다.'
상원은 전신의 힘을 짜내 날갯짓을 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하늘을 뒤덮은 상원의 거체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황성을 향해 짓쳐 들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발생한 폭풍이 다림델을 집어삼켰다.
오디나스가 입을 쩍 벌리고 외쳤다.
- 불신자!!! 네놈이 기어코!!!
오디나스의 곁에 생겨난 수천 개의 불덩어리가 총알처럼 날아들었다.
하지만 불덩이는 상원의 본체를 건드리지도 못하고 힘없이 흩어져버렸다.
오디나스의 형체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여기까지다 오디나스."
날카로운 부리가 오디나스의 머리통을 뚫기 시작했다.
상원의 몸에 실린 강대한 성속성 마력과 무지막지한 질량이 오디나스의 몸을 부수었다.
그 반발력을 고스란히 받은 상원도 피를 토하며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아악!"
우저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쌍방의 뼛조각이 부서져 나가기 시작했다.
단 일합.
영원처럼 느껴지는 찰나가 지났다.
카이네딘의 기술력의 정수인 황성이 먼저 부서져 쏟아졌다.
그리고 껍데기가 뼛조각이 되어 흩어져 드러난 오디나스의 벌거벗은 본체가 땅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다음 순간, 상원은 온몸이 부서져 내리는 걸 느꼈다.
상원이 만든 저승의 새도 날개와 꼬리 끝에서부터 점점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상원은 한숨을 뱉었다.
"아아."
잠시 후, 상원도 땅을 향해 추락하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