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103화 (103/230)

제103화. 저승의 새 (3)

열다섯 번째 시험이 선포되던 바로 그 시각, 상원과 헤어진 수험자 <스칼렛 이베르손>은 숙소 침대에서 노트를 읽고 있었다.

그녀의 수호신 천정의 재판관이 말해준 정보들이 적힌 노트였다.

[14번 시험 선포 후 24시간이 지나 15번 시험 선포 예정. 14번 시험엔 참여할 필요가 없으니 힘을 비축할 것.]

지금껏 수많은 시험을 거치면서 재판관이 전해주는 정보의 질은 차원이 다르다는 걸 깨달은 스칼렛 이베르손은 그의 말씀을 신주처럼 여겼다.

그래서 스칼렛은 갑작스러운 시험 선포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수호신의 말이 틀렸으니까.

[축하합니다. 14번 시험 <성지 방어전>을 통과하였습니다.]

[15번 시험 <저승의 새>가 시작됩니다.]

[<대강령술사 오디나스>가 <저승의 새>로 변신합니다.]

[<저승의 새>를 물리치십시오.]

"뭐?"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내뱉은 스칼렛이 숙소 밖으로 뛰쳐나갔다.

밤인 걸 감안해도 숙소 밖은 너무 어두웠다.

하늘을 올려다본 스칼렛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미친... 저게 뭐야?"

중세풍의 거대한 성이 하늘에 떠 있었다.

열네 번의 시험을 거치며 '현실적인 것'의 기준이 바뀌었다는 걸 체화한 스칼렛이었지만 하늘에 떠 있는 성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까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때 시스템 메시지가 들렸다.

[<승천자 추방> 마법진이 해제되었습니다.]

[다른 차원의 승천자들이 이 땅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이어서 천정의 재판관이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 스칼렛 이베르손.

수호신의 목소리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온몸을 긴장시켰다.

지금껏 수많은 재판장들을 상대해 왔던 그녀였지만 이 재판장의 위엄은 그들과는 차원이 달랐으니까.

동시에 스칼렛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엄마를 본 아이처럼 마음 한편이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천정의 재판관은 이 엄혹한 승천 시험의 세계에서 그녀가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 중 하나였으니까.

스칼렛이 다급히 외쳤다.

"재판장님... 이건!"

천정의 재판관이 중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시험이 어그러졌소. 전투를 준비하시오.

언제나 그렇듯 천정의 재판관은 긴 말을 하지 않고 힘을 보내주었다.

그녀는 수호신의 마력이 온몸에 차오르는 걸 느꼈다.

평소 같은 상황이었다면 수호신과의 교감은 이걸로 끝났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천정의 재판관이 덧붙였다.

- 조심하시오.

재판관의 음성을 들은 스칼렛이 두 눈을 부릅떴다.

재판관이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이건 정말 장난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그때 스칼렛은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절규를 들었다.

"흐아아아아아아!"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 스칼렛은 시꺼먼 오라에 둘러싸인 백골이 도시 중심의 사원으로부터 하늘로 솟아오르는 광경을 보았다.

스칼렛은 백골의 두 눈구멍 속에서 타오르는 도깨비불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였다.

이번에는 하늘에 있는 성으로부터 시퍼런 불덩이들이 다림델을 향해 쏟아졌다.

불덩이들이 건물을 부수고 땅에 박힐 때마다 쾅 쾅 하는 굉음이 나면서 박살 난 파편들이 여기저기 튀었다.

그녀의 코앞에도 불덩이 하나가 떨어지는 바람에 스칼렛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꺅!"

흙먼지를 머금은 돌풍에 후끈한 열기 그리고 송장 냄새가 실려 왔다.

그 끔찍한 냄새에 숨을 참은 스칼렛은 잠시 후 불덩이가 박혔던 구멍에서 거대한 형체가 솟아오르는 걸 보았다.

전신에 시퍼런 도깨비불을 두른 근육질의 거한이었다.

인간보다 두 배는 커다란 괴물이 풍기는 압도적인 존재감에 짓눌린 스칼렛이 신음 소리를 뱉었다.

"큭!"

괴물이 육중한 발을 구덩이 밖에 디디자 쩍 하는 소리를 내며 돌바닥이 박살 났다.

전신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버린 스칼렛이 자기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는 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온 물건이 쾅 소리를 내며 괴물에게 박혔다.

그러자 그 거대한 괴물이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쿵!

괴물에게 박힌 물건의 정체는 머리가 스칼렛의 몸통만큼이나 커보이는 망치였는데, 머리에 빼곡이 새겨진 룬문자가 시퍼렇게 빛나며 전류를 내뿜고 있었다.

뒤이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차리고 싸워요 아가씨!"

목소리의 주인공은 방금 본 조상원이 아니라 부서진 광야에서 만났을 때의 조상원만큼이나 커다란 거한, 수험자 <천둥망치>였다.

강자는 강자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스칼렛은 천둥망치가 지금껏 만났던 그 어떤 수험자보다도 강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단 한 명, 조상원을 제외하고.

이어서 대낮의 태양만큼이나 밝은 빛줄기가 괴물에게 꽂혔다.

빛줄기에 맞은 괴물이 재가 되어 사라지며 단말마를 남겼다.

"흐어어어억."

스칼렛은 고개를 돌려 빛줄기의 주인을 찾았다.

매 머리 모양의 투구를 뒤집어쓴 수험자가 스칼렛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수험자 <태양매>, 그 또한 천둥망치에 비견될 만한 강자였다.

스칼렛이 방금 본 빛줄기는 태양매의 스킬이었다.

4급은 될 것 같은 마물을 이렇게 간단하게 해치우다니, 역시 주신은 주신이었다.

정신을 차린 스칼렛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험자들과 불타는 거인들이 다림델 시내에서 난전을 치르고 있었다.

그녀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위대한 수호신의 권능을 어서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린 스칼렛이 그녀의 수호신에게 빌었다.

"천정의 재판관이시여. 혼탁한 지상에 규율을 세울 힘을 보내주소서."

그녀가 기도를 마치자 새하얀 빛줄기가 땅으로 쏟아져 창과 방패를 든 병사의 모습이 되었다.

천정의 재판관의 권능 '별의 군대'였다.

천상의 힘을 담은 병사들의 창끝이 마물들을 꿰뚫었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들려온 엄청난 굉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우르르르릉!

그 소리에 놀라 하늘을 올려다본 스칼렛은 충격적인 광경을 보았다.

쾅 소리와 함께 성벽을 뚫고 거대한 형체가 튀어나온 것이다.

마치 척추뼈처럼 생겼는데 체절마다 붙어있는 부속지들이 지네마냥 꿈틀거리는 모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했다.

그 꼴을 본 스칼렛이 넋을 놓고 말했다.

"뭐야... 저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쾅! 쾅!

성 여기저기서 그와 같이 생긴 것들이 튀어나오다가, 마침내 성의 지붕을 뚫고 그것이 제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전체적으로는 뱀의 백골의 형상이었는데 성벽을 뚫고 튀어나왔던 지네 모양의 촉수들 수십 개를 등 뒤에 달고 있었다.

스칼렛이 그것을 보고 말했다.

"저게... 저게... 저승의 새?"

스칼렛 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위용에 질려버린 수험자들이 넋을 놓고 주저앉았다.

그것이 서서히 고개를 돌려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그때였다.

- 귀를 막아!

갑자기 들려온 수호신의 불호령에 스칼렛은 귀를 막았다.

이어서 그것이 길게 울었다.

"쓰이이이이이이이이이!"

울음을 들으니 살갗이 저려 오는 게 느껴졌다.

그건 단순한 포효가 아닌 강력한 저주 스킬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수험자들이 끄어어어억 하는 소리와 함께 피를 토하며 털썩털썩 쓰러졌다.

스칼렛은 뱀처럼 생긴 머리통에 붙어있는 수백 개의 새파란 눈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아아."

스칼렛은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 * *

그 시각, 상원은 멀리서 저승의 새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상원은 노트에서 저승의 새에 대한 묘사를 보고 했던 말을 다시 뱉었다.

"도대체 저게 어딜 봐서 새냐고."

온몸이 백골로 이루어진 거대한 뱀인데 등에는 지네처럼 생긴 촉수를 수십 개 달고 있었다.

새하얀 뼈같은 껍데기 위로 혈관과 근섬유들이 수천 수만 마리 지렁이 떼마냥 꿈틀거렸다.

주변의 수험자들이 그 형상을 보고는 토악질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상원은 피식 웃었다.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러시나.'

원본인 명룡(冥龍)에 비하면 저건 정말로 귀여운 수준이었다.

그때였다.

저승의 새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긴 포효를 뱉었다.

"쓰이이이이이!"

단순한 포효가 아닌 강력한 저주 스킬 '원혼 군주의 절규'였다.

세 번째 시험에서 유성희를 보내버렸던 바로 그 스킬, 약한 수험자는 듣는 것만으로도 명을 달리한다.

원혼 군주의 절규가 다림델 성내를 뒤덮자 수많은 수험자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스칼렛 이베르손이며 천둥망치, 태양매 같은 주신급들도 별수 없었다.

30번 시험에 다다랐던 수험자들도 버거워했던 스킬을 15번 시험의 수험자들이 막을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그들과 달리 상원은 덤덤했다.

'불신자'를 개성으로 가진 상원에겐 그 어떤 스킬도 통하지 않으니까.

거대한 황성 위에 똬리를 튼 저승의 새, 그 위용은 전생에 런던에서 보았던 것과 같았다.

저승의 새로 변한 오디나스가 절규했다.

- 불신자!!!

수백 개의 눈동자가 상원을 쏘아보았다.

30번 시험에 다다른 수험자들을 벌레 보듯 내려다보던 그 오만한 눈동자가, 뭉개질 대로 뭉개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오기를 담고 상원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범한 수험자라면 실신하고도 남을 일이었지만 상원은 아니었다.

상원은 저 괴물을 거꾸러뜨릴 자신이 있었으니까.

상원은 의체 관리 인터페이스를 열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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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체 관리 시스템]

접근이 허가된 정보만 표시됩니다.

레벨 9 (13%)

성능: 괴력 40, 용력 40, 술력 75

스킬: 요새 수호자의 시선(3), 하늘의 불씨(2), 지하의 문(2), 동굴적 감각, 마나 삼키기(2), 원혼 군주의 절규, 저승의 새 (복구 중)

모래시계 충전 시간: 1분 13초

강신회로: 태초의 대족장

달성 업적: 네번째 문의 봉인자

일곱 별의 왕관 진척도: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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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다!'

상원이 세운 계획의 첫 단추는 오디나스의 스킬 '저승의 새'를 복사하는 것이었다.

스킬 복사기가 제 할 일을 해 준 덕에 상원의 스킬 메모리에 저승의 새가 등록돼 있었다.

상원은 스킬을 사용해보았다.

[스킬 저승의 새를 사용합니다.]

그러자 짐작했던 메시지가 떴다.

[육체를 이룰 뼈와 살이 필요합니다.]

그래, 예상했던 일이었다.

저승의 새는 알고만 있다고 쓸 수 있는 스킬이 아니었다.

저승의 새로 변신하려면 주술적 힘을 가진 대량의 뼈와 살이 필요했다.

오디나스도 저 술법을 쓰기 위해 황성 지하에 잠든 마신의 뼈와 살을 사용했었다.

그렇다면 상원이 쓸 뼈와 살은 어디에 있는가?

그때 누군가 상원에게 말을 걸었다.

비틀거리는 송혜경을 부축한 한창훈이었다.

"어우... 검은 양보다 끔찍한 걸 보게 되네요. 이거 참 정신 건강에 안좋아."

창훈이 절규를 맞고도 멀쩡한 건 당연했다.

화산정의 혐오체 본인이 개발한 스킬이었으니 파훼법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상원이 그를, 아니 그의 수호신을 향해 말했다.

"화산정의 혐오체, 뼈 좀 빌립시다."

잠깐 얼빠진 얼굴로 상원을 바라보던 창훈의 눈에 보라색 안광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화산정의 혐오체가 화신에게 강림했다는 뜻이었다.

화산정의 혐오체가 소리 높여 웃었다.

"하하하하하! 좋아, 좋아! 불신자, 게임을 해보자고!"

이어서 먼 하늘에서부터 보라색 유성이 지상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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