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저승의 새 (2)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안쪽에서부터 북문을 향해 다가왔다.
그들 중 가장 앞에 있던 키 큰 여인이 상원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에요 상원 씨. 제가 때를 잘 맞췄군요."
그녀는 바로 유성희의 별의 사도, <카라온 방벽> 앞에서 상원과 헤어졌던 신우주였다.
곁에 있는 자들은 새까만 무구로 중무장한 블라드가의 뱀파이어들이었다.
뒤이어 블라드가의 가주 발라딘 블라드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일이 이렇게 됐구려."
발라딘으로서는 씁쓸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둘도 없는 친구인 툴리오의 두 번째 배신을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첫 번째 배신은 아주 오래전 툴리오가 블라드 가문의 강령술 연구를 미스미엘 교단에 밀고한 일이었다.
블라드가의 등장은 상원에겐 아주 반가운 일이었지만 툴리오에겐 아니었다.
툴리오가 귀신이라도 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발라딘 블라드? 분명히 방벽 바깥으로 쫓아냈는데? 어떻게 여기에...."
발라딘의 장남 아르템 블라드가 쌍욕을 내뱉으며 양손 검을 뽑아 들었다.
"알 것 없다 배신자 새끼야."
그 말을 들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툴리오가 친구라는 건 가주 발라딘에게나 그럴 뿐, 블라드가의 다른 구성원들에겐 자기 살자고 친구의 가문을 팔아넘긴 배신자일 뿐이었다.
발라딘이 양손 검을 뽑아 들고 외쳤다.
"위대한 블라드가의 자식들이여. 이제 복수의 시간이다!"
그와 함께 뱀파이어들이 양 떼를 덮치는 늑대처럼 검은 뱀 기사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언데드 강화> 효과를 받은 뱀파이어들은 한 자가 넘는 검기를 뽑아내고 야차처럼 기사들을 도륙했다.
상원이 툴리오에게 말했다.
"어떤가, 검의 수호자였던 툴리오. 너에게 딱 맞는 상대 아니냐?"
역시 검은 뱀 기사단에 맞춰 뱀파이어들을 데려온 건 최선의 선택이었다.
검은 뱀 기사단이 쓰는 술법에도 능통할뿐더러 언데드 강화의 효과까지 받는 데다가 무엇보다도 검은 뱀 기사단의 카운터인 '물리 깡패'였으니까.
뱀파이어들이 검은 뱀 기사단을 상대한 덕에 상원이 원하던 구도가 만들어졌다.
툴리오와 일대일로 마주 보게 된 것이다.
상원이 툴리오에게 저벅저벅 다가가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검의 수호자... 아니, 검의 수호자'였던' 툴리오."
당황한 툴리오가 한발 물러섰다.
"으... 으윽."
툴리오에게 말을 걸며 상원은 오른팔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너의 진정한 주인. 너는 네 주인을 얼마나 믿지?"
오른팔의 지진 문신이 달아오른 쇳물처럼 시뻘겋게 빛났다.
한 세계의 지각을 쪼개버렸던 힘이 오른팔에 흐르고 있었다.
툴리오가 말했다.
"너... 그 힘, 그 힘도 마신의 힘 아니냐? 너도 똑같구나."
상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같지 않아."
강신회로를 통해 베낀 마신 <태초의 대족장>의 힘은 웬만한 시험은 껌 씹듯 쉽게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났다.
하지만 상원은 거기 안주할 생각이 없었다.
일곱 별의 왕관은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상원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 힘이 나를 구원할 거라고 믿지 않는다."
이어서 상원이 왼팔에 마력을 불어넣자 왼팔의 번개 문신이 하늘을 가르는 벼락처럼 시퍼렇게 빛났다.
오른팔에서는 달아오른 공기가 이글거렸고 왼팔에서는 스파크가 맹렬하게 튀었다.
오른팔에는 땅의 정령왕 <끝없는 땅의 거수>의 힘, 왼팔에는 하늘의 정령왕 <깊은 하늘의 괴조>의 힘.
상극인 두 힘이 부딪히면 어떻게 되는가?
상원은 두 주먹을 꽉 쥐고 양팔을 좌우로 뻗었다.
"그래서 이런 것도 개발했지."
이어서 상원은 날갯짓을 하듯 쭉 편 양팔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상극인 두 힘이 서로를 밀어내는 반발력에 양팔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밀려왔다.
의체 관리 인터페이스가 시끄러운 경고음을 반복해서 외쳤다.
[경고, 힘의 융합이 불안정합니다]
상원이 씹어뱉듯 외쳤다.
"닥쳐!"
양손이 가슴 앞에 왔을 때 반발력은 극에 달했다.
양 손바닥 사이에서 일어난 돌풍이 전장을 짓눌렀다.
상원은 두 힘을 하나로 합칠 주문을 외웠다.
"아혼 건 고 기르 멘."
우저적!
마침내 상원이 양손을 마주 잡자 양팔의 인공 근육과 골격이 쪼개지는 소리가 났다.
두 손바닥 사이엔 태풍과 지진의 웅대한 힘이 응집되어 있었다.
불안감을 느낀 툴리오가 소리를 지르며 대검을 뽑아 들었다.
"흐아아아악!"
하지만 툴리오는 돌풍에 짓눌려 뜻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상원에겐 그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한없이 느리게 보였다.
[하나로 융합된 두 힘을 방출합니다. 반발력 감쇄를 위해 의체를 변형합니다.]
의체 관리 인터페이스의 메시지와 함께 양어깨와 등을 뚫고 제트엔진같은 점화구가 튀어나왔다.
이어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점화구에서 불꽃이 폭발했고, 그 반발력으로 상원은 마치 날듯이 툴리오를 향해 쇄도했다.
툴리오의 모습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상원이 나직하게 내뱉었다.
"지옥도 천당도 내가 뚫고 지나간다."
상원의 양손이 툴리오의 복부를 꿰뚫었다.
마신의 가호를 받은 무쇠 갑옷이 호일처럼 맥없이 구겨졌다.
툴리오가 신음을 내뱉었다.
"으... 으윽...."
툴리오의 성벽 같은 거구도 상원의 쇄도를 막지 못했다.
우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툴리오의 육신이 퍽 하고 터져 나갔다.
이어서 시스템 메시지가 들렸다.
[<암흑 기사 툴리오>를 쓰러뜨렸습니다.]
[기여도에 따른 보상 정산을 시작합니다.]
상원은 큰 숨을 뱉었다.
"후우."
잠시 침묵이 북문을 덮쳤다.
이어서 찢어질 듯한 환호성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북문의 수험자들이 줄줄 울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들은 상원의 이름을 연호했다.
"조상원! 조상원!"
하지만 상원은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이제 곧 다음 시험이 시작될 테니까.
그때 갑자기 시스템 메시지가 들렸다.
[긴급 경고: 시험이 조정됩니다.]
상원이 눈썹 끝을 꿈틀했다.
시험이 조정될 거라곤 예상했지만 타이밍은 예상 밖이었다.
'아나르는 기관 직할 구역이 아니잖아. 시험 조정에 시간이 좀 걸릴 줄 알았는데.'
뒤이어 엄청난 진동이 온 천지를 집어삼켰다.
상원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 달이 겹쳐 있는 <마신의 달>, 그 한가운데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갈라진 틈으로부터 화려하고 거대한 성이 서서히 거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급하게 달려온 문혁이 외쳤다.
"상원 씨! 뭐... 뭡니까 저거?"
"황성(黃城)이군요."
냉철한 상원의 대답에 문혁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황성..? 카이네딘 황성요?"
상원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혁을 비롯해 패닉에 빠진 수험자들과는 달리 상원은 별다른 감정의 동요를 느끼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저 모습을 이미 본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전생의 런던이었다.
[축하합니다. 14번 시험 <성지 방어전>을 통과하였습니다.]
[15번 시험 <저승의 새>가 시작됩니다.]
[<대강령술사 오디나스>가 <저승의 새>로 변신합니다.]
[<저승의 새>를 물리치십시오.]
메시지를 본 문혁이 금세 냉정을 되찾고 말했다.
"아주 단순하고 직관적인 시험이군요."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혁의 말마따나 이번 시험은 단순하다.
저승의 새로 변신한 오디나스를 물리치면 끝난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상원이 문혁에게 말했다.
"이번 건 많이 어려울 겁니다."
당연하다.
왜냐하면 <저승의 새>는 원래 30번 시험이니까.
* * *
상원은 잠시 전생을 생각했다.
전생은 기관이 애당초 짠 시나리오대로 흘러갔다.
시나리오는 이랬다.
24시간 동안 다림델을 방어해 14번 시험을 마치고 나면 15번 시험 <황성 탈환>이 선포된다.
대강령술사 오디나스는 그제야 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수험자들을 황성으로 부른다.
힘을 되찾은 수험자들은 빛의 군대와 함께 대륙 반대편의 황성으로 진격하고, 배신한 툴리오와 검은 뱀 기사단을 쓰러뜨린다.
그러고 나면 오디나스가 향후를 기약하며 마신의 힘으로 <카이네딘 황성>을 통째로 뜯어내 연옥으로 도망간다.
이후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오디나스는 이동형 요새로 개조된 황성을 이끌고 런던을 침략한다.
수험자들이 런던을 방어하고 나면 30번 시험 <저승의 새>가 선포된다.
오디나스는 최후의 술법으로 황성에 묻혀 있는 마신의 뼈와 살을 이용해 저승의 새로 변신한다.
그렇게 저승의 새를 이기면 대강령술사 오디나스는 시험에서 완전히 퇴장한다.
하지만 지금은 전생과 다르다.
상원은 오디나스를 도발해 지금 여기에 황성을 부르게 만들었다.
시나리오의 안배를 벗어나 폭주한 오디나스는 <황성 탈환>을 해야 할 지금 <저승의 새>로의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
그래서 기관은 다급하게 원래 30번 시험인 <저승의 새>를 15번으로 갖다 붙인 것이다.
물론 승천 시험엔 밸런스 패치 같은 게 없다.
이제 겨우 15번 시험에 다다른 수험자들이 상대해야 하는 저승의 새는, 전생에 30번 시험의 수험자들이 상대했던 저승의 새와 똑같이 강하다.
30번 시험에 다다른 수험자들도 저승의 새를 상대하다 숱하게 죽어 나갔었다.
다림델의 수험자들은 전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상원은 15번 시험을 치를 준비를 끝내 놓았으니까.
최대한 강화한 만신전과 용제, 그리고 <낙원의 성화> 윤진아.
그거면 됐다.
* * *
생각을 끝낸 상원은 황성을 올려다보았다.
쾅! 쾅!
거대한 황성 주변에 맺혀 있던 새파란 불덩이들이 굉음과 함께 포탄처럼 다림델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전생에 런던도 저 포격에 쑥대밭이 되었었다.
건물을 부수며 지면에 박혔던 불덩이들이 불타는 거인 같은 모습이 되어 일어났다.
4급 마물 <연옥불 망령>이었다.
그때 시스템 메시지가 들렸다.
[<승천자 추방> 마법진이 해제되었습니다.]
[다른 차원의 숭천자들이 이 땅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14번 시험의 패널티인 <승천자 추방>이 해제되었다는 뜻이었다.
힘을 되찾은 승천자들이 초능력을 내뿜으며 <연옥불 망령>에게 달려들었다.
"와아아아!"
<지치지 않는 법률가> 스칼렛 이베르손에 <천둥 망치>와 <태양매> 같은 주신급들도 함께였다.
다림델 시가지에서 수험자들과 연옥불 망령들이 격렬히 싸웠다.
그 와중에 찢어지는 듯한 고함이 다림델 시내에 울려 퍼졌다.
"흐아아아아아아!!"
'드디어 나타났군.'
상원은 도시 중심의 사원을 향해 천천히 발을 옮기며 하늘을 보았다.
새하얀 백골이 시커먼 오라를 내뿜으며 사원에서부터 하늘로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마침내 인간의 껍데기마저 벗어버린 <대강령술사 오디나스>였다.
아주 먼 거리였음에도, 뻥 뚫린 눈구멍 속에서 시퍼렇게 빛나는 안광이 상원을 똑바로 쏘아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 여기까지다 불신자. 이 대륙을 통째로 갖다 바치더라도, 너 하나는 없애버리겠다.
오디나스의 스산한 전음이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아나르에서 치르는 시험의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대결이 다가오고 있었다.
상원이 오디나스에게 외쳤다.
"좋다! 얼마든지!"
이어서 하늘에 떠 있는 황성 안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