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저승의 새 (1)
신화의 몸은 정말 빌어먹을 정도로 고성능이었다.
상원은 백 보 넘게 떨어진 북문의 상황을 - 언데드들의 썩은 내와 태양 기사들의 온기 그리고 겁먹은 수험자들의 떨림 하나하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때 툴리오가 소리를 지르며 대검을 휘둘렀다.
"미스미엘! 이제 진정한 주인을 받아들일지어다!"
진정한 주인, 상원은 그 다섯 글자를 곱씹었다.
툴리오가 섬기는 자는 승천 시험을 떠받치는 다섯 마신 중 하나인 <연옥의 폭군>이었다.
전생에 그와 수험자들은 그 사실을 알았기에 대비할 수 있었다.
상원은 노트를 통해 알았고, 수험자들은 미리 정보를 공유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이 사실을 모른다.
전생과 다르게 상황이 흘러왔기 때문이다.
그때 진아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니... 천국의 수호자라면서요. 그런데 마왕을 섬길 수가 있어요?"
문혁이 진아의 물음에 답했다.
"있습니다. 검의 수호자 툴리오는 생전에 강령술에 심취했었거든요."
"그런데 수호자가 됐다고요?"
"네. 그는 당대에... 아니, 고대인의 시대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성직자 중 하나였으니까요."
진아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상원은 문혁의 대답에 감탄했다.
'오호.'
이세계로의 전이(轉移) 후 지금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저 정도의 지식을 쌓은 게 놀라워서였다.
역시 백문혁의 최대 강점은 그 착실함이다.
그때 암흑 기사 툴리오가 강력한 저주가 담긴 비명을 질렀다.
웬만한 수험자들이라면 단번에 절명해버릴 정도로 강력한 저주였다.
"흐아아아아!"
수험자들이 신음과 함께 풀썩풀썩 쓰러졌다.
"으아아악!"
"끄으으으으윽!"
전생에도 저 비명 한 번에 수험자 다수가 무력화됐었다.
툴리오와의 싸움을 겪어 본 상원에겐 다음에 일어날 일이 눈에 선했다.
'이 다음은 학살이다.'
툴리오의 묵직한 한마디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발론."
그러자 검은 뱀 기사들이 쏜 회색 레이저가 태양 기사들을 꿰뚫었다.
태양 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전장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흐아아아아!"
"흐으으으으!"
단 한 번의 집중 사격에 빛의 기사들이 절반 넘게 쓸려나갔다.
하지만 학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뒤이은 명령에 또다시 일제사격이 시작되었다.
"아라, 아이!"
둥! 둥!
수백 줄기 레이저에 태양 기사들이 반딧불처럼 꺼져 나갔다.
위용을 자랑하던 태양 기사들은 삽시간에 모조리 증발해버렸고, 남겨진 노인의 시체 너머로 주저앉은 수험자들이 참담한 표정으로 언데드 군단을 마주하고 있었다.
태양 기사들 다음은 수험자들이다.
손톱을 곧추세우고 이빨을 드러낸 키메라 병단이 수험자들을 향해 다가갔다.
"크르르르릉!"
전생과는 상황이 다르다.
수험자들은 <승천자 추방> 마법진 때문에 잃어버린 힘을 되찾지 못했다.
그대로 두면 수험자들은 모조리 키메라들의 밥이 될 것이다.
'지금이다.'
이때가 바로 상원이 재고 있던 타이밍이었다.
메시아로서의 모습을 도탄에 빠진 북문의 수험자들에게 각인시켜서 이들을 모조리 추종자로 만들 타이밍.
모두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더 이상의 희망은 없다고 생각할 때, 메시아는 바로 그때 나타난다.
그다음은 연출이다.
상원에겐 북문의 수험자들을 구할 능력도 작전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메시아가 될 수 없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저 존재는 나와 격이 다르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연출, 메시아가 되기 위해선 그게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연출을 어떻게 할 것이냐?
단 하나면 된다.
이제 가진 스킬 중 가장 강하고 화려한 걸 보여줄 것이다.
"<깊은 하늘의 괴조>여."
끝없는 하늘의 괴조, <태초의 대족장>을 이루는 두 정령왕 중 하늘의 정령왕.
그 끝없이 높은 격을 가진 자의 이름은 부르는 것만으로도 혀가 마비될 것 같은 충격을 주었다.
그 이름을 부르자 상원의 좌반신을 빼곡히 뒤덮은 번개 문신이 파랗게 빛나기 시작했고 얼얼한 통증이 빠르게 좌반신을 타고 퍼졌다.
파지직
상원의 왼팔에서 눈 부신 스파크가 튀었다.
한 세계의 하늘을 모조리 찢어버렸던 그 힘이 상원의 왼팔에 고여 있었다.
"그으으으윽!"
우드드득
상원이 통증에 맞서며 주먹을 쥐자 무지막지한 뼛소리가 났다.
이어서 턱없이 막대한 힘이 담겨 움직이기조차 힘든 왼팔을 하늘 높이 뻗었다.
마력을 드론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왼팔의 진동이 얼굴까지 전해져 턱이 덜덜 떨렸고 이빨이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의체 관리 인터페이스가 물었다.
[<하늘불꽃 드론>에의 마력 전송을 승인하시겠습니까?]
상원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나직이 내뱉었다.
"승인.“
[승인. 마력을 전송합니다.]
메시지에 이어 왼팔로부터 시퍼런 번개 줄기가 콰르르릉 하는 소리를 내며 승천하는 용처럼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왼팔에 담겨 있던 마력이었다.
하늘로 마력을 쏘아낸 반작용이 상원을 짓눌러서 디디고 있던 돌바닥이 우저적 갈라졌다.
이어서 번개 줄기가 사냥감을 향해 달려드는 매처럼 하늘불꽃 드론에 쇄도했다.
콰르르릉!
괴조의 마력을 받은 드론이 초신성처럼 시퍼런 빛을 사방으로 뻗어내기 시작했다.
왼팔을 툭 떨어뜨린 상원이 헉헉 숨을 쉬며 그 모양을 지켜보았다.
언데드와 수험자들도 깜짝 놀란 얼굴로 갑자기 빛나기 시작한 드론을 쳐다보았다.
그때 의체 관리 인터페이스가 경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경고: <하늘불꽃 드론>이 과부하 되었습니다.]
이제 쇼타임이다.
상원은 명령을 내렸다.
"마력 방출.“
[<하늘불꽃 드론>이 마력을 방출합니다.]
상원에게 들린 시스템 메시지는 곧 언데드 군단에게는 임종 메시지와 같았다.
곧 북문 위에 떠 있는 드론에서 새파란 마력이 사방으로 방출되기 시작했다.
드론을 둘러싼 마력 덩어리의 모양이 번개로 된 커다란 새가 두 날개를 곧게 편 모습처럼 보였다.
그게 바로 <끝없는 하늘의 괴조>의 형상이었다.
혜경과 창훈이 그 광경을 보며 말했다.
"저거... 익룡이에요? 저거 이름이...?"
"프테라노돈이야 여보. 프테라노돈."
<부서진 광야>의 하늘의 정령왕이 익룡처럼 생겼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창훈의 말마따나 그 모습은 영락없는 익룡이었다.
상원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허, 그렇네요."
드론 주위에 얼마나 많은 마력이 고여 있는지 드론으로부터 한참 떨어져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상원의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멀리 떨어져 있는 상원도 그럴진대, 드론 바로 앞에 있는 언데드 군단은 무지막지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툴리오가 기겁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게 무슨!"
지구의 승천자들이 <승천자 추방>의 효과로 개입할 수 없게 된 지금, 저런 마력이 언데드 군단을 덮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검은 뱀 기사단의 단장이라는 직책에 걸맞게, 툴리오는 재빨리 상황을 판단하고 기사단에 명령을 내렸다.
"에아, 쓰!"
명령을 받은 검은 뱀 기사들이 일제히 방패를 모았다.
기사단이 자랑하는 <항마 방진>으로, 웬만한 마법계 스킬은 모조리 차단할 만큼 높은 방어력을 자랑하는 방진이었다.
그래, 저걸 전개해서 스킬을 막으면 기사단이 입는 피해는 최소화될 것이다.
어쨌든 스킬은 준비됐다.
상원은 명령을 내렸다.
"낙뢰.“
[명령 접수. 실행. <부서진 광야>의 번개 폭풍을 부릅니다.]
의체 관리 인터페이스의 메시지와 함께 하늘불꽃 드론에 고여 있던 마력이 수천수만 줄기 벼락이 되어 언데드 군단을 집어삼켰다.
뒤이어 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엄청난 섬광이 북문을 덮쳤다.
콰콰콰쾅!!
섬광에 이어서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흙먼지를 머금은 후폭풍이 상원을 삼켰다.
흙먼지 사이로 살이 타버린 매캐한 냄새가 풍겨왔다.
휘이이잉
돌풍에 흙먼지가 걷혔다.
전장의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카이네딘 제국의 자랑, 흉악하기 그지없는 키메라 병단이 모조리 통구이가 되어 있었다.
<언데드 강화 마법진>의 힘으로 항마력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린 검은 뱀 기사단의 방진은 비교적 멀쩡했지만, 그들도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항마 방진으로 피해를 최소화한 게 그 정도였다.
툴리오가 온몸에서 연기를 내뿜으며 씩씩거렸다.
"흐으... 흐으...."
그래.
메시아 강림을 알리는 쇼는 이 정도 스케일은 있어야 된다.
그 장대한 스케일에 상원 곁의 두 수험자는 넋을 놓아버렸다.
"미쳤어... 미쳤어...."
"세상에... 상원 씨 도대체 얼마나 강한 거예요?"
창훈의 물음에 상원이 뻐근한 왼팔을 툭툭 털면서 대답했다.
"그렇게 강하진 않습니다. 이거 자주는 못 써요."
아무리 태초의 대족장의 힘을 베꼈다고 해도 이 정도로 대규모의 주문을 연속으로 쓰는 건 무리였다.
사실 상원이 들인 마력의 양을 감안하면 언데드 군단이 입은 피해 자체는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쇼의 성패는 효율성에 달려있는 게 아니다.
저벅 저벅
상원이 천천히 북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북문의 시간은 마치 멈춰버린 것 같았다.
그 사이로 걷는 상원을 향해 수백 수험자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멍하니 상원을 올려다보는 다른 수험자들의 눈에 존경심과 경외감이 깃들어 있었다.
진아가 상원을 멍하게 올려다보며 말했다.
"독생자."
진아는 상원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상원을 독생자라 칭하는 존재는 온 천지에 딱 하나, 그녀의 수호신 <낙원의 수문장>뿐이었다.
그러니까 이번 쇼는 차원 건너편의 하늘에서 이 땅을 바라보는 승천자들까지 홀렸다는 소리였다.
대성공이었다.
수험자들과 언데드 군단 사이를 막아선 상원이 수험자들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늦지 않게 왔군요."
수험자들에게는 상원의 웃음이 부처만큼이나 자애롭게 보일 것이다.
"아아... 감사합니다."
정신을 차린 수험자들이 상원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어떤 이들은 줄줄 울고 있었다.
이제 이 북문의 수험자들은 죽음의 위기에서 이 땅에 강림한 수험자 조상원을 기억할 것이다.
이제 나만 믿으라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인 상원은 고개를 돌려 언데드 군단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부상 당한 상태라 해도 성벽처럼 늘어선 검은 뱀 기사단과 그 선봉에 선 암흑 기사 툴리오의 위용은 대단했다.
툴리오가 상원을 노려보며 물었다.
"너는... 저들의 메시아인가?"
상원이 피식 웃으며 반문했다.
"메시아? 아니, 나는 불신자다. 메시아 따위 믿지 않지."
시간과 공간 저 너머에서 이곳을 바라보며 자신을 가호해 줄 자, 언젠가 이 땅에 도래하여 도탄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해줄 메시아 따위는 믿지 않는다.
빠짐없는 지식과 회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물 샐 틈 없는 계획을 세우고 최적의 가능성을 찾아 그것을 공략해 나갈 뿐.
오로지 그뿐이다.
콱!
바닥에 대검을 꽂은 툴리오가 물었다.
"믿지 않는 자를 기다리는 것은 영겁의 불꽃뿐이나니. 불신자.... 메시아도 아닌 니가... 이 군대를 홀로 상대할 생각이냐?"
툴리오의 비웃음에 상원이 대답했다.
"아니, 그럴 리가 있나."
물론 상원의 전력은 툴리오를 포함한 검은 뱀 기사단 전체보다 앞선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진짜로 중요한 건 바로 이어질 시험이었으니까.
상원이 덤덤하게 말했다.
"나는 혼자가 아니야. 너에게 꼭 맞는 상대를 데려왔단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