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99화 (99/230)

제99화. 성지 수호전 (6)

"후우."

하늘을 올려다보며 깊은숨을 쉬자 겨울을 맞은 이계의 공기가 폐 속 깊이 들어찼다.

모든 시민과 수험자들이 성문을 방어하러 간 탓에 사원 근처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사원에서 북문까지 난 대로엔 개미 새끼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너무 조용하다. 너무너무 조용해."

상원을 따라 올라온 혜경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자, 창훈이 입을 열었다.

"다들 성문으로 몰려갔겠지. 빛의 군대가 언데드들이랑 싸우는 거 보려고 말이야. 영화 한 편 보는 기분이겠는데."

"갑시다."

상원의 나직한 말에 창훈과 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이 대로를 따라 북문을 향해 걷기 시작하는데, 누군가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어머, 당신. 어째서 안 보이나 했더니 이런 데 있었군요."

두 눈에 총기가 넘치는 금발의 백인 여성, 바로 <지치지 않는 법률가> 스칼렛 이베르손이었다.

그녀는 늘 입던 정장이 아닌 에키나르타풍 로브 차림이었는데 몸이 워낙 곧은 덕에 벙벙한 로브도 잘 어울렸다.

"아아, 오랜만입니다."

상원이 싱글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이 사람이라면 성문이 아니라 도심에 있을 법했다.

수호신의 격이 올라갈수록 정보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는 승천 시험의 특성상 주신급인 <천정의 재판관>을 수호신으로 둔 그녀는 지금 수험자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빛의 군대와 언데드의 전쟁이라는 아무것도 얻을 것 없는 쇼를 구경하고 있을 만큼 여유로운 성격도 아니었다.

그런 성격이 그녀를 세브로 랭킹 2위라는 자리까지 울려놓았을 것이다.

"어디 가는 건가요? 설마 당신도 쇼 보러 가는 거예요? 다른 멍청이들처럼?"

"네."

스칼렛의 물음에 상원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왜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투로 말하는 스칼렛을 보며 상원은 회귀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도 열네 번째가 날로 먹는 시험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다른 수험자들이 빛의 군대와 언데드의 싸움을 구경하는 사이 상원은 숙소에서 밀린 잠을 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제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재밌는 일이 있으니까요. 같이 가시는 건 어떤가요?"

"아니, 아니 됐어요. 그런 걸 또 보고 싶지는 않아요."

상원의 말에 스칼렛이 질린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일곱 번째 시험에서 마신 <태초의 대족장>을 직면하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일이 머릿속에 스쳐 가는 모양이었다.

그때 태초의 대족장을 대적했던 수백의 영웅들 중 살아남은 자는 상원과 스칼렛 단둘뿐이었다.

"이제 천국을 간다 해도 당신을 따라서는 안 갈 거예요."

미소 띤 스칼렛의 농담에 상원도 피식 웃었다.

'그래도 천정의 재판관이 상황 설명은 잘 해줬나 보군.'

스칼렛이 실신했을 때 상원이 그녀의 목숨을 살리는 걸 천정의 재판관은 모두 지켜보았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녀가 상원에게 호감을 표하는 건 재판관이 그녀에게 상황을 잘 설명해준 덕일 것이었다.

꼿꼿하기로 소문난 승천자 <천정의 재판관>의 환심을 사두었으니, 후에 반드시 필요할 때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그래요, 푹 쉬어요. 조금 있으면 다시 정신없어질 겁니다. 알죠?"

"그럼요, 알다마다요."

상원의 말에 푹 웃은 스칼렛이 가벼운 손 인사를 남기고 멀어졌다.

"그래, 조금 있으면 성지가 완전히 뒤집어질 테니까."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린 상원이 몸을 돌렸다.

빛의 군대와 언데드의 격돌을 지켜보지 않고 도시 안쪽에 몸을 숨긴 수험자는 스칼렛 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들 모두 스칼렛과 비교할 수 있을 만큼의 실력자일 것이고, 얼마 뒤면 몸을 숨기고 마음 편하게 있지는 못하게 될 것이다.

"어머, 상원 씨. 누구에요? 되게 예쁘네?"

상원을 기다리던 혜경이 물었다.

"그냥, 아는 사람입니다."

"에이, 저 아가씨 상원 씨한테 관심 좀 있어 보이던데요? 그치 여보?"

덤덤한 상원의 대답에 혜경이 그럴 리 없다는 듯 대답했다.

"응, 예삿 눈빛은 아니었어.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자기 눈빛 보는 것 같더라구."

"무슨 소리야."

"아야, 아파요 여보. 힘만 무지무지 세서는."

"어쭈, 어디 그 힘 맛 한번 봐 봐라."

혜경이 너스레를 떠는 창훈의 팔뚝을 찰싹 때리자 창훈이 얼굴을 과장되게 찌푸렸다.

"하하."

상원이 부부의 여유 넘치는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열네 번째 시험까지 오면 인간성이 모조리 닳아버리기 마련인데 지금도 이런 분위기라니.

1회차 때 상원이 겪었던 삭막하기 그지없는 세계와는 너무도 달랐다.

동시에 상원은 이 인간적인 모습들이 어느 날 갑자기 먼지처럼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졌다.

'아니, 아니다. 오로지 승천만이 중요할 뿐. 나는 내 할 일을 하자.'

"갑시다."

"네네, 갑니다 가요."

"어우... 또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불안해 죽겠네."

상원이 마음을 다잡고 발걸음을 내딛자 창훈과 혜경이 그의 뒤를 따랐다.

또 다른 전장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단 상황을 좀 살펴볼까.'

북문으로 향하면서, 상원은 드론을 먼저 보내 북문의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하늘불꽃 드론>을 사출합니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상원의 왼쪽 어깨 근육이 세로로 갈라지면서 주먹만 한 회색 기계가 통 튀어나왔다.

이어서 웅크린 새가 날개를 펴고 비상하듯 프로펠러를 편 드론이 하늘로 슝 사라졌다.

"정말 시험 치면서 많고 많은 초능력을 봤지만 어깨에서 드론이 나오는 초능력 있는 사람은 상원 씨밖에 없을 겁니다."

창훈이 멀어지는 드론을 보고 이야기했다.

"에이 이 정도 가지고요. 나중에 가면 몸에서 함포가 나오는 친구도 만날 텐데요."

"엑... 진짜 가지가지 하네요."

질린 얼굴로 말하는 혜경에게, 상원은 '사실은 제 입에선 레이저가 나갑니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 * *

북문의 전황이 드론을 통해 상원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오백 남짓한 태양 기사들이 물밀듯 몰려오는 언데드들을 상대로 분전하고 있었다.

아니 그건 분전이라기보단 학살에 가까웠다.

물론 언데드들은 대강령술사 오디나스의 주술로 강화된 상태였지만 성(聖)속성 정령인 태양 기사들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어두운 오오라를 머금은 해골 병사들의 병장기는 태양 기사들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하고 녹아내렸고, 단단한 갑옷도 성스러운 칼날에 두부처럼 잘려 나갔다.

"와... 멋지다!"

"세상에, 영화 보는 것 같아."

그리고 태양 기사들과 비슷한 수의 수험자들이 문 안쪽에서 전투를 구경하고 있었다.

보통의 수험자라면 이게 당연한 반응이었다.

"천당의 수호자... 무지막지하군요."

"그러게. 우리가 원래 힘을 쓸 수 있었어도 저 정도는 절대 안 될 것 같은데."

몇몇 수험자들이 대오의 최전선에 선 거한을 보며 말했다.

"하아아아아!"

새파란 갑옷을 입은 거한, 검의 수호자 <툴리오>가 대오의 최전선에서 우렁찬 함성과 함께 문짝만 한 양손 검을 휘두를 때마다 언데드들이 수십 마리씩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상원도 노트로는 많이 봤지만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무리 더 몰려와 본들! 이 툴리오가 서 있는 한 성지에 단 한 발도 들여놓을 수 없다!"

툴리오가 검을 높이 쳐들고 소리를 지르자 빛의 기사들과 수험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 분위기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구경꾼 취급당하는 게 그렇게 유쾌하진 않군."

<청낭의 의선>의 화신, 서울역 제일의 치료사 오태성이었다.

‘잘 오셨네요 어르신.’

태성의 얼굴을 보며 상원은 피식 웃었다.

그는 상원의 지휘에 따라 송혜경과 함께 대륙 동남쪽의 오스터 군도로 갔고, 그가 일러준 대로 열두 번째 시험을 통과하자마자 <검은 숲의 목자>에게 단단히 씌인 송혜경을 버려두고 다림델로 직행하는 포탈을 탔다.

제정신을 잃어버린 동료를 버린 죄책감 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

송혜경과 조금이라도 더 붙어있었다가는 잔뜩 화가 난 목자에게 갈가리 찢겨서 죽었을 테니까.

어쨌든 성지에 도착한 태성은 문혁과 진아를 만났고, 문혁을 통해 전해 들은 대로 진아와 함께 북문의 상황을 지켜보는 참이었다.

"참으시죠 어르신. 저기 잘못 끼어들었다가는 비명횡사할 겁니다."

태성의 말에 대답한 문혁이 <물소 각궁>을 뽑아 들고 빛의 군대와 언데드가 대치 중인 곳을 향해 화살 한 발을 쏘았다.

평소였다면 해골 병사 하나쯤은 쉽게 거꾸러뜨렸을 화살은 갑주에 맞고는 팅 소리를 내며 힘없이 튕겨져 나왔다.

"아... 평소 힘의 반의 반... 아니 십 분의 일만 쓸 수 있었어도 이런 것들쯤은...."

진아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구, 이 아가씨 호전적이 됐네?"

예전 같지 않은 진아의 태도에 태성이 허허 웃었다.

"아나르 건너 와서 언데드란 언데드는 보이는 대로 족족 박멸했더니 힘이 넘쳐흘러요. 지금은 뭐 이런 신세지만."

진아의 손끝에 자그맣게 맺혔던 분홍색 불꽃이 피식 꺼졌다.

상원의 지휘대로 대륙에서 가장 강한 언데드들이 출몰하는 <요이르오름 구릉>에서 여정을 시작한 진아는 언데드들을 학살하며 신앙과 코인을 제대로 쌓아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성지 방어전을 참여하려고 하니 <낙원의 수문장>이 보내는 힘이 끊겨버린 탓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아쉽지만 이 무대는 우리가 주인공이 아닌 걸로 생각하죠. 이다음에는 우리가 활약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해안선의 귀신께서 그러시던가? 뭐, 전투라면 이골이 난 양반 말이니 맞겠지."

태성의 말에 문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말이에요, 아까 <낙원의 수문장>께서 하신 말씀인데... 저 수호자, 조심하래요."

진아의 말에 태성과 문혁이 동그란 눈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왜죠?"

"느껴지는 기운이... 그냥 성령의 기운이 아니래요. 겉으로 보기엔 영락없는 성령이지만... 한 꺼풀 아래 다른 게 있는 것 같다고."

"다른 것이라."

진아의 말에 문혁이 안경을 고쳐 쓰고는 수호자의 활약을 지켜보았다.

검의 수호자가 이리저리 흩뿌려대는 황금빛 검격은 어떻게 보아도 성속성이었다.

그런데 그 안에 다른 게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우르르릉!

성문 안쪽에서부터 시작된 거대한 진동이 수험자들을 덮쳤다.

"꺄아아악!"

"으으윽!"

그 통에 중심을 잃고 넘어진 수험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언데드 강화 마법진>의 단계가 올라갔습니다. 언데드들이 강해집니다.]

"어... 뭐라고?"

이어서 공지된 시스템 메시지에 수험자들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으으으윽!"

"그아아아아아악!"

해골 병사들의 눈에서 시퍼런 기운이 줄줄 흘리며 빛의 기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으으으윽!"

빛의 기사들이 신음을 흘리며 해골 병사들의 공격을 받았다.

기사들이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무슨 짓이냐 오디나스?"

대검을 휘둘러 해골 병사들을 도륙해버린 검의 수호자 툴리오가 하늘을 보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