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성지 수호전 (5)
"형님?"
만웅은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놀라 주변을 둘러 보았지만 어디에도 상원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자신과 같이 힘을 잃어버린 수험자들이 언데드들과 빛의 기사들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을 뿐이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던 만웅이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던졌다.
"크아아아악!"
"흐아아아아!"
챙!
장검에 시꺼먼 오라를 두른 해골 병사와 샛노랗게 빛나는 빛의 창을 꼬나쥔 빛의 기사가 만웅의 눈앞에서 부딪혔다.
"이런 씨발...."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은 만웅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자칭 협객>의 가호를 받지 못하는 지금, 만웅은 저 싸움에 휘말렸다간 두부처럼 박살 나버릴 게 분명했다.
"영웅 나으리들 꼬라지가 말이 아니네. 이렇게 뒷짐 지고 구경이나 하는 건 영 성미에 안 맞는데 말이야."
수험자들 사이에서 싸움을 구경하던 강상중이 말했다.
전장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다 늙어버린 사자처럼 쓸쓸해 보였다.
"하아... 회장님."
만웅이 힘없는 얼굴로 강상중을 바라보았다.
만웅이 상원 다음으로 존경하는 사람인 <콘크리트 회장> 강상중은 그 별명처럼 단단하기 그지없는 냉혈한이었다.
그런 사람이 쓸쓸한 눈빛을 보인다는 사실이 만웅은 참 슬펐다.
"어쩔 수 없지. 여긴 우리 무대가 아니군."
허허 웃으며 말하는 상중이 배를 슬슬 문질렀다.
카라온 방벽 앞에서 유성희에게 찔린 곳이었다.
다행히 급소를 비켜 맞아서 목숨은 건질 수 있었고 부하들의 헌신적인 간호로 활동에 무리가 없을 만큼 몸을 회복했다.
만웅은 회장의 상처를 볼 때마다 가슴이 저몄다.
원강수와 박명희를 보고 망설이지 않았다면 회장님이 저런 꼴을 당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내 잘못이다. 내 잘못이야.'
"끄응."
만웅이 비통한 신음을 흘렸다.
"왜 그러냐 이눔아. 똥 마려운 개새끼마냥."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가 그때...."
"됐어."
상중이 만웅의 어깨를 툭 쳤다.
"살아났잖아. 그걸로 됐다. 살아만 있으면 더 강해질 수 있고 하늘에도 오를 수 있어. 너도 몸 잘 챙겨라 이놈아."
"예 회장님."
상중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만웅의 마음은 영 괜찮아지지 않았다.
그런 만웅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는지 상중이 말을 돌렸다.
"성지 수호전이라길래 어마어마한 게 기다리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만. 그냥 들러리만 서다가 끝나는 거였나?"
상중의 말마따나 그들이 있는 동문은 빠르게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언데드들은 강했지만 빛의 기사들은 그보다 훨씬 강했다.
특히 전장 한가운데서 빛의 기사들을 지휘하는 수호자의 무용은 눈부셨다.
새빨간 빛의 화려한 갑옷을 입은 수호자가 자기 몸만큼이나 큰 장궁에서 빛나는 화살을 쏠 때마다 언데드들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한 발에 하나씩.
만웅은 그녀가 기계처럼 언데드들을 도살하는 모습을 넋을 잃고 지켜보았다.
"저 여자... 천국의 문을 지키는 활의 수호자 <할레온>이라고 했지."
상중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한 번 듣고 그걸 외우셨습니까? 명석하십니다 회장님."
"어이구, 아주 용비어천가를 부르지 그래."
상중이 피식 웃었다.
"귀 모양 보니까 엘프겠고... 체구가 좀 큰 걸 감안해도 비상식적으로 강한데. 저 친구도 높으신 분들의 가호를 받는 건가? 우리처럼 말이야."
상중이 턱을 쓸며 말했다.
"그... 잘 모르겠습니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만웅이 벙찐 표정으로 뒷통수를 쓰다듬었다.
만웅은 회장이 하는 말 중 반의반도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냥 늙은이 혼잣말이었어."
상중이 하늘에 뜬 마신의 달을 바라보며 허허 웃었다.
"그냥 생긴 거나 살벌하지... 이거 뭐 우리 따위랑은 궤를 달리할 정도로 강하니까 질투니 뭐니 이런 생각도 안 드네. 그냥 이렇게 두 손 놓고 있으면 시험 끝나겠구만."
두 눈을 가늘게 뜬 상중이 허 하고 숨을 뱉으며 두 손을 머리 뒤에 맞댔다.
"와 대단해! 엄청 멋있어!"
"어떻게 저렇게 강하지?"
수험자들의 환호성에 만웅이 뒤를 돌아보았다.
성지에 모인 수많은 수험자들의 감정은 만웅과 상중과는 다른 것 같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희열과 감탄이 가득했다.
"오오! 쩐다!"
만웅은 그들 가운데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중학생, 박정수였다.
"여! 꼬맹이!"
"어! 만웅이 형!"
만웅이 반가운 얼굴로 인사하자 정수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다른 세계의 성지에까지 와서 아는 얼굴을 만난 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역시! 너라면 여기까지 올 줄 알았다."
만웅이 씩 웃으며 정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너 임마, 못 본 사이에 팔뚝이 더 굵어졌네. 성장기라 그런가?"
"에이, 아직 멀었죠."
정수가 뿌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데 형은 왜 여기 있어요? 서울역 다른 분들은 다 북문으로 갔는데요. 문혁이 형이랑 진아 누나랑 태성 할아버지랑...."
"어 그래? 그 사람들, 다 만났어?"
만웅이 정수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아야, 아파요."
너무나도 반가운 마음에 두 손에 힘이 들어가 버린 탓에 정수가 살짝 짜증을 내며 만웅의 손을 쳐냈다.
"아니 만난 건 문혁이 형만요. 상원이 형이 문혁이 형한테 그랬거든요. 진아 누나랑 태성 할아버지 데리고 북문으로 가라고요."
정수의 말에 만웅이 숨을 헙 들이켰다.
"상원이 형님을? 상원이 형님을 만났다고?"
"네. 상원이 형은 다른 데 일이 있다고 갔어요. 곧 돌아올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하... 하하하하...."
정수의 말에 만웅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서울역의 든든한 후원자 조상원은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안도감에 만웅은 살짝 눈물을 흘렸다.
"에? 형 울어요?"
"아니, 아니야 이 씨.... 눈에 뭐가 들어가서."
만웅이 눈가를 살짝 닦았다.
"그래, 나도 빨리 가야겠다. 어디라고? 북문?"
만웅이 소리 높여 말했다.
그때였다.
- 만웅아? 들리냐?
다시 한번 머릿속에서 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아? 아!"
그제야 만웅은 아나르에 오기 전 상원이 건네주었던 물건을 떠올리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딱딱한 소라 껍데기를 만졌다.
그건 바로 <전음 소리가>로 나눠 가진 사람들이 전음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아이템이었다.
- 예, 형님! 상원이 형님!
만웅이 반가운 마음을 가득 담아 전음을 날렸다.
전음을 날리느라 안 그래도 없는 마력을 쭉 써버린 탓에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만웅은 그것조차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기쁘고 설렜다.
- 그래, 전음을 보니 잘 있었나 보구나. 쉽지 않은 여정이었을 텐데 잘했다. 역시 서울역의 행동대장답다.
- 하하... 과찬이십니다 형님.
"에... 형? 뭐해요 갑자기?"
정수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쑥쓰러운 웃음을 짓는 만웅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아이 씨, 그런 게 있어 임마. 어른들 얘기하는 데 가만히 좀 있어라."
"에...?"
정수에게 핀잔을 준 만웅은 다시 전음에 집중했다.
- 형님! 문혁이랑 진아 씨랑 태성 어르신은 북문으로 가셨다던데요? 저도 북문으로 갈까요?
- 아니다 만웅아. 너는 따로 할 일이 있어.
- 예. 맡겨만 주십쇼 형님.
- 강상중을 데리고 남문으로 가라.
결연했던 만웅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강상중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진짜 왜 그래요 형?"
정수의 물음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회장한테 남문으로 가자고 얘기하라고?
저 강상중한테?
- 회... 회장님을 데리고... 남문으로요?
한동안 사고가 굳어버렸던 만웅이 간신히 전음을 넣었다.
소라기를 쥔 만웅의 손이 벌벌 떨렸다.
-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니가 가자고 하면 강상중은 갈 거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만웅은 번민했다.
상원 형님의 말을 따라서 회장님에게 남쪽으로 가자고 말을 하자니, 상중이 이유를 추궁했을 때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또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았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했다간 불벼락이 떨어질 것이었다.
"흐으... 씹...."
만웅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건가?
한동안 고민하던 만웅은 결국 생각을 굳혔다.
"씨발... 몰라, 지르자."
후우, 만웅은 한숨을 내뱉고 코를 슥 문질렀다.
"회장님?"
"왜?"
상중은 그런 만웅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만웅은 자기를 바라보는 상중의 눈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하지만 말해야 했다.
이건 상원 형님이 시킨 일이니까.
"남문... 남문으로 가시지요."
말을 뱉고 나서 만웅은 자기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그... 에?"
"가자 남문으로. 앞장서라."
의외로 순순한 대답에 만웅은 벙찐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만웅이 아는 강상중은 단지 부하의 말만 듣고 이런 식으로 움직일 만한 사람이 절대로 아니었다.
"아니...."
"뭐해? 니가 가자며?"
"예? 아, 아... 예. 남문, 남문이...."
"에이, 이쪽이다. 멍청한 놈아."
끌끌 혀를 차고 움직이는 상중을 만웅이 허둥지둥 따라갔다.
"만웅이 이놈아."
"예 회장님."
"그분께 잘 부탁드린다고 말씀 전해 드려라."
"예... 예?"
"아니다, 됐다."
상중이 피식 웃는 소리가 만웅의 귓가에 들렸다.
* * *
"이 정도면 됐다."
상원은 전음 소라기를 브라이싱크론 지갑에 집어넣었다.
이제 전장의 판세가 바뀔 것이다.
지금은 천당의 수호자들과 빛의 기사들이 언데드들을 압도하고 있지만, 오디나스가 언데드 강화 마법진을 강화하기 시작했으니 언데드들이 빛의 군대를 몰아붙일 것이었다.
천당의 수호자들이 배치된 북문, 동문, 서문은 버틸 것이다.
문제는 남문이었다.
원래 진행대로라면 남문은 빛의 기사들이 언데드들을 평범하게 압살하는 곳이었겠지만, 언데드들이 강해지면 남문은 가장 먼저 뚫릴 것이었다.
그래서 상원은 강상중을 남문으로 보냈다.
강상중의 <잠든 모노리스>는 이런 수성전에서는 그야말로 최강이었으니까.
'강상중... 그 정도로 눈치 빠른 인간이었을 줄이야.'
상원은 감탄했다.
<서울 육마귀>의 최강자였던 강상중은 잘 쳐줘 봐야 하급인 신령을 수호신으로 두고도 서울이라는 대도시를 주물렀던 괴물이었다.
그런 그의 진정한 무기는 날카로운 지략도 강인한 무력도 아니었다.
<카라온 방벽>에서 겪은 일이 누군가의 설계였음을, 그리고 그자가 만웅을 통해 자기를 지켜보고 있음을 간파하는 직관이 그의 무기였다.
그런 자를 상대로 싸워야 했다니.
'그래, 전에 강상중을 해치울 수 있었던 건 그야말로 천운이었구나.'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강상중이 알아서 상원의 눈치를 보는 덕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남문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좋다, 하나는 됐고."
상원이 눈을 감고 머릿속에 지도를 그렸다.
동문에는 활의 수호자 <할레온>, 서문에는 날개의 수호자 <오노메논>, 그리고 남문에는 강상중이 있으니 문제없었다.
문제는 북문이었다.
검의 수호자 <툴리오>는 평범한 수호자가 아니었으니까.
"문제가 있으면 거기로 가야지."
상원은 지상으로 통하는 문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마신의 달이 괴괴한 빛으로 지상을 비추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