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성지 수호전 (4)
"저승의 새라고 했다 오디나스."
"허? 하, 하하하하하!"
상원의 대답을 들은 오디나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 도대체 그게 뭔 줄 알고나 하는 소리냐?"
오디나스는 상원이 저승의 새를 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았다.
14번 시험까지 왔으면 그걸 아는 승천자가 몇몇쯤은 생기기 마련이니까.
오디나스가 놀란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상원이 저승의 새를 봐야 하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아주 잘 알지. <명룡(冥龍)>의 분신으로 변신하는 것. 대강령술사 오디나스의 비기 아니냐."
명룡은 마신 <연옥의 폭군>의 영토인 연옥의 하늘을 누비는, 온몸이 썩어가는 살점과 피고름으로 이루어진 괴물이었다.
호기롭게 그 이름을 입에 담았지만 그 존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상원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저승의 새>는 그 명룡으로 변신하는 스킬로 상원이 말한 것처럼 대강령술사 오디나스의 비기, 그러니까 오디나스의 최후의 기술이었다.
"흐! 그걸 알면서도 보고 싶다고? 네놈 따위가? 네가 제정신이냐 불신자?"
오디나스가 클클 웃었다.
대강령술사 오디나스의 비기라는 건 저승의 새가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었다.
1회차 때 오디나스가 저승의 새를 쓴 건 서른 번째 시험에서였다.
서른 번째 시험까지 다다랐던 수험자들마저도 저승의 새를 상대하며 수없이 죽어 나갔었다.
그런데 고작 열네 번째 시험에서 저승의 새를 보겠다고 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고작 열네 번째 시험을 전후해서 저승의 새를 상대로 맞서 싸우는 것, 솔직히 그게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두 번째 별을 얻으려면 반드시 이 타이밍에 저승의 새를 봐야만 했으니까.
머릿속에 첫 번째 별을 얻었던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일곱 번째 시험의 델타 루트에서 마신 <태초의 대족장>을 추방하는 것, 그게 첫 번째 별인 <네 번째 문의 봉인자>를 달성하는 조건이었다.
신화의 몸을 가진 상원마저도 죽었다 살아나고서야 첫 번째 별을 얻을 수 있었다.
그때 태초의 대족장을 마주하는 건 그야말로 미친 짓이었다.
두 번째 별을 얻는 과정도 그에 못지않게 어려웠다.
그래서 상원은 그걸 얻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꼼꼼히 따져서 최적의 작전을 짰고 그대로 수행했다.
서울역의 성화에 다섯 차원의 정수를 모두 넣었고 블라드가(家)의 흡혈귀들을 성지에 데려왔으며 <화산정의 혐오체>도 상원과 함께하고 있었다.
필요한 건 모두 충족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불안한 건 어찌할 수 없었다.
불신자가 아니라 투철한 신자였다 해도 이 상황에선 믿음이 흔들렸을 것이었다.
"후우."
상원은 큰 한숨을 쉬었다.
필요한 건 모두 준비했으니 이제 마음을 다잡는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
상원이 약간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덤덤한 대답에 오디나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크아아아악! 미쳤군, 미쳤어! 사부! 그 죽음을 건너와서 손을 잡은 게 고작 저런 미친놈이오?"
오디나스가 비젤 카스파에게 외쳤다.
'사부'라.
스승 얘기만 해도 경기를 일으키던 자가 용제를 사부라고 부르다니 정신이 단단히 나갔군.
"오디나스... 너는, 너의 술법에 정말 자신이 있나 보구나. 내 경고하지 않았느냐. 네 오만이 너를 망칠 거라고."
비젤 카스파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오디나스의 재능과 실력은 오만에 빠질 만한 수준이긴 했다.
승천 시험을 통틀어 저만한 재능을 가진 자는 <뮈노 메드냅>을 제외하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으니까.
정작 오디나스를 망친 건 오만이 아니라 그 스승에 대한 질투였지만.
"흥. 헛소리."
비젤의 대답에 오디나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상원이 여기서 저승의 새를 잡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다는 걸 오디나스가 알 턱이 없었다.
"혓바닥이 길구나 오디나스."
저벅저벅 오디나스에게 다가간 상원이 오디나스의 턱을 움켜쥐었다.
오디나스를 도발하기 위해서였다.
"왜, 스승님 앞에서 못난 술법을 보여드리기가 부끄럽나?"
상원은 오디나스의 발작 버튼인 '스승님'을 꾹 눌렀다.
오디나스의 창백한 이마에 굵은 핏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으아아아악! 불신자! 너 이 개새끼! 너! 크아아아악!"
오디나스가 침을 튀겨가며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아까의 그 여유 있고 위엄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1회차에서 30번 시험까지 갔을 때도 오디나스는 이렇게까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 좋아! 좋다! 이 빌어먹을 세상, 살아있는 존재라곤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생지옥으로 전락해버려도 상관없다! 필요 없어!"
오디나스가 절규했다.
비록 빛의 교단을 배신하고서 마신에게 자기 제국과 대륙을 통째로 갖다 바치고 대강령술사로 전락해버렸지만, 오디나스에겐 살아있는 자들의 제국을 이끌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상처받은 자존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그깟 제국쯤은 버려도 상관없었다.
수많은 제국의 신민들보다 자기의 자존심이 중요한 사람, 오디나스는 그런 자였다.
황통의 역사에서 전무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그런 마음씨를 가졌다는 건 카이네딘 제국이 맞은 최악의 불행이었다.
콰득!
오디나스가 왼손 새끼손가락 끝을 깨물자 시꺼먼 피가 끈적끈적 흘러나왔다.
"불신자! 네놈의 영혼은 한 조각도 남겨두지 않고 갈기갈기 찢어 먹어 버리겠다!"
오디나스가 자기 피로 땅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저승의 새>로 변하기 위한 의식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의 새하얀 민머리에서 시퍼런 혈관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아아."
한창훈의 몸을 빌린 용제 비젤 카스파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모든 게 자기 때문이라고, 조금만 더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당신 탓이 아니오."
"불신자...."
상원의 목소리에 비젤 카스파가 상원을 돌아보았다.
"당신도 알지 않소. 어차피 당신의 제자도, 제국도 그리고 마신의 강림도 시험의 일부, 결국은 이렇게 될 운명이었소."
"비통해. 비통하군."
그녀의 눈에 깊은 쓸쓸함이 아른거렸다.
"당신의 제자도 평범한 인간일 뿐이오. <검은 숲의 목자>같은 괴물도 넘어서지 못한 걸 당신의 제자가 넘어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시오. 그게 당신의 제자에 대한 예의일 거요."
상원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어서일까, 혜경의 타이즈가 로브 바깥으로 촉수 몇 가닥을 세우며 꾸물럭거렸다.
"은수가 죽은 것도... 시험의 일부였겠지."
비젤 카스파의 목소리에 창훈의 목소리가 겹쳐서 들렸다.
창훈으로서는 딸의 죽음과 아내의 실성, 그리고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자신의 처지 모두 시험의 일부이자 운명이라는 사실이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바람에 머릿결이 휘날리듯 창훈의 몸에서 보라색 불꽃이 길게 흩날렸다.
"여보."
창훈을 뒤에서 껴안은 혜경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흘렀다.
여느 부부들과 다를 게 없는 모습이라는 게 아주 낯익었고, 열네 번째 시험인데도 그런 모습이라는 게 너무도 낯설었다.
수 없는 사선을 넘기며 열네 번째 시험까지 온 수험자들은 인간성이라곤 잃어버린 사람들이 태반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으오오오오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오디나스가 지른 둔중한 소리가 동굴 안에 우렁우렁 울려 퍼졌다.
"저승의 새를 부르는 만다라입니다. 보기에는 하나의 주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여러 주문들을 순서대로 이어 놓은 연계 주문이죠. 우선은 설치해둔 <언데드 강화> 마법진이 강화될 겁니다. 이제 지상의 언데드들이 강해질 겁니다."
비젤 카스파가 빠져나가서 본래의 자아를 되찾은 창훈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상원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빛의 기사들도 수험자들도 수없이 죽어 나가겠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상원 씨는 항상 말씀하시는 게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 같단 말입니다."
"너무 많은 걸 보고 느끼긴 했습니다."
창훈의 말에 상원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저거 위험해 보이는데 끊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혜경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오, 저 주문은 반드시 완성돼야 합니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한 상원이 창훈과 혜경을 보았다.
"미안합니다. 사실 열네 번째 시험은 날로 먹는 시험인데.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돌아가게 만들었군요."
상원이 살짝 눈을 감고 말했다.
"아니에요. 저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다 상원 씨 덕분인걸요. 상원 씨가 아니었다면 진작 탈락했을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상원 씨를 도울 거니까, 미안하다느니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혜경이 상원의 팔을 잡고 말했다.
두터운 팔뚝을 감싸는 여린 손의 감촉이 보드라웠다.
"할머님도 이 정도는 해야 하늘 좋은 자리 잡는 거 아니냐고 하시네요."
창훈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감사합니다."
둘에게 꾸벅 인사한 상원이 고개를 돌려 오디나스를 보았다.
"그으으... 그으으으윽!"
눈코입에서 새까만 피를 뚝뚝 흘리며 괴이한 신음 소리를 내는 오디나스의 몸에서 근육 줄기가 촉수처럼 툭툭 튀어나왔다.
"으... 징그러."
혜경이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혜경씨가 <검은 양>으로 변했을 때는 더했어요'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우... 가르쳐 준 주문을 저딴 식으로 응용할 거라곤 할머님도 예상 못 했나 봅니다."
창훈이 입을 가리고 말했다.
"이제 올라갑시다. 우리도 시험을 치러서 신앙도 쌓고 코인도 모으고 해야죠."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른 속도로 지상으로 올라갔다.
"으아아아악!"
그들이 떠난 동굴 속에서 오디나스의 고함이 메아리쳤다.
* * *
그보다 조금 앞선 시각, 성지 다림델의 지상에서는 <성지 수호전>이 한창이었다.
다림델은 동서남북 방향에 맞게 배치된 커다란 정사각형의 성벽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사각형 각 변의 한가운데에 커다란 성문이 있는 구조였다.
그런데 <성지 수호전>이 선포되자마자 네 개의 성문이 모두 열려버렸고, 그곳으로 언데드들이 물밀듯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지금 다림델에 있는 수험자들은 한 명 한 명이 열세 개의 시험을 뚫고 여기에 도착한 강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열네 번째 시험의 패널티에 따라 언데드들은 강해졌고 수험자들은 약해졌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최하급 마물은 해골 병사들마저도 칼에 새까만 오오라를 두르고 있었고, 그에 반해 수험자들은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 수험자들을 대신해서 강신제와 함께 이 땅에 도래한 태양 기사와 다림델의 군대가 언데드들에 맞서고 있었다.
"흐읍!"
단단한 드워프제 단검을 쥔 만웅이 권능 <귀기를 담은 연장>을 뽑아냈지만 기대하던 검기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피식 하는 소리와 함께 보라색 연기가 허공에 흩어졌을 뿐이었다.
"하아."
만웅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 만웅아.
문득 들려온 소리에 만웅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토록 고대하던 형님, 상원의 목소리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