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96화 (96/230)

제96화. 성지 수호전 (3)

[<부서진 광야>의 마그마가 분출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들렸다.

대륙 하나를 통째로 찢어버렸던 무시무시한 힘의 일부가 이 말뚝 끝에 농축되어 있었다.

쾅!

말뚝이 보호막에 박히자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과 함께 투명한 보호막 표면에 새빨간 금이 갔고, 그 여파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동굴이 진동했다.

천장에서 돌덩이들이 투둑 떨어졌다.

상원은 금에 손을 집어넣고 비닐 천막이라도 뜯어내는 것처럼 보호막을 뜯어내자 부욱 하는 소리를 내며 보호막이 찢겨 나갔다.

"말도 안 돼.... 죽은 자의 주인의 보호막을... 이렇게 간단하게...."

오디나스가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신의 가호를 받는다고 너무 기고만장했구나. 고작 그 힘의 티끌이나 겨우 빌려다 쓰는 주제에."

상원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나르인들이 말하는 <죽은 자의 주인>이란 승천 시험을 떠받치는 다섯 마신 중 하나인 <연옥의 폭군>의 화신 중 하나였고, 대제사장 오디나스가 빌려 쓰는 힘은 그 화신의 힘 중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상원 또한 마신의 힘을 베껴다 쓰는 처지였지만 쓸 수 있는 힘의 총량은 상원이 압도적이었으니, 이런 보호막을 찢는 것 정도는 간단했다.

"이방인들 중에 이렇게 강한 놈이 있을 줄이야. 판단이 틀렸군."

가부좌를 풀고 일어서며 말하는 오디나스의 눈썹 끝이 꿈틀거렸다.

상원과 맞먹을 정도로 키 큰 대제사장의 눈동자가 상원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여기서... 나를 막는다고 의식을 멈출 순 없어. 이미 마신의 달이 떠 있다. 내가 없어도 공격은 계속될 거야."

"그쯤은 당연히 알고 있다."

오디나스의 말을 들은 상원이 내뱉었다.

대부분의 승천자들은 오디나스의 역할이 <강신제>를 주관해서 천당의 수호자들과 태양 기사들을 부르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마나 분화구>에서 솟아오르는 끝없는 마력을 바탕으로 <마신의 달>이 뜨게 하는 것, 그게 14번 시험에서 오디나스에게 안배된 역할이었다.

달이 뜨고 14번 시험이 선포된 이상 오디나스가 여기서 없어진다 해도 마신의 달이 지지는 않는다.

"니가 그냥 사념체에 불과하다는 것도, 리치가 된 네놈의 본체는 황성 지하에 잠들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

상원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

"큭큭큭큭, 그래 그래 많이도 알아서 좋겠구나. 그래서 뭘 어떻게 하려고?"

오디나스가 비열하게 웃으며 물었다.

"아직도 기고만장하구나. 내가 아는 것들을 좀 더 말해줘도 그 표정이 그대로일지 궁금한데?"

"뭐라고?"

상원의 말에 오디나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마신의 달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어. 마신의 달은 그냥 하늘에 떠 있는 장식품일 뿐, 이 땅에 마신의 부하들을 부르고 이세계의 신들을 추방한 건 니가 부린 대주술 아니냐."

"니가 그걸... 어떻게? 불신자, 너 도대체 정체가...."

상원의 말에 오디나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상원의 말대로 마신의 달은 수호신과 화신들이 시험에 몰입하기 위해 만든 연출일 뿐이었다.

사실 이 시험의 본질인 <언데드 강화>와 <수험자 약화>를 일으키는 건 대제사장이자 대강령술사인 오디나스가 여기 <마나 분화구>에서 방금 완성한 대주술이었다.

"그리고 또 뭘 말해줄까? 사실은 그 대주술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지. <언데드 강화> 그리고 <승천자 추방>. 아무리 마나 분화구에서 마력을 뽑아 먹는다고 해도 웬만한 대마법사들은 하나도 펼치기 힘든 걸 동시에 두 개나 그것도 본체도 아니고 사념체로 펼치다니, 실력 하나는 진짜구나."

피식 웃은 상원이 이어서 한 말 또한 사실이었다.

언데드 강화와 승천자 추방을 성지 전체를 모조리 덮을 정도의 규모로,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동시에 두 개나, 심지어 본체도 아니고 사념체로 펼친다는 건 오디나스가 주술사로서의 실력이 어마어마하다는 뜻이었다.

"닥쳐라 불신자!"

진심으로 한 칭찬이었지만 오디나스는 그 말을 비아냥으로 받아들였는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때였다.

"그래, 어마어마한 재능이야. 그래서 모두들 너를 두고 황가의 빛이요 희망이라 했었다. 황통을 이어받은 동시에 빛나는 재능을 타고난 니가, 대륙의 중흥을 이어갈 성군이 될 거라고 누구도 믿어 의심치 않았어."

한창훈이 찢어진 보호막 속으로 걸어 들어오며 회한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치고는 조금 높은 창훈의 목소리에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겹쳐서 들렸다.

<화산정의 혐오체>가 단단히 씌었는지 창훈의 온몸에서 보라색 오오라가 불길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승천자 추방> 주문은 타락신인 <화산정의 혐오체>까지는 추방하지 못했다.

"설마... 설마...."

오디나스의 동공이 미친 듯 떨리고 있었다.

일렁이는 불길이 희미하게 한 여자의 모습을 띠었다.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상원은 그녀가 누구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건 <화산정의 혐오체>가 이 땅에서 인간으로 환생했던 때, <용제>라는 묵직한 칭호로 칭송받기도 이전의 시절 젊은 날의 <비젤 카스파>였다.

"니가 갖지 못한 재능에 그렇게 번민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너를 좀 더 세심하게 살폈어야 되는데 그러질 못했어."

창훈, 아니 그의 몸을 빌린 비젤 카스파가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스카딘의 황통을 이어받은 황족이자 미스미엘의 대제사장이었던 오디나스 바스칸딘은 평생을 스승의 그림자에 짓눌린 채 열등감에 찌들어 살아왔다.

무수한 제국 시민들의 칭송을 받으며 성군이 될 수도 있었지만 결국은 대강령술사라는 모습으로 뒤틀려 버린 것도 그 열등감 때문이었다.

"허 참."

상원이 씁쓸한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재능이 특출나봐야 평범한 인간일 뿐, 환생한 승천자를 앞설 수는 없었다.

오디나스가 자기 스승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환생한 승천자라는 걸 깨달았다면 대강령술사가 되기 위해 대륙 전체를 마신에게 갖다 바치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상원은 동시에 평범한 금강족으로 태어나 두 정령왕을 한 몸에 받고 마신의 자리에까지 오른 대주술사 <뮈노 메드냅>이 얼마나 괴물 같은 존재인지를 다시 한번 되새겼다.

'어차피 승천 시험을 연출하기 위한 서사일 뿐인데. 참 쓸데없는 생각이군.'

고개를 저은 상원이 비젤과 오디나스를 바라보았다.

"흥!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신의 존재는 내 삶에서 아무것도 아니었어. 내가 <죽은 자의 주인>에게까지 닿았던 건 더 높은 이상을 추구하고 세계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였을 뿐, 단지 그뿐이다!"

오디나스가 발악하듯 외쳤다.

"그래, 그래.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씁쓸하게 웃은 비젤 카스파가 그녀의 유일한 제자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그녀의 눈에서 보라색 눈물이 또륵 흘렀다가 불꽃이 되어 사라졌다.

"크아아악! 꺼져! 오지 마! 내 삶에서... 내 삶에서 사라져!"

피를 토하듯 절규한 오디나스가 양팔을 좌우로 뻗자 천장까지 솟은 수정 기둥에서 새파란 마나가 뽑혀 나와 오디나스의 손끝에서 일렁거렸다.

<마나 분화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막대한 마나를 바탕으로, 주술을 유지하고 남은 마나를 끌어다 그의 본거지인 제도의 황성으로 돌아가는 차원 이동 주문을 쓰는 것이었다.

이어서 오디나스의 실루엣이 끝에서부터 파랗게 빛나는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꼴사나운 줄행랑이었지만 오디나스로서는 최적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오디나스에겐 불행하게도 상원은 오디나스가 황성으로 도망칠 예정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노트에 그렇게 쓰여 있었으니까.

"다음은 없어 오디나스."

이죽거리는 오디나스의 말에 상원이 차갑게 내뱉었다.

이 순간에 쓰기 위해 레벨 2를 찍은 스킬이 있었다.

웬만한 마물들에게는 쓰는 게 오히려 번거롭고 또 <태초의 대족장>같은 괴물들에게는 아예 먹히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껏 사용한 적이 없는 스킬이었다.

[<마력 삼키기>를 사용합니다.]

쩌적 소리와 함께 상원의 볼이 갈라지며 입이 쇄골에 닿을 정도로 벌어졌고, 그와 함께 상원의 목구멍에서 튀어나온 구슬이 오디나스의 마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화아아악!

오디나스의 눈과 입에서 시퍼런 마력이 흘러나와 상원의 입안에 담긴 구슬로 빨려 들어왔다.

"어... 어?"

순식간에 마력을 뺏겨버린 오디나스가 자기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았다.

"으윽! 제... 젠장!"

낭패라는 표정으로 말하는 오디나스의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오디나스의 마력을 남김없이 삼켜버린 구슬이 상원의 입속으로 쑥 들어갔고 괴물처럼 찢어졌던 상원의 볼이 다시 붙었다.

"그 얼굴이 더 창백해질 수도 있었군."

수정 기둥들을 향해 발을 옮기며 상원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오디나스를 내려다보았다.

돌바닥에 초라하게 주저앉아 자기를 올려다보고 있는 이 남자가 황실이 낳은 인재이자 대륙 전체를 마신에게 팔아넘기고 죽음의 사도가 된 바로 그 자였다.

승천 시험의 업적이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그렇기에 상원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곱 별의 왕관>을 얻어야 했다.

그래야 승천해서 승천 시험을 벗어날 수 있으니까.

그래야 이 미친 게임판을 뒤엎을 수 있으니까.

'그래, 이 정도면 흔들 만큼 흔들었다.'

오디나스를 보던 상원이 생각했다.

"화산정의 혐오체. 당신 기분은 잘 알겠습니다만 이 정도만 합시다. 이제 다음 계획을 실행해야죠."

상원의 말에 창훈이 쓸쓸한 얼굴로 상원을 돌아보았다.

"불신자... 그래, 꼭 그래야만 하나?"

"그럼요. 당신도 다시 저 하늘에 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원의 말에 창훈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래... 그래야겠지. 미안하다 제자야."

창훈이 가만히 오디나스의 정수리에 손을 올렸다.

"잘했다, 잘했어. 이 정도로 넓고 깊은 주술을 두 개나 부리다니. 내가 제자 하나는 참 잘 둔 것 같다. 그러니 이제... 그만 하자꾸나."

"뭐?"

오디나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였다.

비젤 카스파의 손에서 보라색 불꽃이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오디나스의 마력 분배를 조정해서 승천자 추방에 투입된 마력을 언데드 강화로 돌리는 것이었다.

창훈의 수호신 <화산정의 혐오체>가 오디나스의 주술과 마력 운용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상원이 굳이 용제의 세 유물을 모아 가며 <화산정의 혐오체>를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가 이것이었다.

"으... 으윽! 무슨 짓이냐! 이런 짓을 하면...."

"알아."

수험자들은 더 이상 14번 시험을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게 될 것이다.

수호자들과 태양 기사들의 힘은 그대로이지만 언데드들은 강해질 것이기 때문에 수험자들은 되찾은 힘으로 언데드들과 적극적으로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그러면 미스미엘의 사도들과 신자들, 그리고 수험자들도 상당한 피해를 입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덴 관심 없어."

상원이 차갑게 말했다.

"난 여기서 <저승의 새>를 봐야 하겠다."

"뭐... 뭐라고?"

오디나스가 얼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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