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성지 수호전 (2)
발걸음을 옮길수록 순도 높은 마나가 주는 압박감은 커졌다.
능력치가 월등하게 높은 상원마저도 압박감을 느낄 정도였으니, 창훈과 혜경은 오죽했을까.
"아... 젠장, 담배를 좀 더 일찍 끊었어야 했는데."
창훈은 발걸음을 옮기는 내내 헉헉댔고,
"에이 참, 이게 말을 안 듣네."
혜경은 피부에 들러붙은 타이즈가 마나에 반응해 촉수처럼 꾸물거리는 통에 애를 먹고 있었다.
발라딘이 따라오지 않은 것도 이해는 갔다.
마나와 관계없는 지구인들도 이 정도인데, 아나르 사람으로서 마나에 반응하는 신체를 타고난 발라딘은 이 정도 마나에 노출됐다간 그대로 가루가 되어버렸을 것이었다.
발걸음을 계속 옮기다 보니 발라딘이 열었던 것만큼 거대한 돌문이 나타났고, 짙은 파란색 로브를 입은 사람들 스무 명 정도가 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 앞으로는 백골과 병장기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발라딘이 그대로 가루가 되어버렸을 거라는 건 이 돌문을 지키는 사람들이 평범한 아나르인들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멈춰라."
그들 중 가운데 서 있던 자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시체처럼 창백한 손에 검은 손톱이 길게 돋아 있었다.
"무슨 일이냐."
"대제사장을 만나야 한다. 지금 당장."
남자의 말에 상원이 대답했다.
"대제사장께서는 의식 중에 있으셔서 지금은 만날 수 없다. 그런데 너희들은 누구지? 못 보던 얼굴인데."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겠지요. 처음 보는 얼굴일 건데."
싱긋 웃으며 대답하는 창훈의 손끝에서 보라색 불꽃이 타올랐다.
"침입자! 침입자다!"
남자의 외침에 다른 사람들이 후드를 벗으며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그들 모두 대제사장 오디나스처럼 시체같이 새하얀 얼굴 위에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하! 황실의 강령술사들이군. 이 끔찍한 것들을 여기까지 들여놓다니... 천벌이 있을 거다 오디나스."
창훈의 눈에 보라색 불꽃이 형형했다.
마나 밀도가 무시무시하게 높은 이 공간에서 창훈과 혜경이 멀쩡한 건 각자의 수호신 <화산정의 혐오체>와 <검은 숲의 목자>의 가호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반대편의 강령술사들이 멀쩡한 건 마신 <연옥의 폭군>의 가호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미 평범한 아나르인이 아니었다.
"이세계의 용사들이로구나. 위대한 계획의 들러리일 뿐인 것들이 명을 재촉하는군.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는지 궁금하지만 묻지는 않으마. 어차피 너희들은 여기 묻힌 해골들과 똑같은 신세가 될 테니까."
상원 일행에게 말을 걸었던 남자가 말했다.
말하는 투로 보아 그가 이 강령술사 무리를 이끄는 대장인 것 같았다.
강령술사 대장의 말에 다른 강령술사들이 양손에서 새파란 귀기를 뽑아냈다.
"으어어어어."
"그으으으윽."
그러자 땅바닥의 백골들과 병장기들이 뒤엉키더니 그럴싸한 해골 병사의 모습을 갖추고 상원 일행에게 비척거리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쥔 병장기에서 시퍼런 귀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죽은 자들의 주인께서 너희의 귀신들을 쫓아내서 네놈들의 힘이 형편없어진 걸 알고 있다. 네놈들은 이 해골 병사마저도 버거울 테지."
강령술사 대장이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대로 수험자들은 14번 시험의 패널티 때문에 해골 병사 하나도 제대로 상대하기 버거울 만큼 약해져 있었다.
심지어 저 해골들은 <마신의 달>의 버프로 인해 상당히 강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강령술사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으니, 바로 상대가 불신자 조상원이라는 것이었다.
"꽤나 그럴싸한 추론이다만, 상대를 잘못 골랐네."
상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해골 병사나 겨우 불러내는 주제에... 최하급 주문 가지고 유세는."
한창훈이 이죽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끝에서 타오르는 보라색 불꽃이 책 모양이 되어 책장이 사르르 넘어갔다.
"이눔 시끼들. 공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할미가 한번 보자."
척!
책이 닫힘과 동시에 해골 병사들이 뼛조각과 병장기로 분해되었다.
해골 소환 주문을 간단하게 해제해버린 것이었다.
그건 창훈에게는 너무도 손쉬운 일이었다.
아나르의 강령술을 집대성한 게 그의 수호신 <화산정의 혐오체>였으니까.
비장의 주문을 순식간에 파훼 당해버린 강령술사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말도 안 돼... 이 힘은... 용제? 어떻게 그럴 수가?"
강령술사 대장이 낯선 이방인에게서 대륙을 호령하던 영웅의 자취를 읽고서는 눈을 크게 떴다.
"끌끌끌, 너네들 잡아가려고 지옥에서 돌아왔다 이놈들아."
"자기 그 말투 할머니 같아서 싫다니까."
핀잔을 내뱉은 혜경이 로브를 내던지고 바람처럼 강령술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촥!
그녀의 타이즈에서 촉수들이 펜싱 칼처럼 뻗어나가 강령술사들의 몸을 순식간에 꿰뚫어버렸다.
혜경이 입은 타이즈는 마력을 불어넣으면 변형되는 물건으로, 애당초 거인화될 때 옷이 찢어질 걱정을 하지 말라는 취지에서 파이에벨의 중앙마나기관 총관리자 <에론 클라드>가 수험자 <샤믹 로드리게스>에게 준 것이었다.
그런 물건을 저런 식으로 살상 무기로 쓰다니, 검은 숲의 목자는 공격적인 쪽으로는 무섭도록 창의적이었다.
"그억...."
"크으으윽."
운 좋게 즉사를 면한 강령술사들이 피를 토하며 꿈틀거리는 사이 상원은 저벅저벅 돌문을 향해 나아갔다.
돌문의 구조는 아까와 같아서, 문이 갈라지는 부분의 사람 눈높이 즈음에 동그란 원판이 있었다.
여기에 마력을 불어넣으면 문이 열리는 구조였다.
먼저의 돌문은 마나를 가진 아나르인의 힘으로만 열 수 있었기에 발라딘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이 문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쯤까지 오면 평범한 아나르인들은 마나맥의 압력 때문에 가루가 돼버리는지라, 이 문은 그냥 마력을 넣으면 열리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마나맥을 감싼 시설의 마지막 문을 여는 방법: 1. 원판 가운데 손을 올린다. 2. 문의 오른쪽 위 부분으로 마력을 불어 넣는다....]
상원은 노트에 쓰여있던 대로 원판에 손을 넣고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진동과 굉음을 내며 문이 좌우로 열리기 시작했다.
"니가... 어떻게 그 문을... 너... 정체가...."
촉수에 배를 꿰뚫려 쓰러진 대장 강령술사가 꿈틀거리며 말했다.
"알 것 없다."
차갑게 내뱉은 상원은 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나는 차원 아나르의 고유의 에너지로서, 행성 중심에서 생성되었다가 화산처럼 지표로 터져 나와 대륙 에키나르타의 곳곳을 순환한다.
내핵에 고인 막대한 마나가 지각으로 터져 나오는 지점이자 대륙을 관통하는 거대한 마나맥이 시작되는 곳인 <마나 분화구>, 그곳이 상원의 코앞에 있었다.
* * *
그렇게 얼마를 걸어서 상원은 마침내 마나 분화구에 닿았다.
그곳은 드래곤 둥지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거대한 동굴 방이었는데, 천장과 벽 곳곳에 새파랗게 빛나는 크리스탈이 돋아 있어 방의 규모에 압도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 크리스탈이 모두 마나가 굳어서 생긴 결정이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웬만한 마천루만큼이나 거대한 수정 기둥 두 개가 솟아올라 있었고, 그 사이에 대제사장 오디나스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오랜만이다 오디나스!"
상원이 고함을 지르자 오디나스 곁에서 서성이던 강령술사들이 후드를 벗으며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다.
"죽은 자의 주인께서 함께하신다!"
강령술사들이 소리치며 주문을 외웠다.
"으그그극!"
마신의 힘을 담은 병장기로 무장한 해골 병사들이 땅바닥에서 솟아올라 상원에게 달려들었다.
이런 졸개들을 상대할 이유가 없었기에, 상원은 한 번에 방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강령술사들이 제아무리 마신의 힘을 부린다고 해도 상원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술력이 75나 되는 데다 심지어 마신의 힘마저 끌어다 쓰는 대주술사를 고작 14번 시험의 강령술사들이 무슨 재주로 상대한다는 말인가.
[강신회로에서 <태초의 대족장>의 힘을 불러옵니다.]
[<하늘불꽃 드론>을 사출합니다.]
상원은 천장을 향해 하늘불꽃 드론을 날려 보냈다.
이어서 상원의 왼팔에서 하늘의 정령왕의 힘을 담은 무시무시한 파란 빛이 뿜어져 나와 드론에 꽂혔다.
[<부서진 광야>의 번개 폭풍이 몰아칩니다.]
곧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섬광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드론이 쏟아낸 촘촘한 벼락 줄기였다.
"으윽! 상원 씨 귀띔이라도 해주지 이렇게 갑자기!"
"꺄악!"
창훈과 혜경이 눈을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
콰르르르릉!
이어서 동굴 벽이 무너지는 것 같은 굉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대재해의 일부분을 불러왔을 뿐이었지만 그 위용은 무시무시했다.
부서진 광야의 벼락 줄기는 강령술사와 해골 병사들을 말 그대로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와... 상원 씨 이렇게 셌어요?"
어안이 벙벙해서 말하는 창훈과 눈을 비비는 혜경을 뒤로 하고 상원은 저벅저벅 중앙의 수정 기둥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상원의 발걸음은 투명한 보호막에 닿아 멈췄다.
수정이 내뿜는 새파란 빛을 옅게 반사하는 투명한 보호막이 반구 형태로 수정 기둥을 감싸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오디나스의 새파란 두 눈동자가 상원을 쏘아보았다.
"다시 보니 반갑군. 대강령술사 오디나스."
상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세 번째 시험에서 <의령수>에 빙의했던 대강령술사 오디나스, 그가 바로 미스미엘 교단의 대제사장 오디나스 바스칸딘과 동일인이었다.
"너... 불신자로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몰라보겠는데."
오디나스가 상원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기억하는 상원의 모습은 회복실에 들어가기 전의 거구였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알 것 없다."
차갑게 대답한 상원이 보호막을 건드리자 딩 하는 소리와 함께 보호막이 울렸다.
"<죽은 자의 주인>께서 하사하신 보호막이다. 네깟 놈들은 흠집 하나 낼 수 없어."
오디나스가 상원을 보며 낄낄거렸다.
그의 말이 맞았다.
마신의 힘이 담긴 이 보호막은 주신급을 포함해 14번 시험에 다다른 수험자 중 누구도 뚫을 수 없다.
단, 그와 동격인 힘을 쓰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강신회로에서 <태초의 대족장>의 힘을 불러옵니다.]
[<열지의 말뚝>을 사출합니다.]
상원의 오른팔이 쪼개지면서 팔뚝만 한 말뚝이 튀어나왔다.
대지의 정령왕의 힘을 담은 말뚝은 지표에 갓 솟아난 마그마처럼 눈부시게 이글거렸다.
"너... 니가 어떻게... <쌍극 정령왕>의 힘을 쓸 수 있는 거냐."
오디나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궁금하겠지, 바스칸딘 황족의 마지막 후예여. 너는 그 힘을 얻기 위해 대륙 전체를 마신에게 통째로 갖다 바쳤는데, 나는 도대체 무엇을 바쳤길래 그 힘을 얻었는지."
미스미엘의 대제사장 오디나스 바스칸딘, 그는 이름처럼 바스칸딘의 황통을 이은 자였다.
그리고 용제 비젤 카스파가 성직자 출신으로 황제가 된 것과는 반대로, 오디나스는 황족 출신으로 미스미엘 교단을 통솔하는 대제사장의 자리에 올랐다.
"닥쳐! 뭘 안다고 떠드는 거냐."
오디나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주 많은 걸 알지."
상원은 피식 웃으며 보호막을 향해 말뚝을 내리꽂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