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94화 (94/230)

제94화. 성지 수호전 (1)

상원은 시스템 메시지를 살펴보았다.

[열네번째 시험 <성지 수호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신의 달>이 떴습니다. <마신의 달>이 떠 있는 동안은 밤이 계속되며, 언데드가 평소보다 강화됩니다. 반대로 수험자는 약해집니다.]

[<마신의 달>이 질 때까지 언데드들로부터 성지 <다림델>의 <마나 기둥>을 지켜야 합니다.]

[<마나 기둥>이 꺼지면 <에키나르타>의 항마진이 붕괴됩니다.]

[<천당의 수호자>들과 <태양 기사>들이 여러분을 돕습니다.]

[남은 시각: 23시간 59분]

14번 시험은 3번 시험과 비슷한 방어전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조력자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새까만 밤하늘 가운데 세 개의 달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밝은 파란색 달, 그 가운데 샛노란 달, 그리고 한가운데 유달리 빨간 달이 늘어선 모습은 정말로 지상을 샅샅이 훑는 마신의 눈 같았다.

"왜 마신의 달이라고 하는지 알겠네요. 달 세 개가 겹쳤다고... 저렇게 되다니."

정수가 중얼거렸다.

"압도적인 비쥬얼이지."

상원이 대답했다.

'마신의 달, 두 번째 보는 건데도 무시무시하군.'

상원은 숨을 푹 뱉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천체가 일렬로 늘어서는 것을 불길한 일로 여겼습니다. 수많은 예언들이 '별들이 일렬로 늘어선 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고 말했죠. 그런데 이건...."

문혁의 말을 들으며 상원은 승천계시록의 문장을 떠올렸다.

[이에 명부를 다스리는 이가 하늘에서 그 눈을 떠 땅을 내려다보니 온 땅의 초목이 숨을 죽이고 별들이 두려워하며 자취를 감추더라]

말마따나 그렇게 총총하던 하늘의 별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마신 <연옥의 폭군>이 승천자들의 힘을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승천자들의 상징인 별들이 흐려졌다는 건 그들이 화신에게 보내는 힘이 약해졌다는 뜻이었다.

그게 열네 번째 시험의 패널티였다.

"으... 갑자기 몸에 힘이 빠진 것 같아요."

정수가 양팔을 문지르며 말했다.

"<부월을 든 왕시해자>가 보내는 힘이 약해져서 그래. 이번 시험의 패널티야. 조심해라. 전처럼 날뛰다간 정말로 죽는다."

웃음기 없는 상원의 말에 정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정수뿐만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힘을 잃어버린 수험자들이 여기저기서 장탄식을 뱉었다.

상원은 하늘을 보았다.

광채를 잃어버린 별들과는 반대로 <사도자리>의 세 별을 비롯해 더 총총하게 빛나는 별들이 있었다.

이 땅에 강림한 사도의 별들이었다.

"이야아아아!"

파란 갑옷을 입은 별의 수호자 <툴리오>가 사람 몸뚱아리만 한 대검을 뽑아 들고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

"으아아아아!"

그러자 태양 기사들이 눈과 입에서 노오란 빛을 내뿜으며 함성에 화답했다.

수천 군세의 쩌렁쩌렁한 함성이 메아리치며 집회장 안을 가득 메웠다.

"오오."

짝짝짝짝

수험자 몇몇이 그 기세에 홀린 듯 일어서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어서 다른 수험자들도 일어서서 박수와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

멍하게 입을 벌린 정수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주륵 흘렀다.

"정수 말처럼 말 그대로 공연 한 편 본 기분이네요."

"네. 열네 번째 시험의 주인공은 수험자들이 아닙니다. 저 수호자들과 태양 기수들이죠. 우리는 그냥 관객일 뿐입니다."

상원이 문혁의 말에 대답했다.

오오오오오!

이어서 거대한 짐승이 상처 입고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다.

그 소리에 수천의 청중이 환호하던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시험 열세 개 치르면서 별의별 것을 다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무시무시한 건 처음이네요."

문혁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그때였다.

"지고한 빛 <네아>를 섬기는 자랑스런 천당의 수호자들과 미스미엘의 위대한 선조들이여! 그대들의 자손들이 덮쳐오는 어둠에 맞서 그대들을 모셨나니 그 끝없는 힘을 내어 고대의 성지를 악에서 지켜주소서!"

"하아!"

제사장의 외침에 세 수호자들과 수천의 태양 기사들이 짧은 구호로 화답했다.

검은 옷을 입은 자들도 신성한 주문을 외우면서 전투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수험자들은 그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이제 이 성스러운 군대가 수천수만의 언데드를 상대로 다림델을 지킬 것이다.

수천의 군세가 정면으로 격돌하는 장면은 승천 시험을 통틀어서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잠깐만, 아저씨. 그럼 우리가 할 일은 뭐에요? 저 수호자들 그리고 태양 기사들... 그리고 언데드들이 서로 싸우는 거 지켜보면 되는 거예요? 팝콘 뜯어 먹으면서?"

"맞다."

정수의 말에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 진짜요? 아, 그런 게 어딨어요. 시험이면 무슨 싸움박질을 해야지."

정수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돕는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그냥 구경하는 거군요."

문혁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상원은 그들의 심리를 이해했다.

승천 시험의 지상과제는 합격이지만, 합격한다고 끝이 아니다.

승천 시험 동안 수험자가 어떤 활약을 했느냐에 따라 수험자와 그 수호신의 격이 다시 정해진다.

그래서 격 높은 수호신을 가진 자들은 명성을 날리는 데 혈안이었다.

지금 여기 모여있는 수험자들은 각 성역을 대표하는 승천자들 중에서도 추리고 추려진 정예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단순히 구경꾼 역할을 하는 데 만족할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할 수 있는 게 없겠군요. 저 태양 기사들은 하나하나가 우리 못지않게 강해 보이는데, 우리들은 패널티 때문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는 상황 아닙니까."

"숨어서 목숨이나 챙겨야 되겠네요."

문혁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하자 정수가 찝찝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아니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상원이 슥 일어서자 정수와 문혁이 동그란 눈으로 상원을 올려다보았다.

"그게 무슨?"

"곧 아시게 될 겁니다. 문혁 씨, 진아 씨랑 태성 어르신을 모시고 서쪽 문으로 가십시오. 정수야, 너도 문혁이 형이랑 잘 붙어 있어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분들은?"

상원의 말에 문혁이 물었다.

문혁은 원강수와 박명희, 그리고 박준배가 죽은 걸 모르니 당연한 물음이었다.

"일단 세 분이면 됩니다."

간단하게 대답한 상원이 돌아섰다.

14번 시험은 구경만 하면 깰 수 있는, 속된 말로 다림델 군대에 버스만 얻어 타면 되는 굉장히 쉬운 시험이었다.

상원도 1회차 때는 팝콘 먹는 기분으로 두 군대의 격돌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는 두 번째 별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상원은 두 번째 별을 얻기 위해 밟아야 하는 절차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첫 번째 할 일은 수험자들에게 걸린 '패널티'를 없애는 일이었고, 그러려면 성지 다림델 지하에 있는 <마나 성소>에 가야 했다.

다림델 지하에는 수험자들이 지금까지 본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미궁이 있었지만, 당연히 상원의 머릿속엔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지름길이 펼쳐져 있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사이 상원은 다림델 지하 시설의 비밀 통로 속으로 몸을 넣었다.

곧 축축한 습기와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상원의 몸을 감쌌다.

* * *

좁은 통로들을 빠르게 지나치자 곧 상원의 눈앞에 거대한 돌문이 나타났다.

그 앞에는 낯익은 세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위에 의식은 잘 되고 있던가요?"

창훈이 물었다.

"예, 스케일이 대단하더군요."

"어우, 다림델은 스케일입니다. 말만 고대의 성지지 뭐 스케일 빼곤 볼 게 없어요."

창훈이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다.

원래부터 창훈의 말투엔 과장된 구석이 있었지만, <화산정의 혐오체>와 계약을 맺은 뒤로는 그런 면에 더 강해졌다.

'수험자가 수호신과 닮아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상원이 피식 웃었다.

창훈의 말투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상원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여보, 진짜 말하는 거 할머니 같애 소름 돋으니까 좀 어떻게 해 봐. 오랜만이에요 상원 씨."

로브 차림의 혜경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밝은 얼굴 이면에서 느껴지던 <검은 숲의 목자> 특유의 광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구려."

마지막은 흡혈귀 블라드 가문의 가주 발라딘 블라드였다.

"여길 다시 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소."

돌문을 올려다보며 말하는 발라딘의 눈에 회한이 섞여 있었다.

"이제 갑시다, 발라딘."

상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발라딘이 돌문 가운데 있는 동그란 원판에 손을 댔다.

그러자 보라색 기운이 원판에서부터 돌문 표면에 난 홈을 따라 퍼져나갔고, 이어서 쿠르릉 소리와 함께 돌문이 흙먼지를 내며 좌우로 갈라졌다.

"이 아래 있는 마나 성소는 미스미엘 교단... 아니, 에키나르타 대륙 문명의 근간이오. 에키나르타를 관통하는 거대한 마나맥이 시작되는 곳인 만큼 무지막지한 힘이 뻗어 나오고 있다오. 우리... 지금은 '고대인'이 되어버린 다림델 명가의 가주들은 저기에 모여 우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를 되새기곤 했다오. 그 맹세를 했던 가문들은 모조리 잊히고 이제 남은 건 세간이 흡혈 괴물이라 칭하는 블라드 가의 가주뿐이군."

발라딘의 목소리가 오래된 유물의 표면처럼 갈라졌다.

"이 일이 끝나면 사람들은 블라드 가를 세상을 구한 영웅으로 기억할 겁니다."

"우리 가문이 강령술을 연구하기 시작할 때도,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죽음을 넘어설 방도를 제시할 영웅으로 평가할 거라 기대했다오."

한창훈의 말에 발라딘이 씁쓸하게 웃었다.

"명성은 부질없는 거라고 하지만 오래 살다 보니 명성이 얼마나 무거운 건지를 알게 되는군. 정말, 너무 오래 살았어."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살아있는 거 자체가 얼마나 귀중한 건데."

발라딘이 말에 혜경이 대답을 마칠 때쯤 돌문이 완전히 열렸다.

돌문 건너편에도 똑같은 복도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느껴지는 감각은 차원이 달랐다.

다림델 지하의 마나맥에서 뻗어 나오는 힘이었다.

"고맙소. 그리고 난 여기까지요. 조금만 더 들어가면 난 저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가루가 돼버릴 거요. 그대들처럼 가호를 받는 자가 아니니까."

발라딘이 상원의 얼굴을 보았다.

"용사님, 계획대로 잘 되기를 바라오."

상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턱 하나를 넘었을 뿐인데 차원이 다른 압력이 느껴졌다.

"으윽, 맙소사. 찌릿찌릿한데요?"

혜경의 피부에 붙은 트롤 가죽 타이즈가 마력을 받아 살짝 꿈틀거렸다.

"어우... 꼭 가야 되는 거죠? 할머님도 별로 내키지 않으신 것 같은데."

"가셔야 합니다. 마나맥을 조절할 수 있는 건 <화산정의 혐오체>의 화신인 창훈씨밖에 없습니다."

창훈의 말에 대답한 상원이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떡하나, 새하늘 주인님. 14번 시험은 당신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 같은데.'

14번 시험을 난장판으로 만들 생각을 하며 상원은 피식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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