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고대의 성지 (3)
새까만 비수가 박힌 심장에서 꿀럭꿀럭 흘러나온 피가 새하얀 옷을 물들이고 흘러 제단 바닥에 고이기 시작했다.
수천 개의 심장에서 피싯피싯 피가 뿜어져 나오는 광경에 수험자들이 할 말을 잃은 채로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 광경을 바로보기 어려운지 담이 좋은 사람들마저도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 미친...."
모골이 송연해진 고개를 푹 숙이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강신제라는 거 인신 공양이었나."
반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하는 문혁의 태도는 비교적 침착했다.
"미스미엘교라는 거... 빛의 신인가 태양의 신인가를 섬기는 종교 아니었어요? 그런 종교가 이런 짓거리를 해요?"
정수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하지. 태양신 같은 신성한 빛을 섬겼던 수많은 종교가 인신 공양을 했다. 잉카에서도 그랬으니까. 이상할 건 없어."
문혁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번에 몸을 바치는 의식은 상상해본 적도 없군."
문혁은 비교종교학을 전공하면서 수많은 종교에 대해 조사했지만 이 정도로 규모의 인신공양제 같은 건 들어보지 못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버젓이 일어나는 건 여기가 이세계이기 때문인가, 문혁은 자문했다.
"아니다."
전 세계 인구의 9할이 하룻밤 만에 죽는 말도 안 되는 일도 겪었는데 사람 수천 명을 한 번에 신에게 바치는 게 뭐가 대수인가.
그리고 문혁은 문득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낯설어졌다.
"후우. 이거 진짜 사람 이상해지는군."
착잡한 마음에 한숨을 푹 쉰 문혁이 의식을 지켜보았다.
한동안 이어진 정적 속에서, 심장이 비수가 박혔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뛰면서 왈칵왈칵 피를 뱉어내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무엇보다 소름이 돋는 점은 흰옷 입은 사람들이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단순히 체념해서 저항하지 않은 수준이 아니었다.
"심장에 단도가 박히는데 반사적으로라도 꿈틀거리는 게 정상 아닌가?"
문혁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했다.
그동안 흰옷 입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도 색깔 옷 입은 사람들도 제사장도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뭐야... 뭔가 기다리는 건가?"
문혁이 말했다.
조금 뒤, 문혁은 그들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 알게 되었다.
바닥에 떨어진 피가 돌바닥에 난 미세한 홈을 따라 차오르면서 문양을 만들고 있었다.
거대한 원 안에 기하학적 문양들이 들어찬 문양, 그건 마법진이었다.
제단 위의 사람들은 흰옷 입은 사람들이 흘린 피가 마법진을 완성하는 걸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옷을 맞춰 입은 채로 인간의 피로 된 새빨간 마법진 안에 누워 종교적 문양을 만드는 모습은 괴기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게 진짜 신성한 빛을 섬기는 의식이에요? 무슨 마왕 강림 의식이라고 해도 믿겠는데요?"
"그러게."
정수의 말에 문혁이 대답했다.
"아센 오르돈."
그때 제사장이 외쳤다.
마치 <씹는 확성기>나 확성 주문이라도 쓴 것마냥 커다란 목소리였다.
"순결한 자식들의 칼로 타락한 자식들의 피를 바쳤나이다. 새로 난 가지의 잎이 오래된 가지의 마디를 잘랐나이다."
제사장이 말을 마치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후드를 벗었다.
그들은 모두 많이 잡아봐야 열다섯 살을 넘지 않을 것 같은 아이들이었다.
이어서 그들이 흰옷 입은 사람들의 후드를 벗겼다.
검은 옷 입은 사람들과는 달리, 흰옷은 백발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들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문혁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자기 친족을 찌른 거야?"
제사장의 모호한 말의 숨은 뜻을 읽은 문혁이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제사장의 말을 듣고 그런 생각을 한 게 문혁 만은 아니었는지, 수험자들 사이에서 당황에 찬 술렁거림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때였다.
"미스미엘을 굽어보는 위대한 사도들이여!"
제사장이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 외쳤다.
"이제 이 땅에 오소서."
팟
제사장의 눈에서 파란빛이 뻗어 나와 공중에 흩어졌다.
이어서 퉁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새하얀 빛줄기가 내려와 흰옷 입은 사람들의 몸뚱이에 박혔다.
퉁! 퉁!
한 줄기 두 줄기 떨어지던 빛줄기는 이내 폭우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빛줄기 하나하나가 흰옷 입은 사람들의 시체에 정확하게 꽂히고 있었다.
"와, 멋있다."
그 광경을 보며 감탄하는 정수의 얼굴엔 방금 전 대규모 인신 공양을 보면서 느꼈던 경악은 어느새 지워져 있었다.
정수뿐만이 아니었다.
"아... 세상에, 이토록 많은 별빛이라니. 아름다워요."
"대단한데. 이거 스케일 장난 아니다."
수많은 수험자들이 감탄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들도 정수처럼 방금 전의 경악은 잊어버린 듯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문혁은 그 광경을 감탄 어린 눈으로 볼 수 없었다.
대신 문혁은 그 광경에서 불길한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문혁은 미간을 찡그리고 골똘히 생각했다.
'이게 어디서 본 장면이었더라.'
한참을 고민하던 문혁은 엉뚱한 곳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특수 좀비?"
세 번째 시험에서 특수 좀비들이 나타날 때, 그때도 지금처럼 하늘에서 별빛이 내렸다.
"그럴 리가."
말도 안 되는 추측이라고 생각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맞습니다, 눈치가 좋으시군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문혁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찌 그 목소리를 잊을 수 있겠는가.
"하... 상원 씨."
문혁이 긴 한숨을 쉬고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상원의 커다란 손을 꽉 쥐었다.
"어... 아저씨?"
문혁의 말에 뒤를 돌아본 정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수는 상원의 바뀐 육체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수가 기억하는 상원의 모습은 일곱 번째 시험을 치를 때의 것이었다.
그때의 상원은 사람이라기보다는 괴수에 가까운 근육질의 거한이었다.
반면 지금 정수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새까만 장발에 피부가 새하얀, 선이 고운 미남이었다.
"오랜만이네 박정수."
상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에...? 뭐야, 표정이랑 말투는 완전 상원 아저씬데?"
정수가 의혹에 가득 찬 눈으로 문혁의 눈치를 보자 문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헐? 대박. 아저씨,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어디서 전신 성형이라도 했어요? 어디 가면 받을 수 있는 건데요?"
정수가 새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거 아니다."
상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지금의 박정수에게서는 상원이 1회차 때 보았던 <서울 육마귀> 중 하나로서의 광기에 찬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상원 씨... 저 빛, 진짜로 특수 좀비하고 관련이 있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하늘의 존재가 별빛을 타고 내려오는 것. 비슷한 일이죠."
상원의 대답을 들은 문혁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게... 단순히 모양새가 비슷하다는 차원의 문제는 아닐 것 아닙니까?"
"네, 예리하시네요."
상원이 제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차차 설명해 드릴 테니, 일단은 강신제를 지켜보시죠. 강신제는 승천 시험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장관 중 하나입니다."
상원이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흰옷 입은 사람들이 꿈틀거리며 일어서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 뭐야... 언데드?"
"아니. 저게 바로 미스미엘 교단의 병사인 <태양 기사>들이다."
상원이 정수의 말에 대답했다.
태양 기사는 죽은 신도들의 몸에 사도들의 혼이 강림해 만들어진 존재들이었다.
일반적인 언데드와 원리는 비슷했지만 태양 기사들은 성(聖)속성이라는 점에서 언데드와는 상극이었다.
"그러고 보니 보통 언데드랑은 모습이 많이 다르군요."
문혁의 말마따나 태양 기사들은 언데드들과 모양새가 달랐다.
그들의 강림한 육신의 쭈글쭈글하게 주름진 피부는 어느새 펴져 있었고 노란 광채가 흘렀다.
눈과 입에서도 노란빛이 새어 나와, 지상에 강림한 성령이라 해도 믿을 모양새였다.
그런 태양 기사 수천이 원을 그리고 늘어서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엄청난 위압감을 주었다.
"위대한 선조들을 뵙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태양 기사들을 향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제 천당의 문을 지키는 세 수문장을 부르나이다. 할레온, 오노메논, 툴리오. 성도들의 부르심을 받으사 이 땅에 오시어 태양의 군세를 이끄소서."
하늘을 향해 미스미엘의 세 수호자의 이름을 외친 제사장이 품에서 어른 팔뚝만큼이나 거대한 비수를 뽑아 들었다.
이어서 아주 신속하고 깔끔한 동작으로 곁에 서 있던 세 사람의 심장을 연이어 찔렀다.
그들은 태양 기수가 깃든 노인들과 달리 거대한 비수에 심장을 꿰뚫리고도 쓰러지지 않았다.
곧 사도자리의 세 별로부터 찬란한 빛줄기가 세 사람에게 꽂혔다.
그 별들의 이름도 할레온, 오노메논, 툴리오로 세 수문장의 이름에 대응되었다.
그러자 빛을 받은 세 사람의 몸이 하늘로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강신제의 하이라이트가 시작되는군.'
상원이 그 광경을 보며 생각했다.
곧이어 세 사람의 몸에서 눈 부신 빛이 폭사했다.
수험자들은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섬광에 눈을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제단 위에는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판금 갑옷을 입은 세 거인이 서 있었다.
천당의 세 수호자가 세 사람의 몸에 강림한 것이었다.
빨간 갑옷을 입은 자가 활의 수호자 <할레온>, 노란 갑옷이 날개의 수호자 <오노메논>, 파란 갑옷이 검의 수호자 <툴리오>였다.
지상에 강림한 세 수호자는 그 존재만으로도 강렬한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미스미엘의 후손, 아흔일곱 번째 제사장 오디나스 바스칸딘이 위대한 선조들과 수호자들을 뵙나이다."
제사장이 세 수호자들을 향해 차례로 고개를 숙였다.
"개쩌네요 이거. 무슨 공연 한 편 본 기분이에요."
어안이 벙벙해진 정수의 말에 상원은 피식 웃으며 옛날을 회상했다.
상원도 1회차에 강신제를 처음 보았을 때 이렇게 생각했었다.
그때였다.
오오오오오!
아주 먼 곳에서 상처 입은 거대한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성스러운 아우라로 가득 찬 제단의 분위기와는 극적으로 대조되는 불길한 소리였다.
그 소리 하나에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낀 수험자들이 잔뜩 몸을 움츠렸다.
"아직 안 끝났다."
상원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헛...!"
"으윽!"
상원을 따라 하늘을 본 문혁과 정수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달 때문이었다.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세 달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괴물의 눈이었다.
"제사장이 말했던 <마신의 달>이란 게... 저겁니까?"
"네."
상원이 대답을 하자마자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열네 번째 시험 <성지 수호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