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고대의 성지 (2)
정수는 옷을 갖춰 입고 숙소 밖으로 나왔다.
숙소 밖으로 나와 보니, 정수는 여관 주인이 자기만 부른 게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숙소 주인뿐만 아니라 다림델의 시민들 모두가 도시 구석구석까지 돌아다니며 수험자들을 부르고 있었다.
"용사님, 잠시만 밖으로 나와 보시겠어요? 이제 용사님이 하실 일이 생겼습니다."
"용사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수험자들이 안내를 받고 큰길로 모였다.
그러자 닷새 내내 한산하게만 보였던 도시가 어느새 북적거렸다.
"많기도 많구나."
정수가 꽉 찬 도로를 보며 말했다.
이 정도로 많은 수험자들이 모이는 일은 지구에서도 별로 없었다.
"오랜만이네, SSS급 액스마스터."
차분하고 단단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키가 껑충한 남자가 얇게 웃고 있었다.
호리호리하지만 단단한 체구에 짧은 머리, 그리고 새까만 뿔테 안경.
박정수가 익히 아는 사람, 그는 바로 성역 <서울역>의 지휘자 백문혁이었다.
"형! 완전 오랜만이에요. 형도 아나르에 오셨었군요?"
박정수가 백문혁과 친한 건 정수가 속한 성역 이태원이 서울역과 동맹을 맺고 문혁의 지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열 번째 시험 때 보고 처음 보는구나. 그동안 잘 지냈니?"
"그럼요! 여기 마물들 완전 X밥이던데요?"
과장 섞인 정수의 말에 문혁이 푸근한 웃음을 지었다.
평소와 같은 웃음이었지만, 정수는 문혁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정수도 강하니까 잘 부탁할게."
문혁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정수는 문혁의 손을 잡았다.
"헛."
정수는 문혁의 손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자기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잘못 느낀 것이 아니었다.
문혁은 서울에서 보았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해져 있었다.
서울에서 보았을 때만 해도 정수가 보았던 수험자들 중 가장 강한 축에 속했는데, 지금은 도대체 어떤 괴물이 되었단 말인가.
그때였다.
발끝까지 내려오는 하얀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사람들 사이사이로 돌아다니며 외치기 시작했다.
사제복을 입은 미스미엘 교단의 사제들이었다.
"이제 의식이 시작됩니다! 다들 <미스미엘 중앙 신전>으로 가시겠습니다."
"천천히 질서 있게 이동해주세요."
수험자들이 사제들을 따라 다림델 중앙의 마나 기둥을 둘러싼 거대한 신전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의식?"
정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부월을 든 왕시해자>가 말해주지 않았나 보구나. 저쪽을 보렴."
문혁이 마나 기둥 쪽을 가리켰다.
하늘로 솟아오르는 마나 기둥이 끝나는 곳쯤에 별 세 개가 떠 있었다.
빨강, 노랑, 파랑색으로 빛나는 세 별은 다른 별들보다 유달리 크고 밝아서 금세 눈에 띄었다.
"저건?"
"미스미엘 교단의 사도들을 상징하는 <사도자리>야. 미스미엘 교도들은 죽어서 하늘에 올라간 사도들이 별이 되어 교단을 지켜준다고 믿지. 지금 있는 의식은 그 사도들이 이 땅에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강신제>라고 한단다."
"강신제라면 진짜로 그 사도들이 살아서 돌아오기라도 하는 건가요?"
"글쎄,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문혁이 커다란 손으로 정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나저나 형은 어떻게 이런 걸 다 아는 거예요?"
"구릉... 그러니까, 내가 전이됐던 곳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만난 사람들한테 들었어. 아나르 대륙에도 신화가 많더라고. 재밌게 들었어. 진아 씨는 싫어했지만."
웃으며 말하면서, 문혁은 에키나르타 대륙 남부 <요이르오름 구릉>에서 다림델까지 왔던 여정을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과 진아를 구릉으로 보냈던 성역 서울역의 명실상부한 지도자 조상원도.
열한 번째 시험이 시작될 때, 상원은 다섯 개의 시험을 같이 치를 열 명을 선발했다.
'만웅이 형이랑 준배, 강수 아저씨, 명희 아줌마... 다 잘 있으려나. 그러고 보니까 여기 와서 만난 사람이 없네. 상원 씨도 벌써 도착했어야 할 텐데.'
"진아 누나랑 같이 오신 거예요?"
정수의 물음에 문혁의 생각이 끊어졌다.
"응. 이따 신전에 가면 만날 수 있지 싶네. 가자."
문혁과 정수는 인파를 따라 이동했다.
마나 기둥을 둘러싼 콜로세움처럼 생긴 거대한 신전이 사람들을 삼키고 있었다.
* * *
문혁과 정수는 중앙 신전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콜로세움처럼 생긴 지상 부분도 정수가 그만큼 큰 건축물은 처음 본다고 느낄 정도로 충분히 거대했지만, 지하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넓고 거대했다.
계단을 몇 번 내려가니 거인이라도 다녔을 만큼 넓고 높은 복도가 나타났는데, 은은한 조명이 복도를 비추고 있어 시야에 막힘이 없었다.
"놀랍군. 기술 수준이나 사람 사는 방식은 딱 서양 중센데 이런 건축물을 짓다니."
문혁이 복도를 둘러보며 말했다.
"고대인들의 기술이라잖아요."
정수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게 왜?"
"보통 판타지에서는 고대인들이 그랬다 그러면 한 방에 해결되거든요."
정수의 말에 피식 웃은 문혁이 걸음을 옮겼다.
문혁과 정수를 비롯한 수많은 수험자들이 사제들의 안내에 따라 복도를 걸었다.
그 끝에 도착한 곳은 마치 야구장처럼 계단식 좌석이 쭉 늘어선 거대한 집회장이었다.
축구장만큼이나 넓어 보이는 평평한 돌바닥을 둘러싼 돌계단으로는 수천 명도 더 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집회장의 규모보다도 놀라운 것은 천장이었다.
분명히 지하에 있는 시설이었는데도, 천장으로는 세 개의 달과 거대한 성운이 그림자를 드리운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수천명의 수험자들이 사제들의 안내에 따라 돌계단에 앉았다.
"여기... 마나 기둥이 솟아오르는 곳이군."
문혁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요?"
"저기를 봐라."
문혁이 하늘을 가리켰다.
과연 땅바닥으로부터 3~4미터쯤 되는 곳에서부터 마나 기둥에 하늘로 뻗어 올라가는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대단한데."
"고대인의 기술력은 우주 제일이에요."
문혁과 정수도 다른 수험자들처럼 자리를 잡았다.
"그나저나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도시에 있었던 건가. 하기사 성벽 규모를 생각해 보면 이상한 것도 아니지."
문혁이 관중석을 둘러보며 말했다.
구면인 사람들도 있는 건지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수험자들이 눈에 띄었다.
"진아 누나는요?"
"그러게, 정신없이 움직이는 통에 연락을 하지도 못했다. 지금 여기 다림델 수험자들이 다 모여있는 것 같은데 이 중에 있지 않을까. 어차피 다음 시험 안내받으려면 여기 와야 하기도하고."
"네?"
정수가 문혁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수호신인 <반월을 든 왕시해자>로부터 열네 번째 시험 얘기는 일언반구도 듣지 못했으니 당연했다.
"아까 얘기하려고 했던 게 그건데. 수험자들 대부분이 수호신한테 안내를 받았을 거야. 이제 중앙 신전에서 열네 번째 시험의 선포가 있을 테니 의식에 참여해야 한다고."
"아니 그럼 이 양반은 왜...?"
문혁의 말에 정수가 벙진 표정을 지었다.
이 양반이란 물론 수호신인 <부월을 든 왕시해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건 니 수호신이 격이 낮기 때문일 거야. 여기 있는 수험자들은 각 성역을 대표해서 온 사람들인데다가, 아나르에서 시험 세 개를 거쳐서 살아남았으니 대부분은 신령급이라고 봐야지. 내 수호신은 영령급이긴 하지만 워낙 정보에 빠삭한 사람이기도 하고."
문혁이 정수의 어깨를 도닥였다.
"후우. 우리 아저씨는 쌈박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하는데... 잘 하는 게 쌈박질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게 처음엔 참 좋았는데, 시험을 보면 볼수록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아요."
정수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우리 정수가 생각이 참 깊어졌구나. 그래, 니 말이 맞아. 하지만 <부월을 든 왕시해자>가 그렇게 좋지 않은 수호신인 것만도 아니야."
"맞아요. 제가 여기까지 온 것도 절반, 아니 99%는 우리 아저씨 덕이죠."
문혁은 정수의 말을 들으며 짧은 시간에 많이 성장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 누구도 지금의 박정수를 보면서 중2병에 안하무인인 를 떠올리진 못할 것이다.
그때였다.
"이세인-라!"
단 한 마디였다.
한 남자의 외침에 수천 군중의 술렁임이 멎었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소리가 난 쪽을 보았다.
돌바닥 한가운데 새파란 로브를 쓴 사람이 서 있었다.
로브 차림이었는데도 굵은 어깨선이 돋보였다.
"와... 상원이 형 이후로 저렇게 큰 사람은 처음이에요."
정수가 말했다.
이어서 그 사람이 후드를 벗었다.
단단한 인상의 남자였는데 얼굴엔 머리카락은 물론 눈썹마저 한 올도 없었고, 시체처럼 새하얀 피부 위로는 새빨간 문신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었다.
그가 눈을 뜨자 눈동자에 사파이어를 박은 것마냥 짙푸른 안광이 뻗어 나왔다.
"저 사람이구나."
"누군데요?"
"미스미엘 교단의 대제사장, <오디나스 바스칸딘>."
저 사람으로부터 열네 번째 시험이 시작될 거란 사실을, 문혁은 수호신 <해안선의 귀신>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야벤-일!"
"이제 강신제가 시작된다."
오디나스의 외침에 이어 문혁이 살짝 말했다.
그러자 수천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줄지어 제단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절반 정도는 얼굴까지 가리는 흰옷을, 나머지 절반도 얼굴까지 가리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 다른 옷을 입은 사람이 셋 있었는데, 그 색은 빨강 노랑 파랑으로 사도자리의 세 별과 같았다.
사람 수가 많은 만큼 제단 위에 사람들이 자리를 잡는 데 꽤 긴 시간이 걸렸는데, 그 시간 동안 수험자들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사람들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와."
마침내 도열이 끝났을 때, 정수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넓은 원을 그렸고, 그 안으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제사장 쪽으로 머리를 두고 누워 좁은 원을 그렸다.
그 안에서 색이 다른 옷을 입은 세 사람이 대제사장 주변에 누웠는데, <사도자리>의 모습처럼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정삼각형을 그리고 있었다.
잠깐의 적막이 이후, 오디나스가 우렁우렁한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안녕하시오 용사 여러분, 나는 미스미엘의 대제사장 <오디나스 바스칸딘>이오. 내가 여러분들을 이 먼 땅으로 불렀소. 이 땅의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선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오. <마신의 달>이 뜨면 사자의 군대가 <항마진>의 중심인 이곳 다림델을 함락하러 올 거요. 우리만으론 그들을 막을 수 없기에,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했소. 도와줘서 가슴 깊이 감사드리오."
오디나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마신의 달이 뭐지요?"
"글쎄."
정수의 물음에 문혁이 생각에 골몰한 표정을 지었다.
아나르에 건너와서 얻은 수많은 정보들 중 <마신의 달>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우리 에키나르타의 사람들도, 생존을 위한 투쟁을 먼 땅의 용사분들에게만 맡길 생각은 없소. 여러분들의 수호신들이 여러분들을 하늘에서 지켜보시는 것처럼, 우리 미스미엘 교단의 사도와 수호성인들도 별이 되어 이 땅을 내려다보고 계신다오. 이제, 우리의 혼을 바쳐 그분들을 모시는 의식을 시작하겠소."
말을 마친 오디나스가 다시 후드를 썼다.
잠시 쥐 죽은 듯한 정적이 거대한 제단을 덮쳤다.
"시엘."
오디나스의 외침이 정적을 찢고, 그와 함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품에서 새까만 단검을 뽑아 들었다.
예리한 칼날이 별빛을 받아 빛났다.
"뭐야?"
"서... 설마...?"
수천의 수험자들이 불신에 찬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그 직후 설마 했던 그 일이 일어났다.
"다른."
오디나스의 나직한 말과 함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흰옷 입은 사람들의 심장에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단검을 박았다.
푹!
수천 개의 날카로운 금속이 수천 개의 살점에 박히는 소리가 널따란 집회장에 울려 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