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91화 (91/230)

제91화. 고대의 성지 (1)

상원은 상태창을 보며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14번 시험을 앞두고 <마나 삼키기>가 복구됐기 때문이었다.

상원이 회귀할 때 <기계장치의 신>에게 받은 육체인 신화의 몸엔 수많은 기능이 탑재돼 있었는데, 복사한 스킬을 저장하는 <스킬 메모리>도 그중 하나였다.

본래 스킬 메모리엔 상원이 일곱 개의 시험을 거치면서 복사했던 수많은 스킬들이 들어 있었는데, <태초의 대족장>을 대면했을 때 스킬 메모리가 손상돼버리는 바람에 거의 모든 스킬들을 쓸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 통에 두 번째 별 공략에 유용한 마나 삼키기도 쓸 수 없게 되어서, 상원은 마나 삼키기 없이 두 번째 별을 얻을 계획을 세웠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 순간에 마나 삼키기가 복구된 것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쉽게 갈 수 있겠어.'

상원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상태창 보는 거 오랜만인데 좀 더 들여다볼까.'

상원은 상태창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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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체 관리 시스템]

접근이 허가된 정보만 표시됩니다.

레벨 9 (11%)

성능: 괴력 40, 용력 40, 술력 75

스킬: 요새 수호자의 시선(3), 하늘의 불씨(2), 지하의 문(2), 동굴적 감각, 마나 삼키기(2) (복구 중)

모래시계 충전 시간: 1분 12초

강신회로: 태초의 대족장

달성 업적: 네번째 문의 봉인자

일곱 별의 왕관 진척도: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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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지 않네.'

상원이 미간을 찡그렸다.

태초의 대족장과 맞서는 동안 신화의 몸이 심하게 망가져서, 탑재된 기능 대부분이 정상 작동하지 않았다.

<스킬 복사기>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고 <스킬 메모리>에서 복구된 스킬은 마나 삼키기 하나뿐이었으며, 회귀 도구인 <황금시대의 모래시계>의 충전율은 여전히 달팽이 걸음이라 일곱 번째 시험 이후 고작 10초가 충전되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레벨업 이후 새로 알게 된 사실이 있었으니, 이전과는 달리 레벨업으로 얻은 능력치가 15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레벨업 시스템이 망가져서 그런 것 같았다.

"쯧."

상원이 혀를 쳤다.

<일곱 별의 왕관>을 얻는 여정은 신화의 몸이라는 사기적인 육체를 가진 상원에게도 버거웠다.

스탯 하나하나가 아쉬운 판이었는데 레벨업으로 얻는 능력치가 5나 줄어들었다는 건 뼈아픈 일이었다.

'이런 걸 아까워할 시간이 없다.'

상원은 한숨을 쉬고 마음을 다잡았다.

능력치 5를 아까워하기엔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주어진 조건에서 최대의 가능성을 찾아 나가는 것, 그게 상원이 매진해야 할 일이었다.

'상황이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상원은 두 번째 별에 닿기 위해 얻어야 하는 것들과 거쳐야 하는 일들, 그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냉철하게 되짚어보았다.

대부분의 능력치를 잃어버렸지만 <태초의 대족장>이라는 강력한 마신의 힘을 얻었다.

<스킬 메모리>가 재생되면서 적절한 타이밍에 <마나 삼키기>가 복구되었다.

나머지 수많은 난관들은 상원의 지식과 경험으로 헤쳐나갈 수 있었다.

"좋아. 그나저나 이제 다음 차례인가."

상원은 남쪽의 먼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북극광 너머로 별들이 빛나고 있었는데, 그중 유독 눈에 들어오는 별자리가 있었다.

각각 적색과 금색, 그리고 청색을 띤 별 세 개가 삼각형을 이루는 별자리, 그게 바로 미스미엘 교단이 신성하게 여기는 <사도자리>였다.

"사도자리가 빛나기 시작했군."

하늘을 바라보며 말하는 발라딘의 표정이 심각했다.

"안 좋은 징조인가요?"

"좋지 않소. 저 별들이 뜬다는 건 곧 큰 전쟁이 시작될 거란 얘기거든."

발라딘이 샤믹의 말에 대답했다.

"성자 미스미엘과 그의 세 사도는 천당에 가서까지도 교단을 수호하기로 맹세했다오. 그래서 교단에 큰 위기가 닥칠 때면 사도들이 돌아와 힘을 빌려준다고 하지. 저 별자리는 그 세 사도를 상징하는 별자리요."

"예전 같았으면 그냥 전설이겠거니 하겠지만, 하늘에 계신 분들이랑 게임을 하는 상황을 겪고 보니 그냥 전설인 것 같지는 않네요."

발라딘의 말에 한창훈이 너스레를 떨었다.

"발라딘의 말이 맞습니다."

모두가 상원을 쳐다보았다.

"사도자리는 열네 번째 시험의 시작을 선포하는 별자리입니다. 이제 닷새 뒤면 열네 번째 시험이 선포될 겁니다. 우리는 그 전에 다림델에 닿아야 합니다."

사실 14번 시험이 시작될 때 다림델에 있지 않더라도 시험을 치르는 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상원의 일은 그냥 시험을 치르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었다.

'두 번째 별에 닿아야 한다.'

두 번째 별에 닿으려면 14번 시험이 시작되기 전에 성지 다림델에 도착해야 했다.

물론 그런 세세한 사항을 일행들에게 가르쳐 줄 이유는 없었다.

그저 14번 시험이 시작되기 전에 다림델에 도착해야 한다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상원은 머릿속으로 에키나르타 대륙의 지도를 떠올려 보았다.

지금 일행들이 있는 곳은 대륙의 최북단 빙하지대였고 다림델은 <카라온 방벽>보다 남쪽, 대륙 중부 대평원의 한가운데 있었다.

카라온 방벽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사흘이 조금 넘게 걸렸으니, 최대한 서둘러 움직인다면 알맞은 타이밍에 다림델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혜경의 상태를 살펴보니 생명에 지장은 없었지만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상원의 말에 발라딘의 얼굴이 굳었다.

"성지까지 닷새요?"

발라딘의 물음에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올 때처럼 용사님과 샤믹, 저만 움직이는 거라면 가능하겠지만, 여기 용제의 사도님이 탈 말도 없고 여자분은 정신을 잃은 상태인데."

"가능합니다."

상원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샤믹, 혜경 씨를 업으세요. 창훈 씨가 업는 걸 도와주시고."

상원의 말에 샤믹이 혜경을 업고, 창훈이 그녀들의 상체를 끈으로 묶었다.

그 사이 상원은 <하늘불꽃 드론>을 꺼내 왼쪽 손등에 고정했다.

"그리고 창훈씨, '타조'를 불러낼 수 있겠죠?"

"타조요? 아, 아... 네. 그럼요."

상원의 말에 벙진 표정을 지은 창훈이 이내 상원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하하 웃으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땅바닥에 보라색으로 빛나는 마법진이 생겼고, 이어서 마법진 가운데서 새까만 용암질로 이루어진 동물의 뼈다귀가 나타났다.

"꾸르륵?"

소환물이 꾸륵거리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소개 드립니다 여러분. 할머님의 작품 <화산 공포새>입니다."

창훈이 웃으며 공포새의 등에 올라탔다.

"공포새요? 그냥... 타존데요?"

샤믹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는데, 당연한 반응이었다.

일반인이라면 공포새에게 형언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겠지만, 열세 개의 시험을 거치고 심지어 수백 마리 <살덩이 골렘>에게서도 살아남은 샤믹이 고작 그런 공포새에게 공포감을 느낄 리는 없었다.

"에잉, 할머님이 기분 나빠하시는데...."

"얼른 갑시다. 시간이 없습니다."

창훈의 너스레를 일축한 상원이 드론을 작동하자 프로펠러가 위잉 작동하기 시작했고 곧 상원의 몸이 바닥에서 떠올랐다.

"성지까지 닷새입니다. 발라딘, 안내를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늑대로 변신한 발라딘이 빙하 사이의 좁은 크레바스로 몸을 던졌다.

상원과 샤믹, 그리고 화산 공포새를 탄 창훈이 그 뒤를 따랐다.

* * *

며칠 뒤 밤, 대륙 중부 성지 다림델.

박정수는 숙소의 침대에 누워 천장의 얼룩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심하네."

딱히 할 일도 없이 숙소에 누워 있으려니 온몸에 좀이 쑤시는 느낌이었다.

정수는 지난 시간을 곱씹어 보았다.

시험을 치르기 위해 이세계 아나르로 넘어온 내로라는 수험자들, 그중에는 성역 이태원을 근거로 활동했던 박정수도 있었다.

상원의 1회차 때 <서울 육마귀>로 거듭났던 이 중2병 수험자의 삶은 상원과 문혁을 비롯한 서울역의 수험자를 만나며 바뀌었다.

그는 더 이상 수하인 <흑혈 기사단>을 자기 마음대로 부리는 폭군이 아니었다.

어쨌든 12번 시험까지 무사히 마친 박정수는 13번 시험을 치르기 위해 다른 수험자들과 함께 성지 다림델로 향했다.

남쪽에서부터 다림델로 향한 박정수는 곧 지평선이 저 끝까지 펼쳐진 너른 평원에 다다랐다.

"세상에 그렇게 넓은 평야가 있다니."

박정수는 평야의 웅장함을 생각하며 몸서리를 쳤다.

사방을 둘러봐도 간간이 나무가 눈에 띌 뿐 어떤 지물도 보이지 않았기에 섣불리 들어섰다간 목적지를 잃어버리고 조난당하기 십상인 곳이었지만, 정수를 비롯한 수험자들은 무리 없어 성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성역에서 솟아오르는 성화의 불기둥처럼 선명한 빛줄기가 평원 저 멀리서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어떤 안내도 없었지만 수험자들은 그 빛줄기가 있는 곳이 성지 다림델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고, 며칠에 걸쳐 평원을 건너 빛줄기를 향해 이동한 끝에 마침내 성지에 다다랐다.

성지는 턱없이 높고 튼튼해 보이는 성벽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수험자들은 성벽 한쪽에 난 웅장한 성문을 통해 다림델에 들어설 수 있었다.

수험자들이 아주 멀리서도 볼 수 있었던 빛줄기는 도시 정중앙에 자리 잡은 마나 기둥이었다.

"서울역의 성화도 그 정도는 아니었어."

다림델의 성화는 상원이 최선을 다해서 강화시켰던 서울역의 성화보다도 월등히 거대하고 선명했다.

성화의 둘레로는 정수가 살면서 보았던 어떤 건물보다도 웅장한 신전이 서 있었는데, 바로 미스미엘 교단의 중앙 신전이었다.

중앙 신전의 주변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사는 도시가 펼쳐져 있었고 이들 중 대부분, 그러니까 성지 다림델의 시민 중 대부분이 미스미엘의 성직자들이었다.

성지의 시민들은 지구에서 온 수험자들을 따뜻하게 대해주면서 숙소와 식료품을 아낌없이 제공했다.

시험이 시작된 이후 어디서도 받아보지 못한 환대에 수험자들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성지에 비교적 일찍 도착했던 정수는 마음껏 먹고 푹 쉬면서 다른 수험자들이 속속 도착하는 걸 바라보았다.

그렇게 13번 시험이 종료됐다.

그 뒤로 며칠이 흐르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성지 주변에는 때려잡을 마물도, 뛰어들 던전도 없었고, 어쩐 일인지 밤이 되어도 성지 주변으로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나 괜찮았지."

무료했다.

지금껏 수많은 사선을 건너오면서 그토록 평화를 바라 왔는데, 막상 평화가 찾아오니 그 시간을 어떻게 누려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느낀 게 정수만은 아닌 모양인지, 13번 시험이 끝나고 사흘째가 되자 도시 곳곳에서 작은 충돌이 일어났다.

수험자들끼리 다투기도 했고, 수험자가 시민에게 시비를 걸기도 했다.

그럴 때면 시민들은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며 조용히 수험자들을 제지했다.

그러기를 닷새째, 이제 더 이상은 그냥 있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 정수의 방문을 두드렸다.

"박정수 용사님, 안에 계신가요?"

숙소 주인이었다.

"네, 그런데요?"

정수는 침대에 누운 채로 대답했다.

"그동안 심심하셨지요? 이제 밖으로 나와주시겠습니까? 재미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일.'

그 한 마디에 박정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의 눈이 반짝 빛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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