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타락신 (4)
두근
<의령수의 심장> 속에 든 불꽃이 고동쳤다.
피가 혈관을 타고 흐르듯, 보라색 불꽃이 식어버린 창훈의 몸을 순환했다.
"키엑 키엑 키엑 키엑."
당황한 <검은 양>이 한발 물러섰다.
망나니 중에선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검은 숲의 목자>가 저렇게까지 당황하는 건 정말 진기한 광경이었다.
"도저히 모르겠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자, 선물이다."
상원이 이죽거리며 품에서 새빨간 해골바가지를 꺼내 창훈 곁에 툭 던졌다.
해골바가지, <늙은이의 해골>이 데굴데굴 굴러가다 창훈의 몸에 부딪혔다.
"끄아아아악! 불신자!"
검은 양이 소리치며 상원을 향해 쿵쿵거리며 달려왔다.
사람을 닮은 거대한 괴물이 꼬리와 촉수를 휘둘러대며 달려드는 모습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상원의 눈엔 그 모습이 같잖게만 보였다.
그건 발악에 불과했으니까.
"화산정의 혐오체!"
상원의 목소리가 분지 안에 메아리쳤다.
"깔깔깔깔깔깔!"
그러자 해골에 깃든 타락신, 화산정의 혐오체가 깔깔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크르륵?"
돌진을 멈춘 검은 양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물러났다.
"설마...."
검은 양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홀홀홀... 오랜만이야. 아주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자네를 다시 만나기를 기다렸어. 우리가 보냈던 그 수많은 시간들이 생각나지 않아? 이 빌어먹을 염소 새끼야."
두둥실 떠오른 늙은이의 해골, 그 새까만 눈구멍 속에서 보라색 불꽃이 이글거렸다.
화산정의 혐오체의 목소리에서 끝없이 깊은 증오가 묻어져 나왔다.
화산정의 혐오체가 증오를 품는 건 당연했다.
화산정의 혐오체를 새하늘에서 쫓아낸 게 다름 아닌 검은 숲의 목자였으니까.
"네놈이... 어떻게?"
검은 양이 으르렁거렸다.
"홀홀홀, 귀찮은 도마뱀 다시는 볼 일 없을 줄 알았더니 여기서 다시 만났네? 분명히 저놈 새하늘에서 쫓아냈는데 어떻게 여기 있나... 싶지? 옆에 있는 이 친구가 도와줬어. 우리 위대한 어머니의 뜻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혐오체의 말에 상원이 피식 웃었다.
"그으으으윽... 불신자...!"
검은 양이 꼬리와 촉수를 미친 듯 꿈틀거렸다.
"용제...?"
오랜만에 듣는 용제의 목소리에 발라딘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아, 하하! 발라딘! 오랜만에 만나니까 정말 정말 반갑네. 당신이라면 그 목걸이를 가지고 있을 줄 알았어. 정말로 고마워.“
“아아.”
발라딘이 뱉어낸 입김이 허공에 흩어졌다.
"화산정의 혐오체. 당신 기분은 알겠습니다만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빨리 시작하시죠."
상원은 굳은 표정으로 핀잔을 주긴 했지만, 골칫덩어리인 검은 숲의 목자가 당황하는 꼴을 보는 게 내심 즐거웠다.
"알았어 알았어. 자, 게임을 다시 시작해보자고."
해골이 털썩 땅에 떨어졌다.
이어서 해골의 눈구멍에서 보라색 불을 온몸에 뒤집어쓴 도마뱀이 기어 나와 누워있는 창훈의 얼굴로 올라갔다.
"고마워 불신자. 이건 정말로 최고의 선물이야. 홀홀홀."
도마뱀은 그 말을 남기고 불어오는 바람에 먼지가 스러지듯 창훈의 콧속으로 훅 빨려 들어갔다.
화산정의 혐오체가 말한 최고의 선물, 그건 한창훈이었다.
수험자로 환생해서 하늘에 오른다는 번거로운 절차 따위 거치지 않고, 화신을 만나서 수호신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됐으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검은 양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타락신이 수호 계약을 맺고 수호신이 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타락신이 수호신이 될 수 없다는 법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호신이 된 타락신을 볼 수 없는 건 그게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승천 시험의 세계에서는 원칙적으로 스킬이나 성현 같은 초능력은 수호 계약을 맺어야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초능력이 없이는 승천 시험을 푸는 게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타락신의 눈앞에 수호 계약을 맺지 않은 수험자가 나타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없다.'
그런데 상원이 화산정의 혐오체의 눈앞에 13번 시험이 끝나도록 수호 계약 없이 살아남은 승천자를 턱 꺼내 놓은 것이다.
꿈틀
널브러져 있던 한창훈의 몸이 움직였다.
작은 떨림에 불과했지만 적막에 휩싸인 분지 속에서 그건 몸부림마냥 큰 몸짓처럼 느껴졌다.
"크으."
한창훈이 신음 소리를 내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자기 심장이 있는 자리에 박혀 있는 <의령수의 심장>과, 괴물이 되어버린 아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 혜... 혜경아."
"크아아아악!"
검은 양이 꼬리와 촉수를 격렬하게 흔들며 비명을 질렀다.
"이... 이게... 무슨...."
"뭐기는, 자네 아내를 잡아먹은 놈이 한 짓이지. 그나저나 이 총각도 곱상하구만. 임자 있는 몸만 아니었어도 꿀꺽 잡아먹는 건데 말이야. 홀홀홀홀."
의령수의 심장에서부터 기어 나온, 보라색으로 불타는 뱀이 한창훈의 몸을 감싸고 말했다.
"당신은...."
"반가워 총각. 나는 <화산정의 혐오체>라고 해. 이름과는 달리 아주 어여쁜 누님이지. 어때, 한창훈 씨. 나와 같이 이 시험을 깨고 하늘에 오르자고."
창훈이 고개를 돌려 상원을 쳐다보았다.
의견을 묻는 눈짓에, 상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험자 한창훈과 타락식 화산정의 혐오체, 둘의 계약을 성사하기 위해 열세 개의 시험을 기다렸다.
이제 그 기다림을 끝낼 시간이었다.
"네, 좋습니다."
대답하는 창훈의 눈매는 상원이 지금껏 본 적 없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그의 목소리에서 악신에게 잡아먹힌 아내를 구하겠다는 결의가 느껴졌다.
"그래, 계약 체결!"
혀를 날름거린 뱀이 씨익 웃고는 허공으로 산산이 흩어졌다.
뒤이어 굉장한 진동이 땅을 뒤흔들면서 빙판에 거대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이어서 거대한 짐승의 손과 발이 빙판을 뚫고 솟아올랐다.
"그아아아악!"
쿠구구구!
검은 양이 지른 비명은 본 드래곤의 거체가 빙판을 부수며 올라오는 굉음에 묻혀 사라졌다.
손과 발, 날개와 꼬리가 하나씩 하나씩 얼음을 뚫고 나와, 마침내 말라붙은 용암 재질의 거대한 본 드래곤이 빙판 위로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게 바로 타락신 <화산정의 혐오체>의 껍데기였다.
오오오오오!
드래곤이 하늘 위의 별들마저 흔들어버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포효를 질렀다.
그와 함께 강렬한 보라색 불꽃이 본드래곤의 몸을 화악 집어삼켰다.
"그으으으윽!"
그 엄청난 밝기와 열기에 샤믹과 발라딘, 그리고 검은 양마저도 눈을 가리고 물러섰다.
그리고 상원은, 보라색 불꽃을 뒤집어쓴 본드래곤이 자신을 향해 웃는 걸 보았다.
"고맙구려."
그 말을 남기고, 본드래곤은 쏘아 올린 폭죽처럼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타락신 <화산정의 혐오체>, 말 그대로 그 부활의 신호탄이었다.
"마... 맙소사...."
"용제... 정말로 용이었군."
샤믹과 발라딘이 하늘을 보고 말했다.
"하아."
한숨을 뱉는 창훈의 가슴엔 어느새 새 살이 돋아 구멍이 메워져 있었다.
그의 눈 속에서 보라색 불꽃이 일렁였다.
화산정의 혐오체와 수호 계약을 맺었다는 뜻이었다.
"죽다 살아나신 기분이 어떠십니까?"
상원의 말에 창훈이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숨에서 유황 냄새가 나는 기분입니다. 그닥 유쾌하진 않네요."
너스레를 터뜨리는 창훈의 말에 상원이 피식 웃었다.
"화산정의 혐오체의 힘이 몸속에 가득 찼으니 그렇게 느껴지실 순 있겠습니다. 진짜로 유황 냄새가 나거나 하는 건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네. 그나저나."
창훈이 검은 양을 보았다.
"저게... 혜경이군요. 어이구... 이 사람이 뭘 퍼먹어서 저렇게 살이 찐 건지 모르겠네요."
창훈은 검은 양의 끔찍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보면서도 너스레를 떨었다.
"크으으으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릉거리는 검은 양의 모습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새까맣게 물든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니 혜경이 완전히 잠식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대단하군. 저 정도라면 자아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게 보통인데.'
상원은 창훈을 돌아보았다.
창훈의 두 손끝에서 보라색 불꽃이 일렁거렸다.
"이제 검은 양을 몰아내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지 아시겠지요?"
"네. 할머님께서 하나하나 알려주고 계십니다. 더없이 편안하고 안정적인 기분입니다. 신의 수호를 받는다는 거... 이런 거였군요."
할머님이라는 말에 열이 받았는지 창훈으로부터 살짝 솟아난 불덩이가 손바닥 모양을 하더니 뒷통수를 찰싹 때리고 사라졌다.
너스레 떠는 쪽으로는 그 수호자에 그 화신이라고 상원은 생각했다.
"검은 숲의 목자. 다들 깡패네 뭐네 하면서 무서워하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새타니나 동굴개미 잡는 것도 저놈 잡는 것보단 어려울 건데."
손끝의 보라색 불꽃이 책 모양으로 변했고, 창훈은 책장을 휘릭휘릭 넘겼다.
"그러겠지요. 그게 화산정의 혐오체의 장긴데."
사실 객관적인 전력만 놓고 보면 화산정의 혐오체는 검은 숲의 목자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격을 부여받지 못한, 소위 <바깥의 존재> 중 하나인 검은 숲의 목자는 주신급에도 비빌 수 있는 괴물이었다.
반면 화산정의 혐오체는 성령, 그것도 잘 쳐줘 봐야 중급을 조금 넘어서는 정도였다.
하지만 격이 한참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검은 숲의 목자는 화산정의 혐오체를 이길 수 없었다.
왜냐하면 새하늘이 두 존재의 카르마를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었다.
카르마를 넘어서기 위해 검은 숲의 목자는 부단히 힘을 길렀고, 결국 화산정의 혐오체를 새하늘에서 추방했다.
그렇게 갖은 고생을 해서 카르마를 넘어선 줄 알았더니, 그놈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다시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이럴...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검은 양이 무릎을 꿇고 부들부들 떨었다.
"있지. 운명을 넘어서는 게 그렇게 쉬울 줄 알았어? 검은 숲의 목자."
상원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쉽지 않지.'
그 말은 상원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가족을 버리고 새하늘교에서 탈출했더니 승천 시험에 들었고, 심지어 시험을 두 번 치르게 됐으며, 심지어 볼 일 없을 줄 알았던 검은 숲의 목자는 송혜경이라는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났다.
운명은 그렇게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무슨 고생을 해서 저놈을 치웠는데... 불신자, 네놈. 다 네놈 때문이다! 끄아아아악!!!"
쿵쿵쿵쿵!
마신의 힘을 얻은 상원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괴물, 검은 양이 천지를 찢을 듯한 노호성을 지르며 상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상원은 겁먹지 않았다.
고작 그 정도 힘으로는 운명의 상대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아이구... 우리 할머님이 요새 기억력이 좀 안 좋으신가 봐요. 주문 찾는 데 좀 오래 걸리시네... 아, 찾았네요."
머리를 긁으며 휘척 휘척 책을 넘기던 창훈이 우뚝 손을 멈추었다.
"아... 아이구 여깄네. 그려... 그려.... 맞어 이거였어."
창훈이 책장을 탁 덮자 검은 양 뒤에서 거대한 보라색 불기둥이 솟아올라 팔 모양으로 변했다.
"자, 이눔 시끼. 이거나 먹어라."
손바닥이 검은 양의 등짝을 후렸다.
철썩 하는 소리가 온 빙원에 울려 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