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88화 (88/230)

제88화. 타락신 (3)

그 시각, 무덤 바깥의 분지.

수험자 샤믹 로드리게스와 뱀파이어 발라딘 블라드 대공은 보초를 서며 크레바스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후우."

발라딘이 한숨을 쉬자 보라색 생기가 숨에 실려 날아갔다.

인간의 생기를 흡수하지 않는지가 한참인지라 몸 여기저기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남은 일족들은 장남 아르템 블라드를 따라 <카라온 방벽>을 건너 남쪽으로 갔을 것이다.

지금쯤 성지에 닿았을까.

그들과 함께 간 지구인이 생기를 줄 수 있다는데 정말일까.

그런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때였다.

"아저씨. 이거 받아요."

샤믹의 부름에 발라딘이 고개를 돌렸다.

샤믹이 새빨간 돌덩이를 내밀고 있었다.

"이게 뭐요?"

"제 생기를 불어넣은 <생명석>이에요. 이걸로 기운을 좀 차리실 수 있을 거예요."

발라딘은 생명석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돌 속에서 신선한 생기가 고동치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아가씨는 괜찮소? 이렇게 생기를 나눠 줘도."

"문제없어요. 제 뒤에 있는 <가라앉은 거인>님은 마력 하나는 끝내주게 많거든요."

샤믹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아."

발라딘은 방벽 앞에서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이 여자는 뱀파이어쯤은 한 방이면 통구이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카라온 방벽의 포격을 몇 시간이나 버텼다.

그런 능력이라면 이 정도 생명력을 나눠주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고맙소."

발라딘이 생명석을 받아들자 돌에 깃든 생명력이 몸속으로 전해졌다.

인간의 생기를 직접 빨아 먹는 만큼은 아니었지만 기운을 차릴 정도는 되었다.

"아가씨 참 대단하더구려. 어떻게 그 포격을 맞고도 멀쩡하시오?"

"다 우리 대장 덕분이에요. 대장이 강해지는 방법을 가르쳐줬어요."

샤믹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아, 그렇지. <성주의 메인보드>까지 가는 삼중 방어체계를 그런 식으로 풀어낼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 굉장한 사람이오."

발라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굉장한 사람이에요 우리 대장은."

샤믹이 말했다.

"대장을 보고 있으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여요. 대장이 당황한다거나 하는 건 전혀 상상이 안 돼요."

"동의하오. 나도 몰랐소, 그런 사람이 또 있을 줄은."

발라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요?"

샤믹이 고개를 돌렸다.

"용제도 그랬거든. 그 여자가 우리 일족을 찾아왔을 때 했던 이야기들은 미래에 관한 것이었소. 근거 없는 이야기들을 확신에 차서 하는데... 뭐랄까, 정말로 미래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

과거를 바라보는 발라딘의 눈동자가 깊었다.

"그런 말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아니야. 그런 게 아니오. 선후가 바뀌었어."

발라딘이 말했다.

"확신에 차서 미래를 말하는 사람은 많이 있다오. 그런 자들은 정신병자 취급을 받기 십상이지. 그런데, 어떤 사람들의 말에는 알 수 없는 신뢰감을 느낀단 말이오. 보통은 그런 사람들을 선지자라고 부르지."

발라딘은 용제가 그에게 맡겼던 목걸이를 떠올렸다.

그 목걸이의 이름도 <선지자의 목걸이>였다.

"선지자."

샤믹이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휘익-.

갑자기 불어온 눈보라가 총총한 별들을 가렸다.

"끄아아아악!"

멀리서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공포스러운 소리에 샤믹이 침을 꿀꺽 삼켰다.

쩍! 쩍!

크레바스 저쪽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심상치가 않군."

발라딘이 양손 검을 뽑아 들었다.

보라색 기운이 칼날을 타고 흘렀다.

"끄아아악!"

밤의 눈보라 너머에서 또 한 번의 포효가 들려왔다.

이어서 언제 그랬냐는 듯 짙은 적막이 분지를 덮쳤다.

잠시 후 크레바스 안쪽에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그림자가 다가올수록 으르렁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커졌다.

삽시간에 눈보라가 그치고 아나르의 세 달이 분지를 비추었다.

그와 함께 크레바스로부터 사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체구가 꽤 큰 인간 여자, 바로 <검은 숲의 목자>의 화신 송혜경이었다.

그녀의 몰골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머리칼은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입은 옷은 넝마에 가까웠으며 온몸에 새빨간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비켜."

혜경이 으르렁거리며 검은 손톱을 세웠다.

그녀는 <검은 숲의 목자>에게 완전히 빙의되어 두 눈이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맙소사."

샤막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눈앞의 저자가, 마물이 아니라 정녕 자기와 같은 수험자란 말인가.

"나무의 자식."

발라딘이 말했다.

검 손잡이를 쥔 그의 손등에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그는 온몸의 감각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눈앞의 지구인을 막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걸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비켜."

혜경이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의 것이 맞나 싶은 목소리에 샤믹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게는 안 되지."

발라딘의 검에서 보라색 검강이 길게 뻗어 나왔다.

"후웁."

샤믹이 땅에 두 손을 대고 대지의 기운을 빨아들였다.

그녀의 피부가 돌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크아아악!"

송혜경이 침방울과 함께 비명에 가까운 울부짖음을 토해내며 달려들었다.

검은 손톱에서는 새까만 기운이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후욱!"

"하아아앗!"

발라딘과 샤믹도 혜경을 향해 달려들었다.

곧 힘과 힘이 부딪히는 굉음이 분지 전체에 울려 퍼졌다.

* * *

무덤 밖으로 나오자 빙하 지대의 찬바람이 상원의 뺨을 때렸다.

쇠가 부딪히는 것 같은 굉음과 비명, 그리고 피 냄새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세 개의 달이 뜬 아나르의 밤하늘 아래서 발라딘과 샤믹 그리고 송혜경, 세 남녀가 맞부딪히고 있었다.

"호오."

상원은 짧게 감탄사를 뱉었다.

<검은 숲의 목자>의 화신 송혜경의 객관적인 전력은 샤믹과 발라딘을 합친 것 이상이었지만, 두 사람은 오히려 혜경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샤믹과 발라딘이 합이 잘 맞기 때문이었다.

힘이 센 샤믹이 크고 둔탁한 공격을 날리고 그 빈틈 사이로 발라딘이 날카로운 칼날을 찔러 넣었다.

송혜경이 공격을 날리면 발라딘이 물러서고 샤믹이 공격을 맞았다.

"크으으윽!"

싸움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송혜경이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점찍어둔 먹이를 먹이기만 하면 이런 떨거지들은 순식간에 해치워버릴 수 있을 텐데.

혜경 아니, 검은 숲의 목자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이 <검은 숲의 목자>에게 먹이를 던져 줄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검은 숲의 목자!"

상원의 외침에 세 사람이 상원을 돌아보았다.

"불신자!"

검은 숲의 목자는 분노로 터져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격조 높으신 승천자께서 그렇게 얼굴을 구기시면 어떡하나. 체통을 지키셔야지."

상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네놈, 편하게 못 죽어! 산 채로 네놈의 살점을 하나하나 뜯어먹겠어! 크아아악!"

검은 숲의 목자가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질렀다.

검은 숲의 목자가 상원에게 품은 증오심은 상상을 초월했다.

걸핏하면 추방 주문을 외워서 화신으로부터 쫓겨났고 화신을 각성시킬 수 없게 갖은 술수를 부린 데다가 수험자 주제에 승천자인 자신과 <새하늘 약속>을 맺어서 자기를 종처럼 부린 게 바로 상원이었다.

게다가 아나르에 넘어올 때는 자기를 대륙 정 반대편 군도에 떨어뜨려 놓아서 먹이가 있는 곳까지 말 그대로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와야 했다.

"여기 있다, 니 먹잇감."

상원은 브라이싱크론 지갑에서 가사 상태의 한창훈을 꺼냈다.

창훈이 들고 있는 <의령수의 심장>, 상원이 거기에 마력을 불어넣자 구슬에 새파란 불빛이 들어오며 창훈이 눈을 떴다.

"어... 벌써 약 먹을 시간인가요?"

창훈이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물었다.

그때였다.

"크아아악!"

혜경이 쏜살처럼 창훈을 향해 튀어왔다.

"이런!"

"대장, 조심해요!"

혜경을 놓친 샤믹과 발라딘이 낭패감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어... 여보?"

창훈이 얼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푹!

혜경의 손이 자신의 심장을 꿰뚫는 그 순간까지도, 창훈은 몽롱한 눈으로 혜경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헤경은 창훈이 쿨럭 하고 뱉어낸 시뻘건 선지피를 뒤집어썼다.

"어... 어...? 어, 여보...."

그 순간 혜경의 눈빛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혜경이 스스로 저지른 짓을 알게 하기 위해서, 검은 숲의 목자가 그녀를 제정신으로 되돌린 것이었다.

남편의 심장을 꿰뚫은 자기 손을 바라보는 혜경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 으... 으으...."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혜경의 목소리가 마치 쇠를 긁는 것 같은 소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으윽..!"

"끄아아아아...."

샤믹과 발라딘이 귀를 막고 주저앉았다.

그와 함께 새까만 기운이 그녀의 눈을 뒤덮었고 몸이 거대하기 부풀기 시작했으며, 몸 여기저기서 흉측한 촉수가 튀어나왔다.

"각성이 시작됐군."

상원이 중얼거렸다.

화신의 광기를 주무르는 검은 숲의 목자, 그가 화신을 각성시키는 방법은 화신의 손으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살해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각성한 <검은 숲의 목자>의 화신은 <검은 양>이라 불리며, 상원조차도 상대하기 어려운 괴물이 된다.

"키엑 키엑 키엑 키엑 키엑 키엑...."

거대하고 살찐 몸뚱아리는 전체적으로 인간 형태이긴 했지만, 굵은 꼬리와 온몸에 돋은 촉수를 흔드는 모습은 도저히 수험자라고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오히려 어느 정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게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우욱."

"맙소사...."

<검은 양>의 존재감에 발라딘은 굳어버렸고 샤믹은 아예 주저앉아 토악질을 했다.

그 존재를 인식한 것만으로도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것, 그게 검은 양의 힘이었다.

물론 그들과는 격이 다르게 강한 상원은 예외였다.

"실제로 보니까... 아주 못생겼군."

승천 시험이 새하늘교의 계획대로 진행됐다면 언젠간 상원의 누나 조상은이 상원을 잡아먹고 저 괴물로 변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수만 번은 생각해본 상황이었지만 막상 <검은 양>을 눈앞에서 보니 저런 괴물로 변하기보다는 시험에서 탈락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가 죽어버린 지금은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였지만.

"검은 숲의 목자. 어때, 기분 좋나?"

"키엑 키엑 키엑... 불신자... 죽어라...."

<검은 양>이 혜경의 이목구비가 남은 얼굴로 승리감에 가득 찬 뒤틀린 웃음을 지었다.

제아무리 불신자가 규격 외의 강자라 해도 정면 승부로 검은 양을 이길 수는 없으니 승리감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쿵쿵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검은 양의 손끝에서 발라딘의 장검보다 거대한 손톱이 예리한 빛을 내뿜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안 드나? 이제까지 불신자는 갖은 수를 다 써서 먹이를 떨어뜨려 놨는데, 왜 지금 시점에 갑자기 먹이를 내놓았을까?"

상원이 피식 웃었다.

"키에엑?"

검은 양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던 것이다.

승천자 <검은 숲의 목자>는 행동이 제멋대로일 뿐 사고력은 좋은 축에 속했다.

목자가 조금만 생각을 해봤다면 한창훈을 넙죽 잡아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창훈을 꺼냈을 때 목자가 바로 달려들도록 만드는 것, 그게 상원의 설계였다.

"오랜만에 친구 만났으니 인사를 해야지. 아주 반가울 거다."

상원이 창훈의 가슴에 난 구멍에 <의령수의 심장>을 박아 넣었다.

그러자 의령수의 심장이 은은한 보라색을 내뿜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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